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과 지혜의 공동체
우정과 지혜의 공동체
2018.11.22 15:54 by 김경윤

마음에 맞는 계절에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

마음에 맞는 말을 나누며 마음에 맞는 시문(詩文)을 읽으면

이는 최상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이런 기회는 지극히 드문 것이어서 일생을 통틀어도 모두 몇 번에 불과하다.

-이덕무(李德懋)

 

청나라로 가는 길.(사진: 더퍼스트미디어)
청나라로 가는 길.(사진: 더퍼스트미디어)

#1

일찍이 조선 영정조 시대에 한양 백탑(지금의 종로2가 탑골공원 내의 원각사지 10층석탑)을 중심으로 모여 우정과 지혜를 나눴던 백수들의 공동체가 있었다. 이른바 백탑파’.

이들은 한양의 랜드마크인 백탑을 중심으로 시도 때도 없이 모여 돌아다니며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지식을 교환하며 밤을 지새우곤 했다.

가장 연장자로 치자면 1730년생 정철조와 1731년생 홍대용이 있고, 그 바로 밑으로 1737년생 박지원이 있었으며, 1741년생 이덕무, 1743년생 백동수, 1748년생 유득공이 뒤따랐고, 1750년생 박제가와 54년생 이서구가 막내노릇을 했다.

나이 터울로 치면 20년 차이가 넘는 장년과 청년의 하이브리드 공동체였다. 원조 백수인 정철조와 홍대용이 고문 격이었다면, 백수대장 박지원이 좌장 역할을 맡고, 중간에서 이덕무가 가교 역할을 했다. 1779년 정조는 이들의 재주를 높이 사서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명했다. 정조의 탕평책과 서얼 중용정책이 아니었다면 이들은 관직에 나가지 못했을 터다.

 

#2

일찍이 명나라의 이탁오는 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 친구이면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그 또한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의 사례를 찾으라면 단연 백탑파가 으뜸이리라.

그들은 나이를 떠나 우정과 지혜를 나누었고, 물심양면으로 서로 도우며 지냈다. 연령뿐만 아니라 양반과 서자라는 신분의 차이도 그들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홍대용, 정철조, 박지원, 이서구는 명문세가의 자식이었지만, 이덕무, 백동수, 유득공, 박제가는 서자였다.

특히 박지원은 과거에 관심이 없었고, 홍대용이나 정철조는 당시 양반들이 눈길조차 주지 않는 과학과 공학을 좋아했다. 양반이면서도 마이너에 해당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출세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백성들의 이용후생에는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다. 후대에 이들을 이용후생(利用厚生)학파로 명명된 것은 이들의 관심사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철학이 아니라 실제생활에 도움을 주는 실학이었기 때문이다.

박지원의 아들이 쓴 <과정록>은 홍대용과 박지원의 관계를 이렇게 증언한다.

담헌 홍대용은 아버지보다 여섯 살 많았는데 학식이 정밀하고 심오했다. 담헌공 역시 아버지처럼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를 그만둔 채 한가롭게 지내셨다. 그는 아버지와 더불어 도의(道義)의 교제를 맺었는데, 두 분은 서로를 가장 친하고 독실한 벗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두 분은 서로 공경하여 말하거나 부를 때 마치 처음 교제를 맺었을 때와 같이 했다. 아버지는 항상 우리나라의 사대부들이 대부분 이용(利用)과 후생(厚生), 경제(經濟)와 명물(名物) 등의 학문을 소홀하게 여긴 탓에 그릇된 지식을 답습하는 일이 많아 그 학문이 매우 거칠고 우둔하다는 것을 병통으로 생각하였다. 담헌공이 평소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던 의견 또한 이와 같았다.

이에 두 분은 서로 만날 때마다 며칠을 함께 머무르며 위로는 고금(古今)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의 연고(緣故)에서부터 옛사람의 출처(出處)와 절의(節義), 제도의 연혁(沿革), 농업과 공업의 이로움과 병통, 재산과 재물을 관리하는 방법과 더불어 지리, 국방, 천문, 음악, 법률뿐만 아니라 나아가 초목이나 조수(鳥獸), 육서(六書 : 상형(象形)지사(指事)회의(會意)형성(形聲)전주(轉注)가차(假借) 등의 문자학)와 산학(算學)에 이르기까지 구멍을 꿰뚫어 동여매거나 논의(論議)를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모두 기록하거나 외울 만 했다.”

한편 박지원과 다른 이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

선군(박지원)께서는 타고난 성품과 자질이 호탕하고 고매하였다. 그래서 명예나 이익에 행여 몸과 마음을 더럽히지나 않을까 항상 경계하고 삼가셨다. 중년에 과거시험장에 나가는 것을 그만두자 교유(交遊)하는 사람들 또한 간소해졌다. 오직 담헌 홍대용과 석치 정철조와 강산 이서구가 수시로 서로 오고 갔고, 이덕무와 박제가와 유득공이 항상 따라서 어울렸다.”

 

#3

이들 중 가장 먼저 청나라에 다녀온 사람은 홍대용이었다. 그는 1765(영조 41) 35세의 나이로 작은 아버지이자 서장관으로 임명된 홍억의 자제군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새로이 눈을 뜬다.

그가 경험한 청나라는 우물 안 개구리가 알고 있었던 나라가 아니었다. 북경 유리창에서 만난 항주의 선비 엄성과 반정균, 육비와 시공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었고, 천주당과 관상대를 방문해 서양의 문물을 접하면서 자신의 낡은 세계관을 서서히 허물고 새로운 세계관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른바 청나라로부터 배우자는 북학파의 시작이다.

그는 청나라에 다녀와 조선시대 3대 중국견문록으로 꼽는 <을병연행록>을 기록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그의 사상적 집적이 된 <의산문답>을 집필한다.

박제가는 1778년 서장관 심영조의 종사관이 된 이덕무와 함께 청나라를 다녀온다. 그때의 경험은 너무나 강렬한 것이어서 <북학의>로 정리해 북학의 필요성을 임금에게 고했다.

1790년 여름에는 건륭제의 팔순을 축하하기 위해 유득공과 함께 청나라를 다녀왔다. 3번째는 그해 겨울 원자 탄생에 대한 건륭제의 축하 인사의 답례사신이 돼 청나라로 향했지만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말머리를 돌려야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것은 1801년 주자가 쓴 좋은 책들을 가져오라는 왕의 명령을 따른 것이었다. 이번에도 유득공과 함께였다. 이렇게 하여 총 4차례 청나라를 다녀오면서 박제가는 청나라의 지식인들과 사귀며 국제적인 인물이 됐다. 그가 현지에서 사귄 사람들은 172명에 달했다.

이에 박지원은 청나라 사신 행렬을 따라가기도 전에 이미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의 곁에는 <을병연행록>을 쓴 홍대용과 <북학의>를 쓴 박제가, 박제가와 함께 다녀온 이덕무가 있었다.

청나라에 다녀온 백탑파의 일원들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박지원은 얼마나 이들을 부러워하며 청나라를 경험하고 싶었을까 생각하면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진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본 국내파들은 이 느낌을 짐작하리라.

그리고 드디어 1780, 박지원의 청나라행이 성사된다. 정조의 최측근 홍국영이 주도하는 세도정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황해도 금천의 연암골로 오랫동안 숨었다가 한양으로 다시 돌아온 해였다.

 

#4

201891일에 고작 23일 일정으로 대련과 단동을 다녀와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은, 이 여행이 단지 시작일 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중국여행을 다녀온 젊은이들의 면면을 보면 이 여행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을 것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중국에서 유학해 중국통이 된 더퍼스트미디어 부편집장 이창희가 길머리를 잡고, 미국에서 유학을 한 고양신문 기자이자 사람공동체 리드미 대표인 윤상근이 뒤를 따르며, 평화캠프의 일꾼이자 페미니스트이면서 노동당의 중책을 맡고 있는 신지혜가 있고, 온갖 행정적 실무에 능하면서 창의적인 일과 허드렛일을 마다 않는 김동욱이 있다. 그리고 국내에는 아마추어 화가이자 백수의 왕을 자칭하는 기획자 나경호가 후방을 지원하며 병참을 담당하고 있다.

나이로 치자면 30대 초반부터 40대를 거쳐 50대 중반까지 포진되어 있으나, 어찌 우리 사이에 우정과 지혜가 없겠는가. 박지원을 중심으로 백탑파가 결성되었으니, 우리 모임을 무슨 파라 정할까. 이름이 아직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우리 모임은 확장 가능성이 아주 크다.

우리 비록 가난하지만 우정과 지혜가 있다. 우리 모두는 백수다. 직장이 있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으나, 일에 매몰되지 않고 더욱 커다란 꿈을 갖고 다양한 능력을 기르는 사람은 모두 백수. 자신만 챙기는 이기적인 하얀 손[白手]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100가지 일을 넉넉히 해낼 수 있는 100개의 손[百手]을 가지고 있다. 공부를 기획하든 여행을 기획하든 놀이를 기획하든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젊음이 있다. 일자리에 투자하지 말고 젊음에 투자하라. 건물이나 회사에 투자하지 말고 사람에 투자하라. 그러면 미래가 그대에게 다가올 것이다. 자유롭고, 평등하고, 행복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동체의 미래가.

 

필자소개
김경윤

1964년 서울 출생. 현 경기 고양시 거주. 중년의 인문학 작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지만 심상치 않은 외관으로 인해 다양한 오해를 받음. 엄청난 지식과 통찰을 보유했으나 동시에 욕설과 음담과 패설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언어 구사의 권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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