사표
사표
2018.02.14 14:32 by 김사원

기획팀원 네 명 중 세 명이 사표를 냈다. 사표 행렬의 시작은 디자인팀 김 차장이었다. 이사들은 "디자인 그거 며칠이면 되잖아?" 하며 디자인의 디귿도 모르는 듯한 소리를 자주 했고, '며칠이면 되는 디자인 그거' 업무는 점점 과도해졌다. 이런 일들로 몇 달 전부터 이사들과 김 차장의 설전이 몇 번 있었고, 결국 김 차장은 사표를 냈다. 뒤를 이어 개발팀 윤 과장이 사표를 냈다는 얘기가 들리더니 기획팀 송 차장과 이 과장도 사표를 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몇 달이나 말없이 늦어진 연봉 협상에서 연봉은 1%가 올랐다. 이때부터 회사에 대한 직원들의 불만은 커지기 시작했다. 이사들은 직원들의 크고 작은 의견들을 무심코 넘겨버리곤 했다. 그러다가도 사장의 지적이 있는 날은 직원들을 모아 놓고 '왜 능동적으로 일을 하지 않느냐'며 타박을 해 직원들이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얼마 전부터는 메신저 카카오톡에 사장이 포함된 '단톡방'을 만들어놓고 그곳에 직원들이 매일 업무보고를 하게 했다. 직원들은 월급도 적은데 이런 대우를 받고 이런 스트레스를 참으며 이 회사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103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사표를 내고 싶게 만드는 상황으로 가장 많은 직장인이 ‘회사에 비전이 없다고 느껴질 때(56.3%, 복수응답)’라고 대답했다. 다음으로 ‘열심히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34.4%)’를 꼽았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103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사표를 내고 싶게 만드는 상황으로 가장 많은 직장인이 ‘회사에 비전이 없다고 느껴질 때(56.3%, 복수응답)’라고 대답했다. 다음으로 ‘열심히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34.4%)’를 꼽았다.

기획팀에 남은 사람은 홍 차장과 김 사원이었다. 둘은 사표 행렬에 대해 한두번 얘기를 나누긴 했지만, 깊은 속마음까지 나누지는 않았다. 노란 오리 캐릭터를 닮은 40 대 사수와 입사한 지 1년도 안 된 부사수는 각자의 방식으로 동요하고 있었다.

같은 팀 직원들이 급하게 퇴사를 결정하며, 홍 차장과 김 사원은 그들이 하던 업무들을 일단 떠맡게 되었다. '인력 충원을 어떻게 하겠다. 그동안 고생 좀 해달라' 같은 얘기는 없었다. 회사는 내년에도 연봉을 1% 올려줄 것 같았고, 이사들은 앞으로도 무식하게 일하고, 눈치 없는 사장은 주말마다 '행복한 사람들의 10가지 습관' 따위의 글을 단톡방에 올릴 것 같았다.

 

직원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장의 습관 첫 번째는 ‘쓸데없이 주말에 연락하기’가 아닐까.
직원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장의 습관 첫 번째는 ‘쓸데없이 주말에 연락하기’가 아닐까.

마침내 홍 차장도 결단을 내렸다. 우울한 오리 같은 표정을 짓고서 김 사원에게 자신의 사표 제출 소식을 전했다. 며칠 동안 김 사원은 홍 차장의 사표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틈이 없었다. 자리에 앉아 일하는 척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할 뿐이었다. 그래도 홍 차장님은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니까 급하게 퇴사하지는 않을 거라고, 후임을 뽑고 업무 인수인계를 할 때까지 한두 달은 더 다닐 거라고, 그때쯤이면 자신도 1년 차가 될 테니 회사를 옮길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동요하는 마음을 다스리고 있을 뿐이었다.

홍 차장이 사표를 낸 지 일주일쯤 됐던 어느 금요일 오후, 홍 차장은 커피나 한잔하자며 김 사원을 불러냈다. 이 전에도 가끔 홍 차장은 배고프지 않느냐며 김 사원을 데리고 나갔었다. 보통은 커피나 간식거리를 사주고는 바로 사무실 자리로 돌아왔는데, 이날은 커피를 사 들고 회사 건물 1층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김 사원은 홍 차장이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했다.

"나 지난주에 사표 냈잖아"

"네, 하하. 어떻게 되셨어요?"

사표를 받은 이사들은 홍 차장을 붙잡았고, 홍 차장은 붙잡힌 모양이었다. 다음 주에 본부 조직 개편이 있을 거라고 했다. 기획팀에 새 직원이 출근하기로 했고, 기획 업무는 모르지만 어쩌다 보니 기획팀장이었던 김 팀장은 새 팀을 만들어 분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홍 차장이 직접 밝히지는 않았지만, 김 사원은 홍 차장이 기획팀장을 맡게 되었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책임감 있고 업무를 잘 아는 홍 차장이 팀장이 되어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홍 차장이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김 사원 자리는 이사실 바로 앞이라 이사실에서 하는 얘기들을 대충 엿들을 수 있었다. 퇴사를 굳게 결심하고 이직 준비까지 마친 직원이 이사와 면담을 할 때는 차분한 분위기에서 가끔씩 직원의 겸연쩍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니면 상대의 격양된 목소리와 함께 '노동부'라는 단어가 들리기도 했다. 홍 차장이 사표를 내고 이사와 면담할 때는 "우리 회사는 이러이러한 게 문제예요. 제가 다녔던 다른 회사에서는 이렇게 안 했어요."라고 말하는 약간 흥분한 홍 차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사람의 태도라기에는 애정 내지는 미련마저 느껴졌다.

 

고용노동부 고객상담센터는 국번없이 1350이다. 전화할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고용노동부 고객상담센터는 국번없이 1350이다. 전화할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한 주가 지나 조직 개편이 공지되었다. 새 직원들이 출근해 업무 인수인계를 했고, 퇴사가 결정됐던 직원들 중 윤 과장과 이 과장이 마지막으로 퇴사를 했다. 직원들이 줄줄이 그만두는 와중에도 진행 중이던 사업 하나는 마무리가 됐다. 기존 직원이 질려서 떠난 버린 자리에는 어딘가를 떠나왔을 사람들이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홍 팀장을 포함한 기획팀 세 명은 업무 현황과 계획에 대해 간단히 회의를 했고 개편된 조직에 맞게 자리 배치도 바꿨다. 김 사원은 업무 정리와 자리 이동까지 마치고 나니 '뭐 그렇게 사표까지 낼 일은 없었던 것 같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 사원은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새로 온 기획팀원은 자기보다 몇 살 어린 홍 팀장과 갈등을 빚을지도 모른다고. 내년 연봉은 1% 인상은커녕 동결될지도 모른다고. 이사들은 계속해서 직원들의 혈압을 오르게 하고, 권위적인 것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사장은 권위적인 본인을 욕하는 직원들의 속을 영원히 모를 거라고.

필자소개
김사원

10년 차쯤 되면 출근이 조금 담담하게 느껴진다던데요. 저에게도 10년 차가 되는 날이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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