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18도를 봤나(feat.무결점, 선비의 술)
당신의 입문 혹은 입맛을 위해- 한산 소곡주
이런 18도를 봤나(feat.무결점, 선비의 술)
2018.04.12 16:48 by 이창희

무엇이든 처음이란 건 필시 설레는 법이다. 으레 기대와 희망이란 녀석이 뒤따르고, 괜스레 마음가짐부터 달라지게 만드는 힘이 있다. 물론 그 너머에는 위기와 고난, 아쉬움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흥미로운 것인지도 모르지만.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아마 감을 잡았을 거다. 서두가 이렇게 담담하고 슴슴한 이유는 오늘 소개할 술의 특성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그렇다. 이번 전통주 다이제스트의 주인공은 선비의 술, 한산 소곡주다.

때는 바야흐로 조선 중기. 전주 태생의 이 생원은 초시에 합격한 후 문과를 치르기 위해 한성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충청도를 지나던 그는 하루 묵어갈 곳을 찾던 중 서천군 한산면 인근의 주막에 여장을 풀기로 했다.

허기졌던 터라 저녁을 허겁지겁 먹고 있으니 주모가 직접 담갔다며 술 한 병을 내왔다. 한잔 따라 살펴보니 맑고 향긋한 곡주가 아닌가. 조심스레 음미해보니 목을 타고 매끄럽게 넘어가는 그 맛이 일품이라. 마침 휘영청 밝은 보름달도 떴겠다, 뻐꾸기 우는 소리마저 운치를 더한다. 그렇게 술에 취해 분위기에 취해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어느 덧 정신을 차려보니 과거날은 이미 지나버렸다. 눈앞이 캄캄해진 이 생원은 땅을 치고 후회했으나 그에게 남은 것은 숙취를 안고 낙향하는 길 밖에 없었다.

 

당연히도 공식적인 문헌이나 기록이 아닌, 구전으로 이어오고 있는 설화다. 술에 관한 이야기는 그 흥미를 더하기 위해 으레 과장이 심한 법이니,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어가자. 그래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 아닌가? 사실 저 설화 말고도 더 있다. 한산면으로 시집온 며느리가 술이 잘 익었는지 젓가락으로 찔러서 맛을 보다가 멈추질 못해 취해 주저앉아버렸다는 사연 등등.

어쨌거나 소곡주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 일대를 지역기반으로 하는 전통주다. 그 옛날 백제의 궁중에서 소비되던 술로, 백제가 망하고 난 뒤 남은 유민들이 슬픔을 잊기 위해 마셨다고도 한다. 슬픔을 희석시키는 술의 기능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모양이다.

소곡주의 이름은 흴 소() 누룩 곡()이 공식적인 어원이지만 작을 소()를 사용하기도 하며, 소복을 입고 빚은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우희열 명인. 1965년에 시집와 반세기 넘도록 소곡주를 만들고 계신다. (사진: 우리나라 처음술 한산소곡주)
우희열 명인. 1965년에 시집와 반세기 넘도록 소곡주를 만들고 계신다. (사진: 우리나라 처음술 한산소곡주)

철분이 함유된 한산면 천연수를 사용해 특유의 질감이 있으며, 주재료는 찹쌀·누룩·백미·야국 등이다. 현재 충남 무형문화재 3호이자 국가지정 명인 제19호인 우희열 명인과 그의 아들인 나장연 전수자가 대표적인 계승자다. 물론 이들 외에도 한산면에 위치한 양조장 40여곳이 면허를 갖고 있다.

알콜 도수는 18. 생주와 멸균주로 나눠 제조되며, 이를 증류해 만든 43도짜리 불()소곡주도 있다. 가격은 대형마트 기준으로 700ml 한 병에 16000원에서 18000원 수준이다.

마트에서 한 병에 1만원 중반대에 구입할 수 있다. 착한 가격이다. 비싸다고 생각되면 와인 가격을 생각해보라. (사진: 不편집장)
마트에서 한 병에 1만원 중반대에 구입할 수 있다. 착한 가격이다. 비싸다고 생각되면 와인 가격을 생각해보라. (사진: 不편집장)

주변인들()의 무한한 관심 속에 날로 인기를 더해가는 <전통주 다이제스트> 그 두 번째 오프라인 모임에는 총 4명이 참여했다.

WHEN: 미세먼지가 극심한 4월 어느 날 어스름이 지는 저녁

WHERE: 서울 을지로 일대

DISHES: 특양·대창구이, 육전, 고추전

MEMBERS: 덕소 고해성사(37·사제), 부천 따르릉(35·이동통신사 매니저), 구로 취화선(33·미술가), 본 에디터(편집장)

짙은 풀색 병에 담긴 옅은 황금빛 액체, 라고 표현하고 싶지만 실은 여러분들이 흔히 알고 있는 정종의 빛깔이라고 보면 된다. 향 역시 여느 발효주가 그렇듯 강렬하다. 하지만 색감과 향 모두 일관되게 차분한 느낌이 있다. 영어 표현으로 클래식, 베이직 등의 형용사가 떠오른다고 하면 이해가 쉬우려나.

일단 한 잔 들이켜고 음미해 본다.

이날의 멤버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취화선, 고해성사, 不편집장, 따르릉. (사진: 不편집장)
이날의 멤버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취화선, 고해성사, 不편집장, 따르릉. (사진: 不편집장)

따르릉: 생각보다 술 느낌이 나지 않는데? 달짝지근하면서도 얌전한 듯.

편집장: . 지난주에 마신 두견주만큼 달긴 한데, 밀도가 조금 떨어지는 것 같음.

취화선: , 그 있는데. 분명히 알던 맛인데(머리 감싸쥠)

고해성사: (빛의 속도로 성호를 그은 뒤) , 역시 별 특징 없이 맛있네.

편집장: ? 아는 술임?

고해성사: 실토하자면 난 이 술 익숙해. 우리 동네 술이거든. 근데 어릴 때 집에서 먹던 맛하고 약간 다른 듯.

편집장: 어떻게?

고해성사: 이게 옛날에는 집집마다 다 담그는 술이라서 제조법이 조금씩 달라. 지금 마신 게 오리지널에 가까운 것 같긴 하다.

 

술의 첫 느낌은 나쁘지 않다는 데 모두들 동의. 그런데 그 다음이 없다. 무어라 표현이 이어질 만도 한데 다들 말을 머뭇거린다.

 

따르릉: . 근데 이 술이 말야, 기승전결에서 전결이 없네. ‘기승에서 끝나버리는 느낌이야. 야구로 치면 주자가 살아 나갔는데 클러치가 안 되는 듯한. 잔루 만루!

편집장: 뒷심 부족? LG트윈스 같은 느낌을 말하는 건가.(25년 트윈스 팬)

일동: (끄덕)

따르릉: 전결중에서도 특히 이 없는 듯. 매조지가 안 된다고 해야 하나. 분명 첫 맛은 나쁘지 않은데 자꾸 부족하다는 느낌이 가시질 않는 건지.

취화선: ! 생각났다! 식혜에 소주 탄 맛!

편집장: 에이, 그건 좀 아니지. 그래도 명색이 뼈대 있는 전통주인데.

취화선: 딱 그 맛이라니까. 분명히 시골 할머니댁에서...

편집장: 할머니가 식혜에 소주 타 드셔?

취화선: 아니 시골에서 먹어본 것 같다는 이야기지.

편집장: 이상하네. 옛날 조선시대에 과거 보러 가던 선비가 주막에서 소곡주에 가는 바람에 시험날을 놓쳤다는 이야기까지 있는데... 그렇게 별론가?

따르릉: 거듭 말하지만 아쉬움이 있다는 거지. ‘전결이 없어 아쉬움을 금치 못한 나머지 계속 마셔대다가 그랬다면 말이 될 것 같기도.

편집장: 또 그놈의 전결타령ㅋㅋㅋ

언제나 남의 창자는 맛이 좋은 법. 특히 이 집의 그것은 더더욱. (사진: 不편집장)
언제나 남의 창자는 맛이 좋은 법. 특히 이 집의 그것은 더더욱. (사진: 不편집장)

신나게 떠드는 사이 불판에 올려진 특양과 대창이 고소한 냄새를 풍겨온다. 알맞게 익었다는 알람이 울리는 것만 같다.

 

고해성사: 의외로 안주가 어울리네. 술도 고소하고 안주도 고소하고. 근데 뭔가 서로 다른 고소함이야.

취화선: 강용석?ㅎㅎ

편집장: 에이, 진짜.

따르릉: 원래 이 집 내장이 맛있어서 술이 버프를 받는 것 같기도 함.

취화선: (밑반찬으로 나온 보쌈김치를 한 입 먹더니) 찾았다! 이거다 이거ㅋㅋ

고해성사: ?

취화선: 이 김치가 딱 어울리네. 매콤하면서 젓갈의 비릿한 맛이 빈틈을 딱 채워주는데?

따르릉: (덩달아 한 입 가져가더니) , 맞네 맞아. 이거였어.

편집장: , 그럼 2차는 뭘로 하지? 보쌈?

고해성사: 아니 그보단, 홍어를 먹으러 가자. 이건 묵은지랑 잘 맞을 것 같네.

 

그렇게 옮긴 2차는 홍어와 각종 전을 파는 노포. 그런데 아뿔싸. 홍어만 없다. 괜히 먼 길 걸어왔다. 하지만 이것도 운명이려니 받아들이고(사실은 다른 곳 찾기 귀찮아서) 칼칼한 맛이 기대되는 고추전을 주문해본다.

 

편집장: 술기운도 슬슬 오르는데, 좀 뭔가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해보는 건 어때.

따르릉: . 18도의 도수 치고는 역치값이 굉장히 높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비슷한 도수의 소주는 그게 굉장히 낮잖아. 한잔만 마셔도 쓴맛이 밀려오는.

고해성사: 전통주 입문자용 술. 딱 그 정도. 밀도가 높진 않지만 그래도 입에 달라붙는 맛이 있고, 곡주의 풍미 역시 적당한 수준. 세대 불문 무난하게 즐길 정도의 맛이랄까.

취화선: 나도 느낌은 비슷. 첫 맛이 끝까지 계속 가는 듯. 드라마틱한 변주 같은 건 없고. 오히려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질척이는 느낌?

꿩 대신 닭. 홍어 대신 左 고추전, 右 육전. (사진: 不편집장)
꿩 대신 닭. 홍어 대신 左 고추전, 右 육전. (사진: 不편집장)

어느덧 두 병을 모두 비웠다. 무난하지 않은 멤버들이 무난한 술과 무난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술자리의 분위기가 이런 식으로 술에 좌우될 수도 있다니.

 

편집장: 이제 막잔인데, 최후의 총평을 부탁드림.

취화선: 이제 보니 냄새가... 막걸리 트림냄새 같기도.

편집장: 넌 좀 빨리 집에 가라.

따르릉: 입문이라고 생각하면 전반적으론 만족스러움. 그렇지만 확실히 전결... 아 정말 끝까지 이 아쉬움을 표현할 방법이 없네.

고해성사: 그래도 실로 오랜만에 고향의 술을 접하니 감상에 빠져드네. 어디선가 푸근한 노랫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고...

편집장: 님 뒤에 TV 달려있어.

고해성사 : .
 

필자소개
이창희

부(不)편집장입니다. 편집을 맡지 않았고 편집증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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