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게 북한 신의주에서 중국 단동으로 하루에 한 대 운행되는 열차야. 이제 곧 기차에서 북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겠지.”
창희의 설명에 일행은 신기함이 가득한 눈으로 열차를 바라본다. 하지만 이내 곧 무덤덤한 표정과 함께 담배에 불을 붙인다. 아직 이런 정도에 호들갑을 나타낼 것은 아니라는 듯 호기심을 애써 감추려는 기색이다.
호텔에 당도하자 다시 창희가 바빠진다. 로비에서 호텔 직원과 몇 차례 실랑이가 오간 끝에 방이 배정됐다. 이미 한국에서 예약과 결제를 마쳤음에도 절차가 녹록치 않다. 외국인에 대한 경계와 터부시는 일종의 통행세 같은 것이었다.
창희는 투덜댔지만 일행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기색이다. 단동에 도착했다는 감상은 그를 제외한 4명의 몫이었다. 심지어 경윤은 시장기를 호소하기 시작하며 뭐라도 먹자는 신호를 연신 보낸다. 창희는 허탈하게 웃고, 이를 본 다른 이들도 웃는다. 양측이 웃는 이유는 분명 달랐지만.
간단히 짐을 풀고 나온 일행은 저마다 캐릭터가 확실하게 잡힌 모양새다. 시대극 ‘미스터 션샤인’에 꽂힌 상근은 ‘양복’이라고 지칭하기에도 올드한 느낌의 정장 차림으로 멋을 부렸다. 짙은 갈색 바지에 얽어맨 멜빵이 눈길을 끈다. 경윤은 길거리 간판에 적힌 한자를 더듬으며 해석하는 데 여념이 없다. 역시 텍스트를 대하는 인문학자의 자세답다. 동욱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의 근육에 힘을 주며 사방을 경계하기 시작한다. 청와대 경호원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터다. 전날 음주로 인한 숙취를 이제야 털어낸 지혜는 모든 풍광을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사진을 찍어댄다. 휴대폰 카메라 셔터가 닳아 없어질 지경이다.
그렇게 일행은 호텔 앞에 펼쳐진 압록강을 바라본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참전을 막기 위해 유엔군이 폭파시킨 철교는 북한 쪽 절반이 날아간 채로 ‘압록강 단교(斷橋)’란 이름이 붙었고, 그 옆에 교역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새 다리는 ‘중조우의교(中朝友誼橋·중국과 조선의 우의로 연결된 다리)’로 명명됐다. 끊어진 오랜 다리와 온전한 새 다리. 언젠가 앞으로 더 나은 세월이 온다면 서울에서 단동까지 기차로도 와 닿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일행의 머릿속을 헤집는다.
천천히 이동하는 일행 앞을 찻길이 가로막는다. 신호등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고, 바닥에 그어놓은 흰색 줄은 유심히 봐야 보일 정도다. 차들은 일행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쌩쌩 달려댄다.
“어머! 이거 너무 위험한 것 아니야?”
경악스런 눈빛과 함께 탄식을 쏟아내는 지혜. 그녀를 뒤로 하고 창희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길을 건너기 시작한다. 잠시 머뭇했던 일행도 급히 뒤따른다. 이내 경적 소리가 도로에 울려 퍼졌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창희가 체념한 표정으로 짧게 한 마디를 뱉는다.
“여기 중국이야.”
일행 앞에 드디어 류경식당 간판이 보이기 시작한다. 북한에서 직영하는 대표 음식점이다. 약간의 주저와 함께 긴장감을 날리기 위해 일행은 다시금 담배에 불을 붙인다. 금장의 장식과 간판, 굵고 높은 흰색의 기둥이 알게 모르게 위압감을 선사한다. 마치 작고 유약한 동방의 작은 은자의 나라라 불리는 것을 거부하는 듯한 기세다.
일행은 창희를 필두로 조심스레 입장했다. 긴장감을 완전히 떨치진 못했지만, 어차피 남북관계가 역사상 이렇게까지 좋았던 적도 없는 요즘이니 별 일이야 있겠는가 하는 생각들이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식당의 북한 여성 종업원이 환영의 인사를 건넨다. 눈은 웃고 있지만 분명 일행을 빠르게 훑는 기색이 역력하다. 더구나 그 상냥한 인사말은 중국어다.
그러자 창희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되받는다.
“저희는 남쪽에서 왔습니다.”
여지없이 을지로 어디쯤에 있는 단골집 이모를 대하는 말투다. 다행히 그녀는 별다른 제지 없이 일행을 안내한다. 다만 아까와 같은 상냥한 미소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일말의 긴장감이 감도는 얼굴로 바뀐다.
류경식당은 메뉴를 먼저 선택한 뒤 자리를 배정받는 시스템이다. 주문을 위해서는 남쪽에서 온 여행자들과 북쪽의 종업원이 대화를 주고받아야만 했다. 감을 잡은 일행은 앞다퉈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무엇이 맛있으며 재료는 무엇인지까지 묻고 또 물었다. 말을 섞을 요량으로 이미 뻔히 아는 이야기도 부러 물어본다.
종업원은 마치 기계처럼 답을 던진다. 일정한 표정과 일정한 톤, 모르고 들으면 흡사 핀잔 같기도 한 말투지만 일행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일행은 평양냉면과 개성만두, 그리고 두부 요리와 삼겹살 구이 등등을 주문한 뒤 자리를 잡는다.
모두가 자리에 앉으니 그녀가 다가와 상근에게 말을 건넨다. 일행은 일순간 긴장했다. 테이블에 자연스레 내려놓은 고프로를 눈치채기라도 했다면 낭패니까. 당사자인 상근은 그 긴장감이 더욱 역력했다.
“여기 말고, 저쪽으로 앉으시라우요.”
다행이었다. 상차림이 준비돼 있지 않은 좌석에 앉은 상근에게 다른 자리를 권한 것이었다. 안도감과 함께 민망함에 휩싸인 상근은 괜스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자리를 옮긴다.
이윽고 도수 40도의 류경술과 북한의 대표 맥주인 대동강 맥주가 테이블에 오른다. 북쪽의 술을 마주한 일행들의 얼굴에는 묘한 긴장감과 설렘이 서린다. 이질감과 동질감이 혼재하는 공간, 그리고 이들의 복잡한 머릿속. 이들은 이 감정의 실마리를 찾아내고 싶었다.
술자리 분위기를 환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나 건배. 동욱이 서둘러 병을 개봉한다. 그러자 종업원이 다가와 병을 빼앗고는, 한 명씩 돌아가며 일행의 잔에 술을 채워준다. 상근이 한국에서의 버릇처럼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높여들자 종업원이 병으로 잔을 지그시 누르며 손을 떼라는 지시를 한다. 상근은 다시 멋쩍게 웃으며 좌중을 둘러본다.
기분 좋은 건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첫날 저녁식사를 겸한 술자리가 시작된다. 기대했던 평양냉면의 외양은 다소 특이하다. 마치 칡냉면 같은 색감의 면 위에 무채와 오이, 달걀 지단과 쇠고기 고명, 붉은 양념이 올려진 모습이다. 냉면이 담긴 육중한 느낌의 금빛 놋그릇은 어딘가 단단해 보인다.
남북대화의 실마리는 이 냉면으로부터 풀리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종업원과 경윤의 대화.
“면을 잘라서 드십니까? 가위가 필요하면 말씀하시지요.”
“면 잘라먹으면 명 짧아진다고 들었습니다.”
경윤의 대답을 들은 종업원이 환한 웃음을 터뜨린다. 일행도 다같이 웃음으로 화답한다. 다소 냉랭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반전됐다. 그러자 그녀는 묻지도 않았는데 냉면 먹는 방법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제는 남쪽 사람들도 어지간하면 알고 있는, 면에 식초를 치고 육수에 겨자를 섞는 그 방법이다. 일행 역시 이를 모르지 않았지만, 마치 대단한 비법을 알았다는 양 탄성을 지르며 화답을 한다. 오가는 대화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그 내용이야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하는 마음에서.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한다. 저마다 술과 음식에 대한 품평과 감상을 늘어놓기 바쁜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은 중국이지만 동시에 북한이었다. 그렇게 일행은 분위기에 완전히 적응했다.
한참을 그렇게 마시고 맛보며 떠들어대는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창희의 눈길이 어딘가를 향한다. 일행은 창희의 얼굴을 일제히 바라본다. 알 듯 말 듯 옅은 미소가 서린 표정이다. 창희의 시선이 닿는 그곳으로 일행의 시선도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오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