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레 다가오는 한 여인. 그녀를 바라보는 창희, 그리고 둘을 지켜보는 일행의 눈길. 타국에서의 묘한 분위기는 그렇게도 갑작스럽게 찾아들었다. 마치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밤사이 진주해온 적군들 같다던 그 안개처럼.
순간 상근은 지난 8월의 그날을 떠올렸다. 시작은 그다지 특별할 것 없었던 술자리. 여느 때처럼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 창희는 갑자기 자신이 두 달 전 다녀온 중국 단동의 추억을 꺼냈더랬다. 단동에서 처음 찾았던 류경식당, 그곳에서 처음 만난 북한 종업원과의 기억. 창희는 그 종업원 여성과 나눈 짧은 몇 마디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고 털어놨었다. 당시 상근은 흥미로움을 느끼면서도 창희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못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전무하거니와, 워낙 습관적으로 MSG를 가미하는 것을 즐기는 창희의 화법에 익숙하기도 했기 때문에.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창희를 향한 그녀의 인사가 정적을 깬다. 동시에 상념이 사라진 상근도 현재로 돌아왔다.
“와, 그 이야기 진짜였어?”
동공이 한껏 확대된 동욱이 경이롭다는 듯 감탄사를 터뜨린다. 다른 일행들도 놀랍다는 표정들이다. 정작 창희의 얼굴에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만 스친다. 사실 그가 지난날의 방문에서 그녀와 나눈 대화는 길지도 깊지도 않았다. 남쪽 여행자와 북쪽 종업원이 주고받을 수 있는 문답은 애당초 어색함과 긴장감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그 순간과 기억이 창희에게 강렬했던 이유는 이성이라는 사실을 넘어 더욱 특별했던 존재감 때문이었다. 그는 8월의 그날 일행들에게 기억을 반추할 당시에도 그녀의 생김새나 차림새를 묘사하는 대신 느낌을 전달하려 애썼었다. 그 같은 느낌은 오늘 그녀와 다시 마주함으로써 비로소 확신이 됐다.
창희와 그녀가 주고받은 짧은 인사를 끝으로 둘 사이에는 그 후로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일행은 드라마의 한 장면이라도 되는 마냥 신이 났지만 창희는 조용히, 그리고 태연하게 맥주만 들이켰다.술이 몇 순배 돌고 음식도 비워갈 무렵 갑자기 종업원들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북한 식당에서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간단한 공연을 준비한 것이다. 이미 한국에도 익숙한 노래인 ‘반갑습니다’가 청아한 여성의 목소리로 울려 퍼진다. 흥이 오른 경윤은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연신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종업원이 다가와 상냥한 목소리로, 그러나 뚜렷이 고압적인 뉘앙스로 제지를 한다. 요청보다는 경고에 가깝다.
“아니, 저기 다른 테이블에 있는 중국 사람들은 놔두고 왜 저한테만 그러십니까?”
숫제 자리에서 일어나 옮겨 다니며 사진을 찍느라 바쁜 중국인들을 손짓하며 경윤이 불만을 표한다. 하지만 여전히 표정만 웃고 있는 종업원은 물러날 생각이 없다. 아예 바로 옆에 지키고 서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감시에 열중이다.
일행은 모르지 않았다. 이해가 어렵지도 않았다. 같은 돈을 지불하고 밥을 먹으러 왔어도, 한반도 남쪽에서 온 이들은 그들에게 아주 달가운 손님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일행의 머리와 가슴 속을 헤집는 분단의 현실은 계속해서 술을 불렀다. 그러나 그 술맛은 그리 길게 지속되지 못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서 못 이룬 남북의 화합은 숙소에서 대동강 맥주와 한라산 소주로 대신하기로 약속한 채.
음식 값을 지불하고, 조금은 텁텁한 기분에 휩싸인 일행은 북쪽 사람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다소 형식적인 감사의 인사를 받고 돌아선 이들은 동욱의 제안에 따라 기념 촬영을 하기로 한다. 그때 갑자기 한 종업원이 다가와 선심 쓰듯 휴대전화를 건네 달라는 손짓을 한다. 아까 전 경윤을 제지했던 그녀다. 내심 미안한 마음에서였을까. 그렇게 촬영된 기념사진 속 일행들의 표정에는 실로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이 서렸다.
약간의 취기로 기동력이 떨어진 일행은 느긋하게 압록강변을 걷는다. 이쪽과는 확연히 다르게 강 건너편은 불빛이 거의 없다. 강변에는 다양한 먹거리와 기념품, 장난감 등을 파는 노점이 펼쳐져 있다. 대부분 소소하고 조악한 것들뿐이었지만 기분 전환이 필요했던 일행들은 망설이지 않고 지갑을 꺼낸다.
길을 걷던 지혜가 한 장사꾼의 호객에 걸려든다. BB탄 공기총으로 풍선을 쏘아 맞히고 인형 따위를 획득하는 퀘스트다. 일행 중 유일하게 군 미필이자 여성인 지혜를 바라보는 나머지 일행은 의구심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엄청난 명중률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행은 환호했고, 표정이 일그러지던 장사꾼도 나중에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혀를 내둘렀다.
시각이 야심해지면서 어느 새 강바람이 차가워졌다. 상점들과 음식점들도 저마다 문을 닫는 분위기다. 일행은 술과 안주거리를 마련해 호텔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잠시 걸었을까, 어디선가 유혹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구수한 향기가 풍겨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