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뜯어먹는 영단어’ 인강 만들기
‘뜯어먹는 영단어’ 인강 만들기
2018.09.03 10:08 by 김사원

 

<뜯어먹는 영단어>라는 학습 교재가 있다. 하루에 30개씩 60일 동안 1800개 영어 단어를 외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교재다. 출판사는 모바일로 볼 수 있는 동영상 강의를 따로 만들기로 했다. 모바일로 틈틈이 공부할 수 있도록 단어 하나하나를 각각 동영상으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1800개 단어 영상과 하루치 단어 30개를 모은 영상 60개를 더해 총 1860개의 동영상이 나와야 했다. 1860개의 영상을 하나하나 자르고 만들어낸 이가 바로 동영상 강의 제작 업체를 다니던 시절의 김 사원이다.

“<뜯어먹는 영단어> 작업은 김 사원이 맡아서 이번 주까지 해주세요.”

기 팀장의 지시를 듣자마자 김 사원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이번 주 내내 1860개 영상의 앞과 뒤를 자르고, 페이드를 넣고, 인코딩(파일 변환)을 하고, 파일 이름을 바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편집 속도가 빠르다고 좋아해 주더니 이런 일을 맡기는구나. 대학 4년 동안 배운 기술을 이런 노가다에 쓰는구나.

“팀장님, 이 작업 너무 토 나올 것 같아요.”

머릿속 비디오가 재생을 끝내자마자 김 사원의 입이 불평을 내뱉었다.

“음... 그러면...”

기 팀장의 대답 아닌 대답이 나왔다. 말이 더 이어질 듯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자기 모니터를 보며 하던 일을 마저 하는 것처럼 보였다. 십분 정도 지나자 말이 이어졌다.

“<뜯어먹는 영단어> 작업을 계속하면 토 나오잖아. 작업 기간을 일주일 더 늘려줄게요. 대신 다른 작업 하나랑 같이 해요. 뜯어먹는 거 작업하다가 토 할 것 같으면 다른 작업 조금 하고, 그러다가 다시 뜯어먹는 작업하고... 알겠지?”

기 팀장은 '토 나온다'는 김 사원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서 평소처럼 차분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김 사원은 왠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조삼모사 원숭이들의 마음이 조금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작업할 하드 디스크를 받았다. 얼마나 단순 반복적이고 노동집약적인 작업인가 가만히 세보았다. 컷 3720번, 페이드 삽입 3720번, 인코딩 추가 1860번, 파일 이름 바꾸기 1860번, 검수 1860번을 해야 끝나는 작업이었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평소보다 백 배, 천 배 두들겨야 함이 분명했다. 작업 기간이 늘어서 다행이다 생각하며 작업을 시작했다.

한 시간, 두 시간 만들다 보니 자연스레 노하우 비슷한 게 생겨났다. 편집 단계를 변경해 단축키를 더 쉽고 빠르게 누를 수 있도록 했고 인코딩하는 동안 대기하는 시간을 줄였다. 프로세스가 정해지자 머리와 눈은 그저 도울뿐 손가락이 알아서 키보드와 마우스를 오갔다. 영화 <모던 타임즈>에 나온 찰리 채플린이 떠올랐다.

팀장에게 불평했던 것이 민망할 정도로 토 나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키보드 몇 번, 마우스 몇 번은 유치한 계산이었다. ‘해보기 전에는 어려울 것 같았는데, 시작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어렵지 않았다.’ 만약 오늘의 일기를 쓴다면 느낀 점에 이렇게 적어야 할 듯 했다.

돌이켜보면 팀장이 '음... 그러면...'을 내뱉어 놓고 십분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김 사원의 뻔뻔함에 기가 찼을까, 철없음에 고개를 저었을까, 일단은 달래 보자 하고 마음을 먹었을까, 업무 조정이 가능할지 가늠해봤을까. 팀장의 연륜으로는 별로 큰 문제도 아니었을까.

다른 회사로 옮기고 다른 업무를 하는 지금도 하던 일이 아닌 새로운 일을 지시 받을 때면 마음속에서 훅 치솟는 거부감을 느낀다. 거부감을 감추는 일은 여전히 미숙하다. 그럴 때면 어딘가 숨어있던 순발력까지 나타나 못하는 이유를 줄줄이 찾아내며 한몫 거든다.

그래도 가끔은 거부감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과 반발은 아닌지 다시 한번 살펴본다. 잔뜩 움츠린 마음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해보기도 전에 할 수 없는 이유부터 늘어놓는 일이 나중에 자신을 얼마나 우습고 민망하게 만들 수 있는지 떠올린다. 예전의 기 팀장이 말 한 것처럼 다른 일을 조금 하면서 천천히 새로운 일을 시작해본다.

필자소개
김사원

10년 차쯤 되면 출근이 조금 담담하게 느껴진다던데요. 저에게도 10년 차가 되는 날이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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