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풋했던 그 시절 정취를 간직한 BAR, 실크로드
풋풋했던 그 시절 정취를 간직한 BAR, 실크로드
2018.04.27 13:35 by 전호현

 

군대와 휴학까지, 꽤 오랜 시간 학교를 떠나있던 나는 복학 후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된 자취인생이라 새로울 것도 없었지만 정문 바로 앞에 터를 잡는 바람에 과 동기와 선배들의 집중 타깃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던 때였다. 예상대로 수많은 침공의 위험이 있었으나 꽤나 까칠했던 성격과 주변 술집을 적절히 이용해 나의 안식처를 방어해내곤 했다. 이번에 얘기할 LP바는 바로, 학교 정문과 자취방 사이에 자리 잡고 있던 술집이자 방어기지(?)였던 ‘실크로드’라는 곳이다.

 

입구 주변을 채우고 있는 LP들

‘실크로드’, 비단길이라니.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지나쳤던 이름인데 다시 보니 참 매력 넘친다. 독특한 구조와 아담한 분위기, 그리고 소형냉장고 안에 가득 들어있는 맥주 덕에 소주로 점철되어 있던 캠퍼스라이프와는 큰 이질감을 선사했던 이곳. 당시 OB가 맛있네, 카스가 맛있네라는 어처구니없는 논쟁으로 밤을 지새우던 이곳은 사실 정식 LP BAR는 아니다. 그저 구석에 놓인 전축에서 하염없이 김광석 노래가 흘러나오던 곳. 지금 생각해 보면 서른도 안 된 코흘리개들이 뭐가 그렇게 인생이 힘들고 진지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학생에게는 고가였던 병맥주와 함께 광석이 형 노래를 주구장창 듣던 이곳은 학교 앞을 떠나기 전까지 고뇌하던 코흘리개를 위로해 주던 낭만의 장소였다.

 

칵테일 잔들로 채워진 오픈 BAR

 

전 축

전기축음기의 약자. 일반적으로 턴테이블과 앰프 스피커를 기반으로 CD, 테이프가 추가되어 전부 재생할 수 있는 하이파이 시스템. 아버지가 어머니의 등짝 스매싱과 함께 처음 들여놓은 제품도 이런 기기였다.

 

이 가게는 1985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손만 잡아도 눈치 보이던 시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쉬쉬하며 숨겨진 공간을 만든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전체적으로 아담한 구조로 그 당시 유행하던 빨간 벽돌 사이에 두 명이 옴짝달싹 못 하게 앉을 몇 개의 자리가 있고, 정중앙엔 여섯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마련돼 있다. 대학생의 내 모습을 기억하는 사장님이 여전히 운영하는 이곳은 황량하던 학교 앞을 유일하게 밝히던 핫 플레이스였다. 마셔라 부어라의 술자리가 아닌 맥주 두 세잔 기울이며 자리마다 꽂힌 좋은 책들을 펼쳐볼 수 있었던 소중한 공간.

 

두 명씩 쏙 들어가는 자리들

지난번에 이어 턴테이블의 구조 중 카트리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톤암의 끝에 자리한 카트리지는 바늘만 따로 교체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통째로 교체한다. 카트리지(phono cartridge)는 바늘의 움직임을 전기신호로 바꾸어 주는 장치이다. 대개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바늘은 캔티레버(cantilever)라고 부르는 금속제 파이프의 끝에 붙어 있으며 캔티레버의 다른 끝에는 자석이나 코일이 붙어 있다. 자석이 연결된 것을 MM(Moving Magnet)형 카트리지라고 하고 코일이 연결된 것을 MC(Moving Coil)형 카트리지라고 한다. 이외에 철심으로 된 것도 있고 MM형과 MC형도 세분화 되지만 그것까지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최근에는 두 방식 모두 기술의 발전으로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스피커는 JBL L56과 어쿠스틱 리서치 AR-11로 구성 음원에 따라 나눠 재생된다. 소형크기의 입문용 스피커이며 여타 JBL 북쉘터 스피커들이 그렇듯이 적당한 밸런스가 강점이고 AR-11은 앞의 L56과 마찬가지로 저음영역대가 탄탄한 1970년대 후반의 스피커다. 전문적인 LP BAR는 아닌지라 볼륨을 낮춰서 틀어주기 때문에 옆 사람과의 대화 중 기분 좋은 배경음악이 깔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요새 보기 힘든 일체형 에어컨. 가동은 안 한다.

과 동기와 오랜만에 들린 실크로드는 우리 때와 다르게 많이 젊어(?)져 있었다. 구조는 그대로였지만 아저씨들이 많이 보이던 자리들은 젊은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고(내가 늙어서 어려 보이는가?) 가볍게 칵테일을 즐기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사장님도 젊은 사람들만 대하다 보니 나이가 드는 것 같지 않다며 웃었다.) 짧게 마시고 가는 대세 속에서도 여전히 죽치고 앉아있는 건 우리뿐. 그래도 가려진 자리라 눈치 보일 일은 없어서 좋았다.

친구와 나는 마감시간까지 남아 학교 다니던 때의 기억과 근래의 먹먹한 일상을 나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나름대로 힘들었고 고민했고 방황했던 그 어린 날의 고민들은 사라져갔지만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 같던 그때의 생각과는 다르게 고민은 점점 많아지고 힘든 일은 늘어만 간다. 어느새 방황은 멈췄지만 무미건조하다고 투덜거리는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 배경 음악 사이로 광석이 형이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하긴 앞으로도 고민은 끊임없이 늘어만 갈 테니.

 

대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중앙 테이블

덧- 혹 들리게 되면 슬라이스 감자튀김이 되는지 여쭤볼 것.

일 년에 몇 안 되는 운수 좋은 날이라면 두 번 먹을 것.

 

 

실크로드

FOR 대학의 추억을 기억하고 싶으신 분들.
BAD 5명 이상 무리. 고성방가도 무리.

 

 

필자소개
전호현

건설쟁이. 앨범 공연 사진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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