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잉글랜드로부터의 억압과 고통에 시달려온 스코틀랜드. 713년 전 오늘, 스코틀랜드의 독립운동을 이끌던 영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독립된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스코틀랜드인들의 의지는 무력에 짓밟혔지요. 그리고 오늘날 다시금 독립의 기운이 피어올랐습니다만, 이번에도 꿈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간절했던 그들을 막은 것은 칼이 아니라 경제 논리였습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freedom!”을 외치던 멜 깁슨을 기억하는가. 그 실존 인물이 바로 스코틀랜드의 독립 영웅인 윌리엄 월레스(1270-1305)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잉글랜드의 침공으로 인해 가족을 모두 잃으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월레스는 세력을 키워 스코틀랜드 전역을 장악하고 잉글랜드로 쳐들어가 요크 성을 함락시키는 등 적잖은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반격을 개시한 잉글랜드와의 전투에서 크게 패했고, 본인은 프랑스와 로마를 떠돌았다. 이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재기를 노렸으나 잉글랜드군에 붙들리고 만다.
그는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됐고, 목을 매닮과 동시에 사지를 찢기는 극형에 처해졌다. 잉글랜드에 끝까지 저항했던 그의 정신은 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자유롭게 의지를 가지는 것이 사람이다. 가축처럼 사슬에 묶여 다른 사람을 따른다면 더 이상 그건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2014년. 스코틀랜드에서는 영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이미 독자적인 사법·교육·보건 체제를 갖췄고, 많이 이들이 알다시피 월드컵에도 따로 출전하고 있는 만큼 독립국가가 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영국이 갖고 있는 북해 유전의 90% 이상을 스코틀랜드가 독점할 수 있게 된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물론 가장 큰 것은 오랜 역사적으로 증명된 뿌리 깊은 내셔널리즘이었다.
하지만 그해 9월18일 분리 독립 여부를 놓고 치러진 주민투표 결과 찬성 161만7989표(44.7%), 반대 200만1926표(55.3%)로 무산되고 말았다. 32개 주 가운데 찬성 비율이 높은 곳은 단 2곳에 불과했다.
배경은 간단했다. 잉글랜드에 대한 시장·재정 의존도가 여전히 높기 때문이었다. 세계 각국들의 입장도 대체로 반대 목소리가 컸고, 영국에서 조세권과 예산권의 이양을 약속함에 따라 스코틀랜드 내부에서는 얻어낼 만큼 충분히 얻어냈다는 인식도 확산됐다. 여기에 믿었던 북해 유전의 생산량이 해마다 급감 추이를 보이면서 경제성을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도 회의론에 무게를 실었다.
결국 700여년 만에 타오른 스코틀랜드 독립의 불길은 ‘머니파워’에 막혀 사그라지게 됐다. 영국의 브렉시트(Brexit)가 이뤄지면서 또 다시 독립 찬성 여론이 고개를 들고 있지만 가까운 미래에 재투표를 실시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