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중국. 정치적으로 공산당 1당 체제에 사회주의 노선을 갖고 있지만 경제적으론 자본주의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독특한 나라입니다. 우리는 중국의 국부인 마오쩌둥(毛澤東)과 개혁개방의 상징인 덩샤오핑(鄧小平), 현재 최고 권력자인 시진핑(習近平)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의 연결고리이자 90년대 중국의 대약진을 견인한 인물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그리고 세부적으로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중국의 실질적인 발전은 그때 이뤄졌음에도 말이죠.
장쩌민(江泽民). 중국 건국 이래 국가주석,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까지 중국의 당·정·군 최고위직을 모두 장악했던 최초의 인물이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유치, 한중수교, 임기 내내 10% 안팎을 오갔던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이 그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그럼에도 현재 한국에서는 ‘한물 간’ 원로 정치인으로 취급되고 있다.
1926년 중국 장쑤성 양저우에서 태어난 그는 국립중앙대학(現 남경대)을 거쳐 당시 중국 제1의 공과대학인 상해교통대학에서 전기기계학을 전공했다. 상하이에서 전기 기술자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으며, 제일자동차(第一汽车)에 입사해 중국 최초로 소련 ZIS 트럭을 라이선스 생산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상해 전기과학연구원 부소장과 제1 기계공작부 대외 담당, 전자공업부장을 거치며 전자공업 진흥정책을 진두지휘했다. 1984년 중국 최초의 정지궤도 통신 위성을 탑재한 창정 3호의 발사를 성공시키면서 당의 인정을 받아 경제특구인 상하이 시장의 자리에 임명된다.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정국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덩샤오핑에 의해 당 총서기에 오르게 된다. 이때 자신이 상하이 시장 재임 시기에 연을 맺은 수하들을 대거 중앙으로 불러들이게 되는데, 이들이 공산당 내 최고 계파로 군림했던 상하이방(上海幇)이다. 이들의 보좌를 발판삼아 장쩌민은 1993년 국가 주석의 지위에 올랐고, 19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하면서 완전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했다.
덩샤오핑이 중국 개혁개방의 기치를 올렸다면 장쩌민은 이를 계승·발전시키는 데 주력한 인물이다. 천안문 사태로 인한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고 안정화함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확보했으며, 미국과 한국을 최초로 방문해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중국 역사상 영어에 가장 능통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코카콜라와 맥도날드, NBA(미 프로농구) 등이 중국에 유입된 시기도 이때였다.
중국이 현재 미국과 함께 ‘G2’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도 장쩌민 시기의 고도성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공계 출신 지도자의 적극적인 정책으로 IT 발전이 이뤄졌고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여기에는 그가 내세운 3개의 대표 사상이 밑바탕이 됐다. 이는 ‘선진 사회 생산력의 발전 요구를 대표한다’,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을 대표한다’, ‘중국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가 그것이다.
물론 이 같은 빛만큼이나 그림자도 뚜렷하다.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 상하이방 인사들의 부패, 지역발전 불균형, 밀실 권력승계 등은 그가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업적에 비해 중국 국내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대중적 인기도 역시 높지 않다. 하지만 이는 사후 재평가가 이뤄진 후에 보다 정확해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아직 살아있는 전임 권력자를 추앙하는 것이 현직 지도자에 대한 불만으로 여겨지는 문화가 존재하기 때문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