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자식, 더 이상 안 키우렵니다.
장애인 자식, 더 이상 안 키우렵니다.
2018.07.17 14:42 by 류승연

 

결론부터 말하면 오늘이 ‘동네바보형’ 시리즈의 사실상 마지막 이야기다. 100화까지 연재를 하고 마무리 짓겠다는 개인적인 소망이 있었으나 안팎의 여러 요인에 의해 그 소망을 이루기는 어렵게 됐다.

마지막 화는 모두에게 쓰는 편지로 매듭을 지을 예정인지라 오늘 나는 그동안 아들을 키우면서 보고 듣고 겪고 느끼게 된 것, 그로 인해 변화된 내 생각을 얘기하려 한다. 자, 그럼 시작한다. ‘동네바보형’의 사실상 마지막 이야기.

김동환, 나이는 열 살. 장애등급은 지적장애 2급. 쌍둥이 누나보다 한 시간 늦게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잠깐 죽었다가 살아난 아이. 그 날부터 시작된 고군분투 나의 육아기.

힘들었다. 사실 지금도 가끔은 힘들고, 앞으로도 종종 힘들 것이다. 원래 육아란 것은 오죽하면 ‘육아전쟁’이란 말이 붙을까 싶을 정도로 힘든 것이다. 하지만 장애 아이를 키운다는 건 이전까지 듣도 보도 못한 고통을 고스란히 버텨내야 하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렇게 살아오기를 10년. 요즘 난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더 이상 장애가 있는 아들을 키우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응? 설마 이제 와서 아들을 시설에 맡기기라도 하겠다고?

오우 노노. 그게 아니다. 다시 말한다. 이제 나는 아들을 키우지 않을 것이다. 대신 아들과 함께 살아나갈 것이다. 얼핏 말장난으로 들릴 수도 있는 얘기지만, 아들을 키운다는 것과 함께 살아나간다는 것은 그 출발점이 엄연히 달랐다.

그동안 내가 왜 힘들었던가 하고 살펴봤다. 그랬더니 모든 건 장애인 자식을 낳은 ‘죄인’인 엄마가 스스로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자식을 잘 키우려 발버둥 쳤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자식을 잘 키워야 하는 엄마는 자신의 행복 따위는 외면한 채 자식의 치료에 올인했다.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기능 향상을 위해 치료에만 올인했을 때 과연 장애인 자식이 행복해지느냐. 치료와 행복은 별개라는 게 문제였다.

이쯤에서 소개한다. ICF. ICF는 WHO에서 권장하는 국제기능·장애·건강분류로,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Functioning, Disability and Health의 약자다.

나는 시소감각통합연구소의 지석연 소장님에게 ICF 강의를 받은 후 머릿속을 맴맴 돌던 생각들이 하나로 정리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ICF의 자세한 강의를 듣고픈 분들은 지 소장님에게 따로 연락을 하면 되고, 나는 지금 여기서 내가 이해한 만큼만 설명하고 가고자 한다.

아들은 장애 진단을 받을 때 몇십 개의 설문항목(어쩌면 100개가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는데 기억이 잘 안 남)에 엄마인 내가 답변을 하고, 심사하는 선생님이 직접 면접을 통해 아들의 각종 기능검사를 한 뒤 최종 평가를 받았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아들은 지적장애 2급의 장애인이 되었고, 가족 모두의 삶이 한동안 ‘장애’에 매몰돼 살게 되었다.

그런데 요 ICF란 건 참 묘하다. 분명 장애와 건강을 분류하기 위한 설문지인데 항목이 1400개가 넘는다. 그리고 그 항목엔 ‘신체 기능’ 외에 ‘활동’, ‘참여’, ‘환경’, ‘개인요인’이 비중 있게 포함돼 있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기존의 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아들은 ‘정상적이지 않은’ 장애인이다. 건강하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ICF에 따르면 장애는 신체구조와 신체기능에 관한 문제일 뿐, 그것으로 아들의 ‘건강’이 규정되지는 않는다. 아들의 활동과 참여, 환경, 개인 요인 등이 신체구조 및 기능과 결합되어 ‘김동환’이라는 한 사람의 건강을 규정한다고 본 것이다.

이게 당최 뭔 소리여?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걸 안다. 그래서 나를 통해 예시를 들어보겠다. 이제 나를 ICF에 따라 정의해본다. 맨 먼저 내 이름은 류승연이다. 신체 구조와 기능 면에서 보면 류승연은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다.

임신성당뇨가 그대로 당뇨가 된 케이스로, 오랜 시간 약을 복용했고 요즘엔 합병증 초기증상까지 보이는 중이다. 최근엔 거의 죽다가 살아날 만큼 몸이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다. 제일 슬픈 건 그러면서 단기간에 살이 확 쪄버렸다는 것이다. 이미 여름도 와버렸는데. 남편은 이러다 내가 먼저 떠나 버릴까봐 건강 좀 챙기라며 매일 잔소리 폭탄을 퍼붓고 있다.

의학적 시각에서 보면 류승연은 ‘정상적이지 않은’ 질병인.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류승연이라는 사람의 삶까지 건강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활동’을 보자. 나는 벌레잡기와 화장실청소를 제외한 거의 모든 활동을 능숙하게 잘 해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글을 쓰고 강연을 다니며(강연을 듣기도 하고, 하기도 한다) 바쁜 활동으로 매일을 보낸다.

‘참여’를 볼까? 나는 오래된 친구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아들 딸 친구의 엄마들과도 적정거리의 관계를 맺고 사회생활을 꾸려 나간다. 그러는 한편 누구 엄마가 아닌, 나 자신의 이름으로 만나는 사회적 관계의 사람들과도 교류를 통해 함께 하는 일에 참여하곤 한다.

‘환경’으로 가보자. 이런 내 활동이 가능한 이유는 아들을 돌봐주는 활동보조인이 하교 후부터 매일 오후 4~5시까지 아들을 책임져주고, 앞집에 사는 시어머니가 급할 땐 아이들 밥을 먹여주고, 마음껏 일하도록 응원해주는 남편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요인’을 들여다보면 이렇게 글 쓰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던 건 유독 ‘사람’에 관한 관심이 많았던 성향도 한 몫을 했고, 무엇이든 한 가지를 파고들면 끝장을 보는 성격도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이 모든 게 합쳐진 게 나 류승연이다. 분명 의학적 관점에서는 혈당화수치 7.5의 건강하지 못한 당뇨병 환자인데, 내가 가진 질병과는 별개로 내 삶은 당뇨에 얽매여 있지 않다. 아직 부족한 부분도 많지만 그래도 충분히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내 아들로 가 본다. 내 아들은 기존의 의학적 분류에 따르면 지적장애 2급의 장애인이다. 하지만 방금 전 우리는 ICF에 따른 새로운 시각을 배웠다. 지적장애 2급의 김동환. 과연 장애진단명을 받았다고 해서 아들의 삶까지, 인생까지 장애가 있는 것일까?

분명 ‘신체구조와 기능’에서 아들은 건강하지 못한 항목에 잔뜩 체크를 할 것이다. 뇌주름도 덜 쪼글쪼글하고 소근육 움직임도 능숙하지 않고 눈과 손의 협응도 잘 안 되고 등등.

과거의 내가 아들을 키우면서 힘들었던 건 이 때문이었다. 아들의 신체구조와 기능적인 면만 보고, 그러니까 ‘장애’만 보고 ‘장애’에만 매몰돼 아들을 키우려 하니 그토록 힘이 들었다. 아들의 ‘장애’를 곧 아들의 ‘삶’으로 규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애’는 아들 삶의 한 단면일 뿐이었다. ‘지적장애 2등급’이 김동환이라는 열 살 어린이의 인생을 모두 정의하는 건 아니었다. 내 아들의 인생은, 그의 삶은, 그의 활동과 참여와 환경과 개인요인 등이 모두 어우러져 하나의 큰 덩어리를 이뤄내는 것이었다.

시각을 넓혀야 했다. ‘장애’에서 ‘삶’으로. 나는 신체구조와 기능을 향상시키려 개별 치료에 몰두하는 것과는 별개로 아들의 사회적 참여와 활동, 환경과 개인요인 등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도 해야 했다. 그래야 아들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장애’에 방점이 찍혀 있을 땐, 그러니까 신체구조와 기능에만 매달려 있을 땐 아들을 잘 키워야 했다. 엄마인 나의 희생으로 아들을 잘 키우려다 보니 내가 힘들었다. 엄마가 힘드니 가족 모두가 힘들었다. 장애인 자식의 불안도도 높았고, 남편과 비장애인 딸은 소외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자식의 ‘장애’가 아닌 자식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하자 이젠 자식을 잘 키운다는 게 함정이었음을 깨닫는다. 내가 해야 했던 건 자식을 잘 키우는 게 아니었다. 자식과 함께 가족 모두가 건강한 삶을 살면 되는 거였다. 내가 가진 ‘당뇨’처럼, 아들에게 있는 ‘장애’는 관리하고 지원하면서 살아가면 되는 거였다.

중요한 얘기니까 한 번 더 반복한다. 키우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야 했던 것이다. 장애가 있는 자식과 더불어. 건강하고 행복하게. 건강한 삶을 규정짓는 건 질병이나 진단명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한 사람의 사회적 활동과 참여, 환경이 한 사람의 삶을 더 크게 규정했다.

내 아들은 장애인이기에 앞서 사람이다. 그것을 잊어선 안 되었던 것이다.

엄마가 ‘장애’라는 진단명에 매몰돼 있으면 장애인 자식의 사회적 활동과 참여, 환경 등에 정작 엄마가 ‘장벽’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자식의 장애를 드러내기가 무서워 엄마가 먼저 나서서 사회적 활동에서 배제시키는 일. 그런 경우를 말한다. 굳이 케이스별 사례를 들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가리라 믿는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이렇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사회적 참여를 시키기 위해 놀이터에만 다니고 치료실은 그만 다니라고?”. 아니다. 그런 얘기가 아니다. 분명 치료실에서 지원을 받아야 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엄마가 해줄 수 없는 전문적인 영역의 도움은 전문가들에게 받아야지.

치료실을 그만 다니자는 게 아니라, ‘장애’에만 매몰돼 자식을 장애인으로만 바라보는 걸 멈춰보자는 얘기다. 장애인이기 이전에 사람이고, 한 사람으로서 얼마나 ‘건강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 이쯤에서 한 번 체크해보자는 얘기다. 그토록 사랑하는 자식에게 ‘장애의 극복’이 아닌 ‘비록 장애가 있으나 건강한 삶’을 찾아주자는 얘기다. 이를 위해 장애인 자식을 잘 ‘키우려’ 애쓰지 말고, 엄마와 자식이 함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방법을 찾자는 얘기다.

장애인 자식 육아 10년. 이 세상에 발달장애인에 대해 알려야겠다고 마음먹고 글을 쓰기 시작한 지 2년. 이 과정을 통해 내가 얻게 된 깨달음이 바로 이거다. ‘건강한 삶’에는 장애가 장벽이 될 수 없다는 것. ‘장애인 접근금지’ 같은 건 없다는 것.

어려운 이야기라 집중해서 써내려갔더니 당 수치가 떨어져가는 게 느껴진다. 얼른 집에 가서 남편 몰래 쟁여둔 초콜렛을 하나 먹어야겠다. 나는 당뇨가 있지만 괜찮다. 당뇨로 인해 나타날 증상들을 관리하고 약과 운동 등으로 내 몸을 지원해주면서 살아가면 된다. 당뇨는 내가 앞으로 살아갈 건강하고 행복한 삶에 큰 장애가 아니다. 한 줌의 불편함일 뿐이다.

내 아들의 지적장애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내 아들이 앞으로 살아나갈 행복한 성인 장애인으로서의 삶에, 아들의 장애가 한 줌의 불편함 정도가 되기를 바란다. 관리 받고 지원받으면서 ‘장애와 더불어’ 건강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나가기를 바란다. 그리 되길 간절히 바란다.

 

/사진: 류승연

 

필자소개
류승연

저서: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 (전)아시아투데이 정치부 기자. 쌍둥이 출산 후 180도 인생 역전. 엄마 노릇도 처음이지만 장애아이 엄마 노릇은 더더욱 처음. 갑작스레 속하게 된 장애인 월드. '장애'에 대한 세상의 편견에 깜놀. 워워~ 물지 않아요. 놀라지 마세요. 몰라서 그래요. 몰라서 생긴 오해는 알면 풀릴 수 있다고 믿는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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