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맛있는 빵 줬었지? 맞지?”
변기 수리공 아저씨가 웃었습니다.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 네, 아저씨. 우리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이였군요. 주인집 사장님이 꼼꼼하게 절약을 하신 고로, 우리 집 변기통이 조금 아담해요. 일 년에 3번이나 막힌 게 제 탓은 아니란 소리죠.
그와 처음 한집에 살기 시작한 재작년, 첫눈 오던 날이 아저씨와의 첫 조우였지요.
“첫눈이 오면 크레페를 구워야지.”
남편은 노래를 부르고, 바닐라 에센스 향기가 집안을 따스하게 채우고, 창밖엔 새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그리곤 변기가 막혔습니다. 옷걸이와 ‘뚜러뻥’으로 시도해 보다 낙담한 나머지 ‘변기뚫어’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저씨이이이! 퇴근 안 하셨죠? 제발 제발 와 주세요!”
“응. 돈 주면야 어디든 가지!”
우리 집 문을 연 지 정확히 10초 만에 뻥! 마포구에 유독 변비 환자들이 많은지 뚫어야 할 집이 많아 점심도 못 챙기셨다는 아저씨. 크레페 2개를 10초 만에 꿀꺽하십니다.
“앉아서는 못 먹어. 한 집 당 오만원이야. 앉아서는 못 먹지.”
‘앉아서 밥 먹는 자, 돈을 못 모은다’는 러시아 속담(믿거나 말거나)이 귓가를 때리는 순간, 아저씨와 남편의 시간 개념이 명징하게 대조된다는 걸 느낍니다.
“변기를 큰 거로 바꿔야겠어. 그럼 집주인만 이득인가?”라며 머리 터지게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 남편은 흐뭇한 표정으로 “크레페는 모기향만큼 약한 불에 살며시 구워야 얇고 예쁘고 식감은 가벼워진다”고 느긋느긋 설명합니다. 물론 물어본 적 없고요. 심리적 안정을 꾀하고자 곳곳에 켜둔 꽃내음 향초, 그 향기 사이로 프라이팬 앞에 고요히 서 있던 남편의 수도승 같던 뒷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뒤이어 말했어요. 마치 고승의 가르침을 들려주는 것처럼.
“지금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요. 걱정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런데 왜 걱정하지요?”
| 프랑스에서 “이제 갈까?”는 “디저트 주문할까?”란 의미
세계에서 제일 서두르는 사람들의 나라는 어디일까요? 대번에 ‘대한민국!’하는 건 자존심이 상해서 머리를 굴려 봐도 다른 나라가 떠오르지 않아요. 반면 ‘프랑스+느리다’를 검색해 보세요. 느린 행정, 느린 인터넷 속도, 느린 택배에 당황한 한국 유학생들의 포스팅이 나옵니다. 두 나라가 정말, 정말 다르거든요.
“아직 먹고 있는데... 자꾸 친구들이 사라져요...”
시간 개념이 극단적으로 다른 나라에서 나고 자란 개인이 한 팀으로 속도를 조율하는 게 쉬우면 이상하죠. 일단은, 남편이 한국에서 ‘빨리빨리’를 학습 중입니다. 홈파티를 하던 밤. “늦었네. 빨리 가자!” 하자마자 순식간에 집이 텅 비었을 때, 에스프레소를 더 뽑으러 주방에 갔던 남편의 그 황망한 표정을 잊을 수 없네요.
프랑스 시댁 새해 파티에 갔을 때 가족 친지와 굿바이로 비쥬를 할 때 1시간 넘게 걸렸던 게 떠오르네요. 이런 순서입니다.
1. 나란히 섭니다.
2. 내 차례가 오면 마치 10년 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오!’ 하고 반가움을 표현해요.
3. 양 볼을 2-3번 번갈아 맞대며 허공에 ‘쪽’ 소리를 내요.
4. ‘1월 1일로 넘어갈 때의 종소리를 너와 들어서 뜻깊었고, 내년에도 새해를 함께 보내길 기원하며, 어제 네가 만든 김밥과 불고기가 정말 맛있었으며, 너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귀중한 사람이고, 한국에 가서도 이 아름다웠던 시간을 반드시 기억하기를 바라’ 등의 덕담을 들어요. 이에 답해서 나도 덕담을 해요.(지면상 생략)
5. 1-4를 모든 사람과 성심성의껏 반복합니다.
* ‘복사-붙여넣기’ 하듯 덕담이 다 똑같으면 재미없음. 상대에 따라 각각 다르게 하는 게 옳아요.
굿바이 비쥬 때마다 우리는 제 친척들과의 헤어짐을 떠올렸어요. 달리는 택시 안으로 만원 몇 장 던져 넣으며, 약간 성을 내듯이 소리치는 게 포인트.
“이게 뭐야! 아유... 네가 돈이 어딨어!” (속뜻을 읽어야 함. 돈 없다고 무시하는 게 아님)
“됐어! 됐어! 아저씨, 빨리 가 주세요!” (오늘 처음 본 기사님이지만... 기사님도 그러려니 하심)
액션물 같지 않나요? 스릴 넘치죠. 운 나쁘면 지폐가 도로에 풀풀 날리기도 하고요. 그럼 내려서 줍는 민망한 상황도 생깁니다. 싸우듯, 좀 후려치듯 말하지만 이게 우리식 덕담이겠거니, 아름다운 헤어짐이겠거니 합니다. “너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란다” “너와 함께 명절을 보내서 진심으로 행복했어” 같은 말은 낯간지러워 못하지만, 서로에게 지폐를 뿌리는 이 참된 애정.
이렇게 찬찬히 보아야 알 수 있는, 은은히 정 깊은 어른들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한참 웃곤 합니다.
“양국 어른들 표현방식이 너무 다른 것 같아.”
“속마음은 다 똑같지. 사랑이잖아.”
| 천천히, 그러나 제대로 살기 위해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이 대도시의 속도는 사실 저에게도 조금 벅차요. 입버릇처럼 하는 ‘빨리빨리’도 어지러워요. 언어 습관이 문화를 말해주는 거니까요. 빨리빨리를 많이 들으면 덩달아 조급해져요. 짬뽕 배달시킬 때도 의례히 “빨리 갖다 주세요.” 짬뽕 너무 뜨거운데 “식기 전에 빨리 먹어.” 기자 선배는 제게 원고 의뢰를 할 때 이렇게 말하곤 자신도 웃더군요. “천천히, 빨리 줘.”
프랑스 사람들은 ‘느리게’ 혹은 ‘천천히’란 의미를 담은 단어를 많이 씁니다. 저는 알라빠빠(a la papa: 천천히, 한가롭게)란 단어를 사랑해요. 알라빠빠, 알라빠빠. 눈 감고 외우면 서울의 속도를 외면할 수 있는 힘이 고이는 것 같아서요. ‘Lentement mais surement’란 말도 좋아해요. ‘렁뜨멍 메 쉬흐멍’ 정도의 발음이지만, 좀 어려워서 저는 ‘렌테멘테 수레멘테!’라고 멋대로 씁니다. ‘느리더라도 확실하게’란 뜻이래요. 마음이 조급할 때 스스로 다독이는 용도로도 쓴대요. 조금 느리더라도 이왕 할 때 제대로, 천천히 하면 다음에 수정하고 또 수정할 필요가 없잖아요? 남편의 함흥차사에 트럼프처럼 분노하게 될 때마다, 주문처럼 외웁니다. 렌테멘테 수레멘테!
두 개의 다른 세계가 만나 수없이 스스로를 부수며 결국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 결혼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의 국적이 다르다면, 그 과정이 더 다이내믹한 것이겠고요. 30년 넘게 몸에 밴 속도니까 서로가 얼추 비슷해지려면 30년은 더 걸리는 게 당연지사.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면, 어쩌면 제가 그보다 더 느리고 한가로워질까요? 뭐 어떻게든 되겠죠.
/사진: 김은성, 그림: 바티스트 튈리에
프랑스어 모르는 한국여자, 한국어 배우는 프랑스 남자 바티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나라 말로 부르건 들은 척 안하는 고양이 미코와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살고 있습니다. 국제부부의 생생한 삶을 담은 '다큐적 접근'적 에세이를 써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