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영화 소재의 변천사로 본 재난의 역사 ②
재난영화 소재의 변천사로 본 재난의 역사 ②
2019.01.11 13:56 by 이지섭

지난 이야기에서 실제 재난을 오롯이 구현하며 재난 영화사()의 서막을 올린 1930년대 재난영화와 암울했던 사회적인 분위기를 재난에 비유하며 전성기를 맞았던 1970년대의 영화를 살펴봤습니다. 70년대 재난영화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TV의 보급과 SF와 같은 유사장르의 등장으로 인해 빠르게 막을 내렸고, 한동안 빛을 보지 못했죠. 하지만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0년대는 다시 재난영화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재난영화가 등장해야만 하는 시기였습니다. 그 시절을 기억하시나요?

 

영화 아마겟돈과 딤임팩트 포스터(사진: 네이버영화)
영화 아마겟돈과 딤임팩트 포스터(사진: 네이버영화)

1990년대 종말론, 재난영화의 화려한 귀환을 부르다

지구가 종말한대!”

역사를 돌이켜보면 수많은 종말론들이 제기되어 왔지만, 1990년대만큼 다양한 지구종말론이 공존했던 시기는 없을 겁니다. 컴퓨터가 2000년 이후의 연도를 인식하지 못해 세계에 대혼란이 도래할 것이라는 '밀레니엄 버그', “19997월에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온다는 대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19921028() 24시에 휴거가 일어난다"는 주장으로 수많은 신자들을 모았던 다미선교회 사태 등 온갖 종말론들이 판을 치던 시기였죠.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인류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습니다.

한 도시를 집어삼키는 화재나 지진, 혹은 여객선의 침몰 등 모두 하나같이 끔찍한 일이지만, 인류의 종말과 그 종말을 앞둔 불안감을 표현하기에는 충분치 않았습니다. 재난영화는 이번에는 몸집을 더욱 키워서, 관객들에게 종말의 경험을 선사합니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재난영화. 바로, 아마겟돈(Armageddon)(1998)딥 임팩트(Deep Impact)(1998)입니다.

 

지구를 박살낼 만한 위력의 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한다면?(사진: 네이버 영화)
지구를 박살낼 만한 위력의 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한다면?(사진: 네이버 영화)

두 영화는 모두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는 행성이 지구를 향해 달려오고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가오는 행성을 파괴시켜야만 한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줄거리 자체는 굉장히 유사하지만, 영화의 내용이나 방향은 극명하게 다릅니다.

세계적인 SF영화 감독이자 폭파광으로 불리는 마이클 베이가 연출한 '아마겟돈'은 과학적인 고증과 현실성보다는 흥행에 초점을 맞춘 블록버스터 영화입니다. 우주여행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온 굴착 전문가 해리(브루스 윌리스 분)와 그의 팀이 행하는 고결한 희생을 통해 감동을 극대화하며 영웅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반면 '딥 임팩트'는 인간이 혜성 충돌의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하는 모습이 아닌, 지구멸망의 상황에 놓인 인간들의 심리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마겟돈에 비해 전개의 속도가 느리고,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볼 부분은 더 많죠. 종말을 앞둔 불안감과 희망이 좌초되었을 때 느끼는 깊은 절망감 같은 것들 말입니다. 어쩌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상황 속에서 인간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재난영화의 진정한 매력 아닐까요?

두 작품은 모두 '종말을 맞이한 인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인류가 미처 경험하지 못한 결과에 대한 불안과 긴장, 죽음을 앞둔 상황 속에서 꽃피거나, 져버리는 인류애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90년대의 종말론들은 전부 해프닝으로 끝나고, 2000년대를 맞았죠. 하지만 당시 영화를 보면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만약 정말로 종말을 앞둔 상황이었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이에 대한 대답이 극명하게 갈리는 영화들. 그 대립을 보는 것이 90년대 재난영화를 보는 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0년대, 지구온난화 대두와 <투모로우>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설렘도 잠시, 2001년은 세계적으로 충격적인 해였습니다. 911, 항공기를 납치한 테러범들은 동시다발적으로 미국의 중심지, 뉴욕에 테러를 가했습니다.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 는 속수무책으로 쓰러졌죠. 끔찍한 참사였습니다.

 

(사진: ABC News)
(사진: ABC News)

테러에 대한 충격과 그 여파는 재난영화 영역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재난영화는 테러리즘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금기시되었죠. 특히 <타워링>같은 소재의 사회적 재난을 그린 영화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재난영화의 소재는 이제, 사회재난이 아닌 자연재난이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의 요구에 재난영화는 잘 적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재난영화는 당시 사람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환경문제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바로 지구온난화입니다. 사람들은 90년대 종말론의 열기를 그대로 지구온난화에 이식시켰습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문제들이 당장이라도 세상을 덮쳐 다시 한 번 세기말의 공포심을 그대로 재현할 것만 같았죠.

 

1800년대 이후 출간된 책에 ‘global warming’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빈도(출처: 구글 엔그램뷰어)
1800년대 이후 출간된 책에 ‘global warming’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빈도(출처: 구글 엔그램뷰어)

실제로 지구온난화는 2000년대 초반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1800년대부터 현재까지 나와있는 1000만 권의 책을 데이터화 한 구글 엔그램뷰어를 보면 지구온난화라는 단어가 책에 언급된 횟수가 2000년대 들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세계의 우려에 기름을 부은 것은 아마도 이 영화, <투모로우>일 겁니다.

 

(사진: 네이버 영화)
(사진: 네이버 영화)

<투모로우>는 급격한 기후변화에 따른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기 시작하고, 해류의 흐름을 바꿔 지구에 다시 빙하기가 찾아온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지구의 북반구가 우선적으로 빙하에 뒤덮이자 미국 정부는 북쪽에 사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남쪽으로의 대피령을 내립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 북부 지역인 뉴욕에 고립된 주인공 의 생존기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죠.

영화 <투모로우><고질라> <인디펜던스 데이> <2012> 등을 만든 '재난영화 중독자'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작품으로, 당시 54천만 달러(한화 약 6천억 원)라는 폭발적인 흥행실적을 올렸습니다. 한국에서도 크게 흥행했는데, 당시 초등학교에서는 <투모로우>를 지구온난화에 대한 교보재(?)로 활용할 정도로 많은 인기를 끌었었죠. 영화의 흥행을 이끈 요인 중 하나는 발전한 CG기술이었습니다. 초거대 해일이 뉴욕을 덮치고, 빙하가 도시를 순식간에 얼려버리고, 수박 만한 우박이 떨어지며 거리를 초토화시키는 장면은 이전의 재난영화들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시각적 쾌감을 제공했죠. 이처럼 2000년대에 탄생한 재난영화들은 시각적인 강렬함을 쌓아올려 자연재해를 말 그대로 '스펙타클'하게 표현했습니다. 스크린 안에서 관객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는 재난은 실제적인 위압감을 뿜어냅니다. 2000년대는 본격적으로 자연재해의 표현이 거대해지는 시기이죠.

 

영화 '투모로우'에서 표현된 도심의 혹한(사진: 네이버 영화)
영화 '투모로우'에서 표현된 도심의 혹한(사진: 네이버 영화)

표현은 다양했지만,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였습니다. 환경파괴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지구온난화입니다. 자연을 개척하고, 제 입맛에 맞게 바꿔가며 발전을 이룬 인류는, 무분별한 발전에 대한 반작용과 같은 '지구온난화'를 겪게 됩니다. 그리고 지구온난화는 다양한 재난들을 초래하죠. 자연을 파괴하며 쌓아올린 문명의 도시를 거대한 자연이 덮치는 상상, 이로 인해 모든 것이 파괴되는 상상은 인류가 발전해 온 과정을 되돌아보는 것과 같습니다. 21세기의 재난영화에는, 새로운 세기를 맞는 기쁨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인류가 새로운 세기를 맞이할 자격이 있는지 돌아보는, 성찰의 질문이 담겨있죠. 영화가 끝날 즈음, 우리는 스스로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지구에 적합한 생물일까?"

 

2010년대, 바이러스의 시대

2010년대에 들어오면, 자연재해를 소재로 한 재난영화는 그 자체로 개성을 잃습니다. 백 년이 넘게 다뤄온 소재에 대한 식상함이 극에 달한 것이죠. 관객들은 이제 비슷비슷한 자연재해에 신선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제 재난영화는 두 갈래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당대의 CG기술을 집약해 재해의 시각적 효과를 말 그대로 '극대화'하거나, 새로운 재난의 모습을 그리거나.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2010년대의 재난영화 (사진: 네이버 영화)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2010년대의 재난영화 (사진: 네이버 영화)
새로운 재난, '바이러스'를 그리는 2010년대의 재난영화 (사진: 네이버 영화)
새로운 재난, '바이러스'를 그리는 2010년대의 재난영화 (사진: 네이버 영화)

그중 한 갈래인 새로운 재난에 대한 영화가 2010년도부터 펼쳐집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이러스'입니다. <월드워Z><부산행> 등이 바로 그런 영화들입니다. 두 영화는 모두 소리없이 생명을 앗아가는 사회적 재난, '전염병'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두 영화는 모두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인해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한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월드워Z>는 은퇴한 UN소속 조사관 '제리(브래드 피트 분)'가 가족들을 지키고, 인류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바이러스의 중심지로 향하는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는 영화이죠. 반면 국내에서 개봉한 <부산행>'부산으로 향하는 열차'라는 고립된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물들을 그립니다. 원인은 역시 바이러스죠. 2010년대는 바야흐로 바이러스의 시대입니다.

 

물론 바이러스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존재했지만, 2010년대는 유독 전염병이 눈에 띄는 시기였습니다. 2010년을 맞이하기 직전인 2009, '신종플루'라고 불렸던 '신종인플루엔자(A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변이를 일으켜 생긴 새로운 바이러스)'가 크게 유행하며 100개 이상의 국가에서 13만 명 이상의 감염자와 8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켰습니다. 신종플루가 잦아들 즈음에는 신종플루보다 더 독한 호흡기증후군 '메르스(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 MERS)’가 발생했죠. 2015년 국내에서 첫 메르스 환자가 발생한 이후 약 7개월 동안 186명이 감염되었고, 38명의 사망자를 냈습니다. 치사율은 무려 20%에 달합니다.

2010년대의 재난영화에는 이런 공포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는 마치 막다른 골목 같습니다. 자연재난의 공포에서 벗어나나 싶었지만, 또 다른 국면의 재난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 점에서 어쩌면, 2010년대의 재난영화는 어떠한 장르보다도 더 많은 양의 '공포'를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떠한 재난과 재해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존재, 인간의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그런 공포 말이죠.

 

2010년대 재난영화에는 인간의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공포가 존재한다.(사진: 네이버 영화)
2010년대 재난영화에는 인간의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공포가 존재한다.(사진: 네이버 영화)

지금까지 2회차에 걸쳐 1930년대부터 2010년까지, 과거의 재난영화들을 훑어보며 소재의 변천사를 짚어보았습니다. 재난영화는 정말로 많은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과거의 인류가 겪은 고통과 불안, 그 안에서 새로이 꽃피는 희망과 설렘, 스스로를 돌아보는 성찰까지 말이죠. 이제 우리는 재난영화를 볼 때 단순한 흥행공식이 아닌, 다채로운 소재 속에 담긴 함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재난영화는 전혀 뻔하지 않은 것이죠. 뻔하디 뻔한 하루를 보낸 오늘 밤, 마음에 드는 재난영화 한 편을 골라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본 콘텐츠는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 공식블로그에 공동 게재되었습니다

 

필자소개
이지섭

미스터빈 닮은 꼴. 멍청한 글을 멀쩡하게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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