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우울이 사랑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우울이 사랑이 될 수 있을까
2018.05.10 18:55 by 모자

 

사랑을 모르는 시절에는 사랑의 형태를 그릴 수 없었다. 막연히 떠올리는 것은 대부분 사랑이 아니었다. 나는 경험하지 못한 감정을 추측하여 느낄 만큼 섬세하지 못했다. 드라마 혹은 영화 주인공에게서 느껴지는 아릿한 감정 일부를 다만 사랑일 것이라 단정 지었을 뿐이다. 한없이 우울해지거나 가련하게 느껴지는 사람을 만나 잠시라도 사랑한다면 평생 기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시절에는 연민 같은 걸 사랑이라 여겼다.

십여 년 전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아빠가 짐을 싸들고 다른 여자의 집으로 떠나버린 후 그녀의 엄마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셨고 분을 풀었다. 네 년 때문에. 네깟 년 때문에. 하면서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뜯다가 퍼뜩 정신이 돌아오면, 내가 미안해. 엄마가 정말 미안해. 너를 보면 자꾸 네 아빠가 떠올라서 그래. 네가 엄마보다 아빠를 더 많이 닮아서 그래. 하고 울었다. 거울 속의 그녀는 아무래도 아빠보다는 엄마를 더 닮은 것 같았지만 그 사실을 엄마에게 납득시킬 수 없었다. 엄마는 그녀와 아빠를 두고 틀린 그림 찾기를 하는 사람처럼, 그녀의 얼굴에 줄곧 빨갛고 파란 동그라미를 그렸다. 비가 오는 날보다 머리채를 뜯기는 날이 더 많아서 그녀는 내내 엄마를 따라 울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 하필이면 비가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그녀는 집을 나왔다. 아빠가 떠나며 반쯤 비어버린 집에서 가지고 나올 물건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녀는 캐리어 하나를 가득 채우지 못하고 버려지듯 집을 나섰다.

 

아빠는 간신히 살 수 있을 정도의 돈만 매달 부쳐 주었다. 가난해진 그녀는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고시원에 머물렀다. 창이 없어 해가 들지 않는 공간이었다. 세 평 남짓한 고시원에서 그녀는 매일 밤 울었다. 복도를 지나는 발소리가 하도 크게 울려서, 밤이면 의자에 짐을 얹어 문 앞에 가져다 두었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시간을 기다려 샤워를 하고 밥을 먹었다. 밥을 먹을 때면 공동 주방의 문을 잠그고 삼키듯이 욱여넣었다. 달칵. 달칵. 누군가 문고리 돌리는 소리가 들리면 그녀는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입에 고인 밥알 때문에 자꾸만 침을 삼켜야 했다. 그녀는 지은 죄 없이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귀를 쫑긋 세우고 언제든 숨을 준비를 하면서.

그녀를 만나면 항상 근처 다방으로 향했다. 푹 파인 소파와 쿠션이 마음에 들어서 그녀는 잠이 들었다. 어젯밤에는 왜 잠들지 못했는지 묻지 않았다. 터무니없이 높게 쌓인 파르페가 녹아 잔을 타고 흘렀다. 그녀에게 닿지 않도록 테이블을 닦으며 노래를 들었다. 파르페 위에 올려진 과자를 갉아먹으면서, 파르페를 나눠 먹는 중인 게 맞는지 아닌지 생각해보느라 시간을 썼다. 햇빛을 받지 않은 그녀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투명하게 보였다. 손가락을 볼에 가져다대면 작은 짐승의 살처럼 보드라웠다. 햇빛이 그녀의 얼굴에 담기도록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하루가 충분했다. 그 시절에는.

전화를 하면 엄마는 자꾸만 미안하다고 말해. 그녀가 전화기 너머로 말했다. 그래, 그렇구나. 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는 말을 그녀는 자꾸만 전했다. 지금이라면 조금 유연하게 반응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봐도 별다른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 말이었다. 그래, 그렇구나. 너는 참으로 슬픈 역사를 가진 아이로구나. 네 부모는 너를 애증으로 대하는구나. 그래서 그렇게 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구나. 그녀에게 할 수 없는 말들을, 몰래 속으로만 되뇌었다. 그녀는 가끔만 말했고, 그때의 나는 짧은 대답을 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통화는 언제나 대화보다 침묵이 더 길었다.

고시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녀는 우울에 잠식되었다. 연락이 줄고 웃음 대신 침묵이 늘었다. 만나자는 연락에 기뻐하는 대신 작고 답답한 모니터 안으로 빠져들었다. 해가 들지 않는 공간에서, 그녀는 시들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점점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언제인가 그녀가 더 이상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그녀는 내게 지폐 한 장을 건네며 이별을 통보했다. 두 번을 접은 낡은 오천 원짜리 지폐였다. 이걸로 택시 타고 가.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고작 내가 이까짓 것밖에 안 되냐고 물을 재간이 없었다.

끝내 나는,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사랑을 배운 적이 없어서 나누는 방법조차 몰랐다. 그녀에게 동정 받을 정도로 내 마음이 더 가난했다는 걸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알았다면 조금은 더 오래 그녀를 만날 수 있었을까. 하고 몇 번인가 추억했을 뿐이다. 첫사랑이란 원래 그런 거라고 넘겨짚으며.

 

 

*원문 출처: 모자 지음, 『숨』, 첫눈출판사, 2018.

 

필자소개
모자

세상을 마음으로 관찰하는 작가. 필명 모자의 의미는 작가의 말로 대신한다. ‘모자를 좋아합니다. 모자라서 그런가 봅니다.’ 지은 책으로는 『방구석 라디오』와 『숨』이 있다. 섬세한 관찰력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꾸밈없이 담백하게 쓴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평범하게만 느꼈던 일상이 특별하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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