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성
모래성
2018.04.19 11:24 by 모자

 

사는 건 어쩌면 손바닥 위에 모래성을 쌓는 것 같아요. 한번 쌓기 시작하면 웬만해선 중간에 그만둘 수 없잖아요. 조금만 나태해져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서 성벽이나 기둥이 금세 허물어져버리고. 살짝만 흔들려도 와르르 무너지고.

그러면 모래성을 쌓을 때 물을 조금 섞어 보는 건 어때.

저도 나름대로 이런저런 고민을 해봤죠. 반죽에 물도 넣어 보고 설탕이 잔뜩 들어간 음료도 섞어 봤어요. 그러다 도저히 안 돼서 술도 섞어 봤죠. 그런데 술 냄새 때문에 종일 머리만 아팠어요. 뭐, 덕분에 잠은 잘 오더라고요. 혹시 아저씨는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아 본 적 있어요?

응. 모래성이라기보다는 두꺼비집에 가까웠지만.

그래요, 그거. 하여튼 두꺼비집이든 모래성이든 바닷가에서 모래로 뭔가를 만들잖아요? 주변에 젖은 모래를 긁어다가 언덕 비슷한 거라도 만들라치면 여기저기 쩍쩍 갈라져요. 입구라도 만들까 해서 살금살금 구멍을 뚫다 보면 또 어느 순간 천장이 주저앉아버리고.

버팀목이 없어서 그런 거 같은데. 나무젓가락이나 막대로 지지대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에이, 그거야 저도 알죠. 그렇지만 적당한 크기의 막대 구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요. 운 좋게 해변에 밀려온 나뭇가지나 주울 수 있으면 다행이지. 누가 모래성 만들기 도구를 파는 것도 아니고. 설령 그런 게 있다고 해도 생판 처음 보는 물건을 뭘 믿고 사겠어요. 더군다나 써 본 적도 없는 물건인데.

보통은 안에 설명서가 동봉되어 있지 않아?

설명서야 들어 있겠죠. 팔아먹어야 하니까. 근데 설명서라는 게 원래 설명이 제대로 되어있는 경우가 별로 없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 설명을 해줘야 하는데 지들은 다 안다고 전문용어로 써 놓는다든가, 아니면 대충 넘어간다든가. 아저씨도 학교 다닐 때 수학의 정석 책을 본 적 있죠? 저는 그 책을 아무리 봐도 이해가 잘 안 되더라고요. 설명이 무진장 쓰여 있기는 한데 도통 뭔 말인지. 어쩌면 수학이 나랑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일찌감치 수학은 때려치웠어요. 덕분에 대학교도 못 갔지만.

대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괜찮아. 나도 대학 안 다녔는 걸.

저도 그래서 대학 안 갔어요. 남들 공부하는 동안 세상 공부도 하고 경험도 쌓고 하다 보면 대학물 먹은 친구들이랑 비슷하게 살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가끔은 시간만 허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재수를 해서라도 대학은 나올 걸. 그러면 평범하게 살았을 텐데. 뭐 그런 아쉬움도 있고요.

너는 지금도 충분히 평범해 보이는데.

겉으로 보기에만 평범하죠.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뭐, 그렇다고 가까이서 본다고 비극적으로 살고 있는 건 또 아니지만. 비극이라니까 생각났는데 학창 시절 심하게 따돌림을 당한 적이 있어요.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저를 괴롭히던 애 이름이 기억나요.

많이 힘들었니.

그거야 당연하죠. 학교에 있는 모든 시간이 억울하고 괴로웠어요. 따돌림을 당할 만큼 뭔가 크게 잘못한 일이 없었거든요. 학교에선 종일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틀어박혀 컴퓨터만 했어요. 밤마다 내일이 오지 않길 바랐어요. 눈을 뜨면 아예 없었던 일이 되거나, 알지 못하는 시대에 알지 못하는 곳에서 다시 태어나거나,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만큼 힘이 세지거나, 갑작스레 이사를 가거나, 차라리 영원히 눈을 뜨지 않았으면. 그런 상상들을 하면서. 사람들이 저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여기길 바라기도 했어요. 사실은 저를 괴롭히는 애보다 옆에서 방관하던 아이들의 시선이 더 무서웠거든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심장 뛰는 게 느껴져요. 눈을 감고 안 좋은 생각만 하느라 잠도 못 자고 밤새 뒤척였죠. 내일이 걱정되고 불안하니까요.

같은 반 친구들 말이야?

네. 눈을 마주치는 순간 고개를 돌려버리거나 경멸하는 표정을 짓기도 하고. 철저하게 방관자의 입장으로 저를 봐요. 내가 뭘? 사실은 네가 괴롭힘을 당할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 아냐? 괜히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들어서 피곤해지기 싫어. 너도 알잖아, 나는 죄가 없어. 내가 괴롭힌 것도 아니잖아. 같은 얼굴로. 딱 한 명이라도 친구를 괴롭히지 마, 하고 나서 주면 좋겠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어요.

그런 건 생각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니까 쉽게 나서긴 어렵지. 그 아이들도 그땐 너만큼 어렸잖니. 아마 걔네도 무서웠을 거야. 자기도 같이 괴롭힘을 당할까봐.

알아요. 그런데 당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간절하거든요. 혼자서는 어떻게 해도 해결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아, 맞다.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전문가라는 사람이 나와서는, 따돌림을 당하는 이유에는 본인 잘못도 있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러니 친구들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하던가. 정말 웃기는 말 아니에요? 따돌림 당하기 싫으면 이유를 만들지 말라니. 마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면 괴롭힘 당하는 게 당연하다는 말 같잖아요. 어떤 경우에도 따돌림은 잘못인 건데.

어떤 이유든 남을 괴롭히는 건 옳지 않지.

여하튼 따돌림 당하는 일상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저만 빼고 서로 친한 척 하는 모습들이 역겨워져요. 뻔히 나쁜 짓인 줄 알면서 애써 모른 척 하고. 자기는 가담하지 않았으니 착한 사람이라고 위안하고. 자기한테 불똥이 튈까 봐 위선이나 떨고.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인간 혐오라고 해야 되나, 그런 게 생겼어요. 누군가를 만나는 게 싫어졌죠. 분명 저 사람도 가면을 쓰고 있을 거야. 누군가의 불행을 모른 척 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나쁜 짓에 가담했거나 주동자일지도 모르지. 하는 생각으로 눈치를 보다가 조금만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멀리하고.

나쁜 경험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모든 사람이 나쁜 건 아니야.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많아.

그렇겠죠.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나쁜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닐 거라는 정도는 알아요.

그렇지.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고...

아참, 저를 괴롭히던 애 이름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했잖아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어요. 이제는 성인이라 괴로웠던 과거가 또다시 반복될 리 없을 텐데, 왜 저는 자꾸만 그 애의 이름이 생각날까요? 왜 세상은 피해자가 가해자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고, 가해자는 한때의 추억인 듯 잊고 살 수 있는 걸까요. 어째서 괴롭힘 당한 사람이 그 사실을 부끄러운 과거라는 듯이 숨겨야 하는 걸까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 걸. 하지만 네가 비밀을 알려 줬으니 나도 비밀을 하나 알려 줄게. 실은 나도 아직 몇 개의 이름을 기억하며 살아. 그리고 살다 보면 기억해야 할 이름이 더 많아지기도 할 거야.

살다 보면요?

그래. 살다 보면. 네 말대로 삶이 손바닥에 모래성을 쌓는 일이라면 나는 몇 번인가 모래성을 털어버리고 싶은 적이 있었어. 더 이상 아무것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데 아무리 해도 손바닥의 모래를 다 털어낼 수가 없더라. 한번 모래를 움켜쥐어서 더러워진 손은 다시 깨끗했을 때로 돌아갈 수 없잖니. 전부 훌훌 털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작은 모래알이 손금을 따라 이어지기도 하고 손톱 밑으로 까맣게 파고들어가기도 하고. 결국 손바닥에 올려놨던 모래만 잃고 말았어. 가끔 그때를 후회해. 어쩌면 네게도, 그리고 내게도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까요?

아니. 조금씩 무뎌질 뿐 시간이 지나도 아팠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아. 내성이 생긴다는 말도 거짓말이야. 나이를 많이 먹어도 나쁜 일을 겪게 되면 똑같이 아프고 괴로워. 때로는 흉터가 덧나서 더 아프기도 하고. 그런 건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거야. 다만 잊어버린 척 하고 사는 거지.

왜요?

모래성을 털어버릴 수는 없으니까. 낫지 않는 아픔을 품고 산다는 건 괴로운 일이잖니. 언젠가 나을 거라는 희망이 없는 고통은 차라리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니까. 잊어버렸어. 다 나았어. 되뇌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거지. 이제 전부 괜찮아졌다는 식으로 말이야.

그런데, 아저씨.

응.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억울한 마음이 들어요. 왜 하필이면 제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왜 그들은 저를 미워했을까요? 저를 미워하는 동안 그들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러게. 왜 네가 미움을 받았을까.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니.

네. 불공평해요.

세상은 원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불공평한 것 같아. 그래서 누구나 한 번씩은 억울하고 한 번쯤은 모른 척 하면서 살아야 해. 단순히 친구들과 사과를 하나씩 나눠 먹을 때도 그렇잖아. 운이 좋으면 큰 사과를 먹겠지만 대신 누군가는 작은 사과를 먹어야만 해. 한입 베어 물었는데 떫은 사과일 수도 있고 말이야. 너는 크고 맛있는 사과를 골라 본 적이 있니?

잘 모르겠어요. 저는 이제껏 운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아요. 살면서 제가 받은 사과는 대부분 시거나 떫었어요. 그러고 보면 크고 맛있는 사과를 먹는 친구들과 저를 계속 비교하면서 살았던 거 같아요.

나도 그래.

그게 뭐예요.

글쎄. 정말 뭘까. 사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그치?

아저씨는 어딘가 조금 모자란 사람 같아요. 어른이면서 열다섯 살은 어려보이는 저랑 이런 대화나 하고.

아직 어른이 아니라서 그런가 보지.

원래 어른들은 자기보다 어린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잖아요. 텔레비전에 나왔던 사람이 했던 말처럼, 따돌림을 당하는 건 네 잘못이야. 그러니까 잘못을 고치렴. 하고 훈계나 하지. 자기 말이 다 옳은 것도 아니면서. 근데 아저씨는 왜 그러지 않아요?

그냥. 그냥 나도 네 나이 때는 누군가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편 들어주길 바랐거든.

그리고 단순히 안 좋은 기억으로 치부하기에는 너의 슬픔이 길잖니. 힘든 일을 겪은 네게 필요한 건 가르침이 아니라 관심이라는 걸 알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랬으니까.

아저씨도 살면서 힘든 일이 많았나요?

응. 나도 남들이 그랬던 만큼 공평하게 힘들었지. 예전에는 꽤 오랜 시간을 불평불만 가득한 얼굴로 아무나 들이받으면서 지냈어. 투덜거리느라 헛되이 보낸 시간도 많았고.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으니까.

그러면 지금은 달라졌나요? 힘든 시기가 지나면 저도 달라질까요?

음… 아마 너는 앞으로도 잊고 싶은 것들을 잊지 못할 거고 몇 개의 이름을 더 기억하며 살게 될 거야. 가끔은 손바닥 위에 쌓아올린 모래성을 보다가 울게 될 거야. 손 틈으로 새어나가는 모래를 보는 건 우울한 일이거든.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면 너는 지금보다 아주 조금은 나아질 거야.

저는 이제껏 앞으로 나아질 거라는 기대 없이 살았어요. 많이 힘든 일을 겪었고, 그 일 이후로 여전히 이불을 덮으면 표정 없는 시선들이 떠오르거든요. 저도 언젠가는 남들처럼 잊히지 않는 것들을 잊은 듯이 살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너는 분명 그렇게 될 거야.

정말요?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건, 너와 내가 여태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래서 알아.

 

 

*원문 출처: 모자 지음, 『숨』, 첫눈출판사, 2018.

 

필자소개
모자

세상을 마음으로 관찰하는 작가. 필명 모자의 의미는 작가의 말로 대신한다. ‘모자를 좋아합니다. 모자라서 그런가 봅니다.’ 지은 책으로는 『방구석 라디오』와 『숨』이 있다. 섬세한 관찰력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꾸밈없이 담백하게 쓴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평범하게만 느꼈던 일상이 특별하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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