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을 시도하는 용기
이직을 시도하는 용기
2018.03.07 14:01 by 김사원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김 사원이 이직을 꿈꿀 때도 용기가 필요했다. 불만과 불안 사이에서 불안을 선택할 용기. 회사는 이번에도 구식 콘텐츠를 사들였다. 공짜로도 안 볼 콘텐츠를 유료로 팔겠다면서 영업 전략은 접대가 유일했다. 옆자리 이 과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만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라리 거기가 나았다’며 한숨짓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 사원은 먼저 머릿속으로 이직을 시도해보았다. 와르르. 상상만 했을 뿐인데 일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채용 공고를 뒤지고 회사 정보를 알아보느라 정신이 팔릴 며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쓰느라 머리를 쥐어뜯을 시간, 합격 소식을 기다리며 초조함으로 채울 하루하루…. 그동안 회사 일은 일대로 꾸역꾸역 해내야 하고 퇴근 후 여가는 포기해야 한다. 이렇게 일상을 무너뜨리고 그에 걸맞은 보상을 얻을 수는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용기가 싹 달아났다. 내세울 경력도 마땅치 않으니 일단 지금 회사에 다니며 더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회사는 낡은 사업을 고집하고 상사들은 일하는 시늉만 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자네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뭘까?

바로 지금의 생활양식을 버리겠다고 결심하는 걸세.

그러다 용기를 낸 적도 있었다. 성탄절을 코앞에 두고 김 사원은 갑작스레 이직을 시도했다. 우연히 본 어느 회사의 채용 공고가 계기였다. 채용 분야가 마침 최근 관심사와 잘 맞아떨어진 데다 사업을 확장 중이었고 사이트와 마케팅까지 세련된 회사였다.

송년회 약속을 미루고 방에 틀어박혔다. 자기소개서를 몇 줄 쓰다가 검색창에 회사 이름을 치고는 잡다한 글을 읽었고, 연봉이 오를지 오래 다닐 수 있을지 고민하다 다시 자기소개서 화면을 띄우며 성탄절 연휴를 다 보냈다.

수험생은 ‘시험에 합격하면 장밋빛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회사원은 ‘직업을 바꾸면 만사가 술술 풀릴 것’이라고 기대하지.

하지만 막상 바라던 것이 이루어져도

상황이 뭐 하나 달라지지 않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네.

면접일은 지금 회사의 종무식 날이었다. 연말연시 어수선한 사무실 분위기 속에서 김 사원은 두 배로 뒤숭숭했다. 조촐하게 진행한 종무식은 타박 섞인 덕담(‘직원끼리 소통이 부족해! 새해에는 소통에 신경 쓰도록!’)으로 시작해 업무 방식을 두고 벌어진 논쟁(‘개발에서 협조가 안 돼요. 시간이 부족해 어쩔 수 없다니까요’)으로 이어졌고 이내 체념(‘그만하고 퇴근이나 합시다’)으로 마무리되었다. 종무식이 예상치 못하게 난장판이 되는 광경을 보며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게 이런 걸까 싶었다. 오늘 면접이 잘 끝난다면 바보들에게 멋지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뻥 뚫렸다.

문득 머릿속에 ‘현실 도피성 이직’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자기소개서는 성장과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로 그럴듯하게 채웠지만, 사실은 별다른 대책도 계획도 없이 그저 지금 회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앞선 것은 아닐까.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 사원은 재능을 살릴 기회, 더 많이 배울 기회를 찾고 있었다. 더 나아지길 바라는 욕구, 그 보편적이고 순수한 욕구가 우선이었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김 사원은 이미 현실 도피를 하고 있었다. 가망 없는 회사에 최선을 다할 필요가 없다고 체념한 지 오래였다. 적당히 다니다가 떠날 회사니 괜히 열정을 쏟을 필요도, 잘 보이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었다. 정체될까 두려웠지만 포기하면 편했다. 그러니까 이직 시도는 현실 도피의 확장판이었다.

가망 없는 회사에 최선을 다할 필요가 없다고 체념한 지 오래였다. 어쩌면 이직 시도는 성장과 가능성을 향한 도전이 아니라 현실 도피의 확장판인지도 모르겠다.
가망 없는 회사에 최선을 다할 필요가 없다고 체념한 지 오래였다. 어쩌면 이직 시도는 성장과 가능성을 향한 도전이 아니라 현실 도피의 확장판인지도 모르겠다.

면접은 팀장과 일대일로 진행되었다. 회사도 팀장도 젊었다. 조직과 화합하는 사람보다는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을 원했고, 무엇보다 격무를 이겨낼 의지가 우선인 듯했다. 야근이 많은 편이라는 팀장의 말에 야근이면 몇 시 정도인지 묻자, 보통은 밤 열한 시 때때로 새벽 세 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물 한 잔을 대접 받지 못한 탓에 김 사원의 입술이 자꾸만 앞니에 달라붙었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고민은 깊어졌다. 경력과 전문성을 쌓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과도한 근무가 역시 걱정이었다. 업무에서 성취감을 느낀다면 철야에 휴일 근무도 괜찮아질까. 요리도 등산도 이제 포기해야 할까. 여기까지 생각하니 가슴이 조여왔다. 대단한 일도 아니고 야매 요리를 만드는 일, 고작 뒷산에 오르는 일이 앞길을 막으려 하고 있었다. 합격 연락을 받은 상태도 아니건만.

혹시나 주말까지 기다려봤지만 이번 주 안에 준다는 연락은 월요일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합격한다 해도 두 팔 벌려 달려갈 상태는 아니었는데 정작 기대를 접고 나니 좌절감이 밀려왔다. 좌절감을 받아들여야 했던 며칠도 일상이 무너졌다.

 

청년 : 그러면 인생이 어떤 모습이라는 겁니까?

철학자 : 선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점이 연속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분필로 그어진 실선을 확대경으로 보면, 선이라고 여겨진 것이 실은 연속된 작은 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 선처럼 보이는 삶은 점의 연속, 다시 말해 인생이란 찰나(순간)의 연속이라네.

무너진 일상에 파묻혀 위로와 감동이 필요하던 때에 <미움받을 용기>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가볍고 희망찬 자기계발서를 예상했는데 철학자와 청년이 삶과 인간을 이야기하는 인문서였다. 첫 장부터 교훈은 분명했다. 삶은 선이 아니라 점의 연속이므로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김 사원의 상황에 맞게 바꾸자면 ‘이직에 실패한 상황은 지나간 점일 뿐 다음 점은 김 사원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라고 할까. 들어볼 만한 조언이었다. 면접 장면을 되새김질하며 탈락 이유를 찾는 일에 지쳐가고 있었으니까. 다시 바보들의 행진에 동참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으니까.

철학자는 모든 고민이 인간관계를 경쟁으로 바라보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인간관계의 목표는 공동체 감각이며 공동체 감각을 기르기 위해 ‘자기수용→타자신뢰→타자공헌→자기수용’으로 이어지는 순환구조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철학자의 말답게 알 듯 말 듯 한 이야기였다.

이직에 실패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였으니 김 사원은 자기수용 단계일까. 철학자의 가르침을 따라 다음 단계로 나아가면 어떤 모습일까. 바보 같기만 한 상사와 동료를 다시 바라보고 진실하게 대한다면 타자신뢰 단계일까.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해 공동체에 공헌한다는 타자공헌 단계에서는 어떨까. 고매하지 못한 업무도 성심성의껏 하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게 될까.

그때쯤 김 사원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을까?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에서 일상을 다시 세우는 데 힘이 될 실마리를 분명 얻었지만 질문은 남아있었다. 상대방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과는 어떻게 지내야 할까? 무책임한 사람과는? 열정과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을 신뢰할 수 있을까? 아니면 과감히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을까? 나 자신을 받아들이면 정말 나아질까?

철학자는 대답한다.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적인지 아닌지는 상관하지 말고.” 그리고 철학자와 청년은 하하 호호 끝인사를 나눈다.

나부터 시작한다라…. 다시 한번 용기가 달아났다.

 

* 인용문(진한 글씨) 출처 : <미움받을 용기 1>, 고가 후미타케, 기시미 이치로(지음), 전경아(옮김), 인플루엔셜, 2014년

필자소개
김사원

10년 차쯤 되면 출근이 조금 담담하게 느껴진다던데요. 저에게도 10년 차가 되는 날이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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