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사이즈가 아니어도 수영복을 입어야 한다
44사이즈가 아니어도 수영복을 입어야 한다
2018.08.17 15:55 by 김은성

 

예능 프로그램 <밥블레스유>에서 이영자 씨의 수영 장면을 봤다. “얘들아. 간다!”고 외친 뒤 시원스럽게 물살을 가르는 그녀. 머리를 물에 넣지 않는 영법이 근사했다. 나는 세 가지 생각을 했다. ‘역시 사람은 수영을 해야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더 미루지 말고 수영 레슨 등록하자’. 그리고 ‘수영복이 예쁜데 어떤 브랜드일까’.

그런데 엉뚱하게도 여론의 관심은 그녀의 몸에 쏠렸다. 입수하기 직전 수영복 차림의 모습이 웹상에 나돌았다. 반응은 플랫폼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다.

다이어트와 지방흡입 수술로 마녀사냥을 당했던 그녀는 당당하게 몸을 드러냈다.

자신의 몸을 미워하고 학대하는 방식으로 자라난 한국 여성들에게 용기를 줬다.

당장 민소매도 제대로 못 입는 ‘코르셋’ 찬 여성들에게 해방감을 느끼게 했다.

내 ‘트친’들의 반응은 대체로 위와 같았다. 하지만 네이버 댓글과 카카오톡 채널의 찌라시 뉴스는 달랐다.

저거 살 아니고 근육입니다. 제가 헬스 트레이너라서 알아요.

자세가 너무 당당하네요. 과시하는 건가요?

올여름에 이영자 따라 한다고 수영장에 뚱녀들 우글거리겠네. 물 버렸다.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근육이 아니라 살이면 어떠한가. 그리고 당당하지 않게 앉아서 입수라도 해야 했나. 너나 갖다 버리라지.

그렇게 여성의 몸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도마 위에 오른다. 하물며 수영복 차림이라면 말 다 한 셈이다. 무릎의 모양부터 겨드랑이 밑까지 구석구석, 밀리미터 단위로 몸은 재단된다.

대한민국 보편적인 미의 기준을 충족하지 않는 여성이 수영복 위에 다른 옷을 걸쳐서 가리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까지 화제가 될 수 있다니. 그래서일까. 나는 여전히 한국에서는 비키니 수영복을 입지 않는다. 시선을 감당해낼 용기가 내게는 없다. 그렇게 우리는 물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세상에 살고 있다.

B와 처음 프랑스에 놀러갔을 때, 그는 물놀이에 미친 사람 같았다. 보이는 물마다 뛰어들었다. 그럴 만했다. 한국에서 수영장을 갈 때마다 그는 벽에 부딪쳐야 했으니까. 주변 사람들은 자유분방한 이방인에게 갖은 잔소리를 해댔다. 한 번은 인천 바다가 수영하기에 좋은 줄 알고 수영복을 챙겨갔다가 슬퍼져서 조개구이에 소주만 먹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진실을 말해주지 못한 것이 마음 한구석에 걸린다.

보이는 호수마다 뛰어드는 그의 뒷모습은 실로 아름다웠다. 내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행동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졌다. 수영복? 그런 것 없다. 트렁크 차림으로 그냥 뛰어들고, 물에 젖으면 대충 수건으로 추스르고 따가운 햇볕 아래 좀 어슬렁거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유가.

속 모르는 B는 머리 위로 부서지는 햇살을 받으며 연신 손짓했다.

“들어와. 물이 정말 시원해. 천국이야.”

괜찮다고 손을 내저으니 심각한 표정과 함께 한국어 대답이 되돌아온다.

“음. 재미없는 사람. 지루한 사람.”

프랑스 여름 영화 같은 자유는 그에게만 허용됐다. 누가 막는 것도 아닌데, 내 스스로가 거부했다. 속옷 라인 위로 뱃살이 보기 싫게 비춰질 터였다. 최소한 살을 탄탄히 잡아줄 수 있는 고탄력 원피스 수영복이 있어야만 했다. 나는 그렇게 서너 번의 황홀한 자유를 놓쳤다. 몸에 대한 강박은 놓아지질 않았다.

프랑스 가기 전 수영복 쇼핑에 나선 적이 있다. 남프랑스인들은 여름이면 물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므로, 분명히 호수와 바다를 숱하게 들를 테고 그중에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과 함께 비키니 코너 앞에 다다랐다. 하지만 망설임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걸 입기 위해서는 못해도 10kg은 빼야 할 텐데.’ 한 벌 한 벌 볼 때마다 강박만 쌓였다. 쇼핑은 스트레스가 되어 갔다.

반쯤 미칠 지경이 되어서 요가복 코너에 갔다. 다행히 요가용 브라탑과 데님 반바지를 사니 안심이 됐다. 브라탑은 재질이 아주 두껍고 탄탄해서 뱃살을 꾹꾹 숨겨줬다. 반바지는 허리 위로 올라오는 하이 웨이스트 디자인. 안전하다는 느낌을 선사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비난으로부터. 마음속 사감 선생으로부터.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팔다리까지 모조리 가릴 수는 없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자.

B의 누나인 나데쥬의 가족들과 프랑스 몽펠리에 바닷가로 피크닉을 간 적이 있다. 수영복을 두고 온 탓에 나데쥬 친구인 레아에게 빌려 입었다. 범상치 않은 수영복이었지만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각자는 각자의 즐거움에 흠뻑 빠져 있었다. 레아는 올해 60이 넘었다고 했는데, 나이가 얼마든 간에 섹시한 수영복을 가질 자유는 있는 것이구나 싶었다.

나데쥬는 끈으로 여미는 블랙 컬러의 심플한 비키니를 입었다. 배 부분에 흐릿한 수술 자국이 보였다. 제왕절개 수술의 흔적인지 다른 흉터인지, 자세히 보지는 않았다. 그게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수술 자국에 개의치 않고 멋진 자세로 담배를 태웠다. 만약 나였다면? 수술 자국을 가리는 하이 웨이스트 반바지를 입었겠지.

수영복으로 갈아입는 동안에는 자주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 명이 커다란 수건으로 가려주면 다른 한 명이 옷을 갈아입었는데, 이따금씩 바람이 불어 수건을 날려버렸다. 그때마다 함께 깔깔대고 웃었다. 수영복 차림이 이렇게 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몸의 단점에 신경을 끄고 나니 온전히 즐거움에 신경을 쓰게 됐다. 비키니 수영복을 한아름 가져왔었더라면 좋았겠다는 후회가 찾아들었다. 그렇게 매년 여름과 겨울, 한 달씩 프랑스에 머물 적마다 행복과 억울함이 교차한다. 그동안 스스로를 가두고 주변 눈치를 본 것에 대해 화가 났다. 한편으로는 이제나마 자유로워진 것 같아 기쁘기도 했다. ‘한 달 이민자’의 기분은 여러 조각으로 구성된 모자이크 같기만 하다.

그 바닷가가 너무 좋아서 나는 수영도 잊고 풍경을 눈에 새겨 넣었다. 파라솔 아래 누군가는 화려한 천을 한 장 깔고 누워서 작고 가벼운 소설을 읽고 있다. 뒤쪽에는 백발이 아름다운 할머니가 새빨간 비키니를 입고 누워 있다. 비키니의 면적 바깥으로는 셀룰라이트가 늘어져 있다. 그 셀룰라이트를 오래 바라보는 건 그녀가 아닌 나다. 눈을 뗄 수가 없다. 나도 저 할머니처럼 자유롭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옆에 있는 할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소박한 수영복 위로는 배가 가볍게 늘어져 있는데, 개의치 않는다. 그뿐이다. 서로를 여유롭게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데, 바라보는 것만으로 치유를 받는 느낌이 든다. 행복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행복하다니. 동시에 화가 치민다. 억울하다 내 인생. 어릴 적 바다에 놀러 갔을 때, 엄마와 작은 엄마는 항상 원피스 수영복 위에 크고 헐렁한 티셔츠를 걸쳤다. 좀 더 나이가 들자 아쿠아로빅 수업 때 말고는 절대로 수영복을 입지 않았다.

한국에 와서는 그 바다를 떠올리며 못 입던 옷들을 입었다. 개의치 않고 민소매와 짧은 바지와 브라끈이 보이는 차림을 했다. 물론 한 달을 못 갔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가 ‘팔뚝이 가늘어 보이도록’ 사진을 찍어준다며 어깨를 과장되게 뒤로 뻗는 왜곡된 포즈를 시켰다. 안다. 그게 엄마의 사랑이란 것도. 친구가 브라끈을 당겨 옷 속으로 넣어 주었다. “붙이는 브라 있어. 남는 거 줄까?” 가슴골이 보이는 옷을 입을 땐 선글라스를 쓴다. 뚫어지게 가슴을 보는 시선에 기분이 더러워져서다. 우리말엔 그렇게 인사말이 없나? 오랜만에 만나면 몸에 대한 칭찬과 걱정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결혼하더니 살쪘네’부터 ‘피곤해 보인다’, ‘너도 늙었다’, ‘너 오늘 화장 떴다’, ‘뿌(리)염(색)해야겠다 너’ 등등.

물론 프랑스라고 바디 이슈가 없고 몸매 품평이 없으랴. 그들이 사랑하는 여배우 중에 살찐 사람은 드물다. 죄다 커피와 담배가 주식인 것처럼 말랐다. 그들도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자연스럽게 깡마른’ 여자를 아름답다고 여긴다. 외모 지상주의가 없는 것도 아니다. 날씬한 몸매를 이상향으로 설정해 놓고 다이어트에 매진하는 것은 그곳이나 여기나 다르지 않다.

하지만 타인의 몸매를 지적하거나 이상화된 몸매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굉장히 무례한 것이라는 인식이 존재한다. B의 아버지는 몸집이 큰 사위에게 “기름진 음식을 덜 먹는 게 어떻겠나”라고 말했다가 모두에게 지적과 핀잔을 받았다.

프랑스 보건복지부 장관 마리솔 투렌은 이렇게 말했다. “젊은 세대가 비현실적인 이미지에 노출될 경우 자존감 저하뿐만 아니라 심각한 건강 문제가 우려된다.” 프랑스에서 일하는 모델은 주기적으로 체질량지수 등이 기록된 건강진단서를 보건당국에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한다. 건강진단서를 발급받지 않은 모델을 기용한 에이전시는 약 1억원에 달하는 벌금형 혹은 최대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한국 기준 44 사이즈에 미달하는 패션모델은 이들 기업의 브랜드와 일할 수 없다.

주름진 가슴을 드러낸 여자들. 브라끈을 내보인 여자들. 다리의 흉터를 드러낸 여자들. 성성하게 틈이 생긴 머리에 굳이 ‘뽕’을 넣지 않는 여자들을 보며 마음이 다소간 편해졌다. 프랑스에서 찍은 맨얼굴, 정돈되지 않은 머리의 사진을 보고 내 친구들은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거기서 완전 자유인 됐네.”

그러니까 그 말은, 한국에선 자유인이면 안 된다는 소리지?

필자소개
김은성

프랑스어 모르는 한국여자, 한국어 배우는 프랑스 남자 바티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나라 말로 부르건 들은 척 안하는 고양이 미코와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살고 있습니다. 국제부부의 생생한 삶을 담은 '다큐적 접근'적 에세이를 써볼게요.


The First 추천 콘텐츠 더보기
  • ‘성장의 상징, 상장’…스타트업들의 도전사는 계속된다
    ‘성장의 상징, 상장’…스타트업들의 도전사는 계속된다

    자본과 인력, 인지도 부족으로 애를 먹는 스타트업에게 기업공개는 가장 확실한 대안이다. 단숨에 대규모 자본과 주목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래 파트너와 고객은 물론, 내부 이...

  • “24주 연속 1위 브랜드의 저력으로”…‘나르카’ 운영사 ‘언커먼홈’, 매쉬업벤처스 등으로부터 후속 투자 유치
    “24주 연속 1위 브랜드의 저력으로”…‘나르카’ 운영사 ‘언커먼홈’, 매쉬업벤처스 등으로부터 후속 투자 유치

    이제 헤어 케어도 브랜딩이다!

  • “최근 가장 눈에 띄는 창업팀은?”…유망 초기 스타트업 뽑는 ‘혁신의 숲 어워즈’ 막 올랐다
    “최근 가장 눈에 띄는 창업팀은?”…유망 초기 스타트업 뽑는 ‘혁신의 숲 어워즈’ 막 올랐다

    현시점에서 가장 기대되는 스타트업 30개 사는 어디일까?

  • “Only for you”…대세는 초개인화 서비스
    “Only for you”…대세는 초개인화 서비스

    초개인화의 기치를 내건 스타트업들이 존재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

  • 타 산업과 연계, 핵심 기술 접목…“관광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라”
    타 산업과 연계, 핵심 기술 접목…“관광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라”

    '관광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 틈새에 대한 혁신적인 시도 돋보였다!

  • “생산성, 효율성 쑥쑥 올리는 솔루션”…매쉬업벤처스, 스타트업 ‘마일 코퍼레이션’에 초기 투자
    “생산성, 효율성 쑥쑥 올리는 솔루션”…매쉬업벤처스, 스타트업 ‘마일 코퍼레이션’에 초기 투자

    기업의 공간, 자산 관리를 디지털 전환시킬 창업팀!

  • “당신에겐 더 큰 무대가 필요하다”…스타트업의 해외진출을 지원하는 스타트업
    “당신에겐 더 큰 무대가 필요하다”…스타트업의 해외진출을 지원하는 스타트업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는 스타트업의 등장!

  • “국내 기업의 글로벌 성장 발판 마련”…한국액셀러레이터협회, 뉴저지 진출 전략 웨비나 개최
    “국내 기업의 글로벌 성장 발판 마련”…한국액셀러레이터협회, 뉴저지 진출 전략 웨비나 개최

    국내 유망 스타트업의 미국 진출, 맞춤형으로 지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