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마을
2018.03.29 12:40 by 모자

 

그 마을은 낮은 산이 울타리가 되어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는 하나였다. 시멘트를 부어 만든 신작로를 따라 조금만 걸어도 어느새 풍경이 초록으로 변했다. 경계를 알리는 장승이나 비석조차 없어서, 이쯤 왔으면 도착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 거기가 마을의 시작이었다. 마을은 측량하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경계를 가늠하는 지점이 제각각이라 오십 미터에서 백 미터쯤 커졌다 작아졌다. 신작로 주변으로 간판이 부식되어 잘 보이지 않는 슈퍼가 있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채 한 발자국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내부가 좁았다. 문소리를 듣고 나오는 주인 할머니의 나이는 도통 추측할 수 없었다. 떠듬떠듬 말하는 통에 대화를 하기 어려웠다. 방언인지 불경인지 모를 것을 읊는 할머니의 치아 몇 개가 어느 해 태풍에 쓸려갔다고 들었다. 갈무리되지 않은 바람이 할머니의 입속에 머물다가 쉬익, 쉬익, 소리를 내면서 빠져나왔다. 파는 물건보다 안 파는 물건이 더 많은 곳이라 슈퍼보다는 점방이라고 불러야 할것 같았다. 내게는 그 점방이 마을과 마을이 아닌 곳을 가르는 경계선 같았다.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마을이었다.

점방을 지나면 여름에도 물이 잘 흐르지 않는 개울이 나왔다. 퇴적된 모래에 이름을 알 수 없는 풀이 종류별로 자랐다. 낮에는 누군가 곁에 흑염소를 두어 마리 매어 놓았다. 염소는 풀과 물과 목줄을 씹으며 주인을 기다렸다. 하관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뛰는 게 엉성한 짐승이었다. 그것들은 간혹 메에에, 하고 길게 울었다. 지나쳐 갈 때까지 울음이 끝나지 않아서 나까지 덩달아 메에에, 하고 울기도 했다. 돌아보는 염소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동자 깊숙이 까만 흑요석이 박혀 있었다. 눈을 마주치면 빗질이 안 된 염소의 등을 쓰다듬고 싶었다. 손가락에 검은 털이 엉키면 그게 나의 눈썹인지 염소의 수염인지 묻고 싶었다. 개울 양옆으로는 익지 않은 벼가 셀 수 없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만 아직 뻣뻣한 모가지가 간신히 기울었고 논 위로 낮게 날던 잠자리들이 휘청거렸다. 열댓 마리인가를 세다가 그만두고 고개를 들자 잠자리가 별보다 더 많았다. 검지를 높이 들면 나뭇가지로 착각한 녀석이 손가락 끝에 앉았다. 살며시 날개를 잡아도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았다. 잠자리가 떠난 손가락 끝에 코가 찡할 정도로 매운 냄새가 남았다. 날려 보낸 것이 빨갛고 예쁜 고추잠자리 였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논이 끝나는 곳엔 작은 밭과 오이 농사를 하는 하우스가 열을 지어 늘어섰다. 길가에는 용처를 알 수없는 크고 작은 농기계와 부속이 방치되어 있었다. 벗겨진 도장의 틈으로 녹이 피었고 여기저기 깎이고 눌린 자국이 보였다. 주변으로 풀이 자라고 흙이 덮여 궁색해 보였으나, 그것들은 길가에 버려졌다기보다는 길가에 보관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원래 그 땅에 살던 작은 생물들은 농기계를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저 타고 넘거나 잠시 쉬어갈 뿐이었다.

점방과 개울과 논밭을 모두 지나고서야 돌멩이로 담을 쌓은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주먹보다 크고 머리보다 작은 크기의 돌을 짜 맞춰 놓은 모양이 제법 견고했다. 담을 붙들고 늘어지는 호박넝쿨이 을씨년스러웠다. 파란색 철문에는 파란색 사자가 문고리를 물고 있었다. 흔들면 으르렁거리는 대신 끼이익 소리를 냈다. 철문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났다. 끼이익, 낡은 소리를 토해내는 대문을 지나면 한때는 커다랗던 작은 마당이 나왔다. 마당 한편에는 감나무가, 감나무 옆으로 작은 들꽃이, 꽃나무 곁에서 풀이, 한참 익어가고 있었다. 장독대는 아담해서 독을 몇 개 놓을 수 없었지만 된장과 고추장의 진한 냄새가 마당까지 퍼졌다. 장독 뚜껑을 눌러 놓은 돌이 제멋대로 생겨서, 동네 강아지들이 가끔 짖었다. 다른 한쪽에는 큼지막한 돌절구와 공이가 놓여 있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절구는 연못이 되어 고요해졌다. 절구 안에 들어가 공이에 잔뜩 얻어맞으면 뽀얗게 탈색될 것 같다는 생각을 마루에 앉아 몇 번인가 반복했다. 종일 처마 끝에 고인 빗물이 공이질하듯 쿵덕쿵덕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마루에 앉아 기둥이나 서까래를 보고 있노라면 날벌레와 풀벌레가 끊임없이 찾아왔다. 나나니벌은 집 안 어딘가로 계속 파고들었고 호박벌과 풍뎅이가 벽과 몸싸움을 하면서 순찰을 돌았다. 방아깨비나 메뚜기나 여치 같은 것들은 구분 없이 마당을 휘젓고 다니다가 인사 없이 떠났다. 가끔은 끄덕거리며 전진하는 사마귀와 마주쳤고, 앞다리를 들고 위협하는 자세가 가여워 멀찍이 비켜주었다. 마루에선 시간이 느리게도, 빠르게도 흘렀다.

노을이 질 무렵 굴뚝으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한겨울에는 길고양이가 아궁이 깊은 곳에서 불을 쬐다가 털이 까맣게 그을리고 나서야 후다닥 뛰쳐나온다, 라는 이야기를 듣느라 까만 가마솥이 더 까맣게 그을었다. 가마솥으로 지은 밥은 어쩐지 윤기가 돌았다. 마루에 앉아 서대조림과 김치와 반찬 두어 가지와 밥을 입에 넣으며 별을 보았다. 가로등이 금세 꺼지는 마을에서는 풀벌레가 밤새도록 별을 보며 울었다. 재래식 화장실에 들어가기 두려워 풀밭에 오줌을 누고 캄캄한 방으로 들어가면, 누군가의 발을 밟아도 그게 발인지 꼬리인지 울음주머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창호지 너머의 달빛은 너무 아련했다.

 

*

당신은 이곳에서 만 일 가까이를 살았다. 당신의 어머니는 삼만일 가까이를 살았다.

모녀는 제철에 맞는 나물을 캐려고 소쿠리를 머리에 이었을 것이다. 화로에서 익은 감자를 꺼내다가 귓불을 잡았을 것이다. 기운차게 당신을 쫓아다녔던 수탉에게 모이 주는 일은 당신의 몫이었을 것이다. 밭을 매거나 오이를 따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는 막아 놓은 우물터에서 빨래를 하던 어머니는, 칠남매의 키가 자랄수록 왜소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섧게 우는 날이 있었을 것이다. 오빠들에게 골라주고 남은 감의 떫은맛이 기억나는 날도 있었을 것이다.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는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다. 방치되었다가 쓰러지다가 허물어지다가 희미해진다. 한줌의 기억에 의지해 나는 당신의 집을 그려 보았다. 어쩌면 파란색 철문의 문고리를 물고 있는 짐승은 사자가 아니라 호랑이 혹은 독수리나 기린일지도 모른다. 아궁이에 올라가 있던 것은 가마솥이 아니라 커다란 돌절구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쓰다듬어 주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당신의 등일지도 모른다.

(사진: Attila JANDI / Shutterstock.com)

 

*원문 출처: 모자 지음, 『숨』, 첫눈출판사, 2018.

 

필자소개
모자

세상을 마음으로 관찰하는 작가. 필명 모자의 의미는 작가의 말로 대신한다. ‘모자를 좋아합니다. 모자라서 그런가 봅니다.’ 지은 책으로는 『방구석 라디오』와 『숨』이 있다. 섬세한 관찰력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꾸밈없이 담백하게 쓴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평범하게만 느꼈던 일상이 특별하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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