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말고 히든밸리’ 기업가 정신 움트는 이색 지대
혁신 사각지대의 창업교육 현장 분석
‘실리콘밸리 말고 히든밸리’ 기업가 정신 움트는 이색 지대
2021.02.22 13:18 by 최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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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서쪽 구석에 자리한 이스라엘은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창업국가다. 인구 1인당 창업 비율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 이스라엘 스타트업들이 지난 1월 한 달 동안 투자받은 금액은 약 1조6000억원. 국내 Top10 스타트업들이 지난 1년 간 투자 유치한 총액(1조1440억원)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여러 비결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게 생뚱맞게도 ‘군대’다. 우리나라처럼 의무복무를 해야 하는 이스라엘에서 군대는 최고의 인큐베이터다. ‘탈피오트’, ‘시모네 메타임’ 같은 이공계 엘리트 장교 육성프로그램을 필두로, 군 생활 내내 전문적이며 집중적인 창업 교육이 이뤄진다. 그 사이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은 자연스레 창업가 정신, 리더십, 팀워크로 중무장된다. 그들에게 군대는 문자 그대로 창업 최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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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 퀜틴 주립 교도소(San Quentin State Prison)는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교도소’라는 기록보다 가치 있는 사연을 품고 있다. 창업 교육을 통해 재소자의 재기를 돕는 ‘라스트마일(The Last Mile)’ 프로그램 덕분이다. 갱단 활동을 하거나 마약에 손을 대다 옥살이를 하던 수감자들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기술을 배우고 창업에 도전한다. 굳은 의지로 인생 2막을 연 이들은 한 명 한 명이 희망의 증거가 되어 후배들을 독려한다. 전과자 꼬리표 대신 집어든 기술자 명함은 그 자체로 사회적응의 완성을 의미한다. 프로그램을 수료한 출소자 중에 재수감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캘리포니아 주의 평균 재범률이 60%가 넘는다는 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기적적인 결과다. 

 

기업가 정신은 어느 곳에서라도 폭발할 수 있다.
기업가 정신은 어느 곳에서라도 솟아날 수 있다.

| 뜻과 열정 있는 곳에 세워진, 신개념 비즈니스 모델하우스
스타트업은 도전의 다른 이름이다. 도전에 별다른 자격이 필요치 않은 것처럼 스타트업 역시 누구에게나 열린 문이다. 삶이 정체되거나 단절된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도 창업은 새로운 기회다. 인생에서 가장 빠릿빠릿한 시기를 저당 잡힌 군인들, 한 번의 실수로 사회에서 격리된 수감자들, 냉엄한 현실 앞에 좌절한 폐업자들, 육아에 밀린 꿈을 아쉬워하는 경단녀들까지… 그들에게 창업교육과 창업활동은 다시 세상 앞에 당당히 서겠다는 선전포고다. 

“깜짝 놀랐어요. 그냥 직업교육 수준일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창업 의지가 대단하더라고요.”

윤정현 영남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난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수형자 실전창업교육’ 현장을 또렷이 기억했다. 의아함으로 시작했던 교육이 놀라움으로 바뀐 건 수감자들을 직접 만나면서부터였다. 사회 적응에 대한 의지가 고스란히 교육에 대한 열의로 나타났다. 윤 교수는 “실제로 출소 후 투자 연계에 대한 노하우를 묻는 분들도 많았다”면서 “공간과 정보의 제약 등 어려운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임하는 자세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화성직업훈련교도소와 청주교도소를 무대로 진행된 해당 창업교육은 교정본부와 창업진흥원 간의 협업사업으로 푸드테크, 전기‧전자, 컴퓨터프로그래밍 등의 직업훈련을 받는 모범수형자 30명을 엄선하여 시범적으로 진행된 프로그램이었다. 시공간의 특수성 탓에 체계적이며 연속적인 교육보다는 소수정예를 대상으로 한 멘토링의 성격이 강했던 활동. 하지만 관계자들은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고 입을 모은다. 당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교도소 내 한 간부는 “요즘 재소자들은 창업이 세계적인 유행이자 흐름이란 걸 잘 알기 때문에 그만큼 의욕과 관심이 많다”면서 “그런 바람이 교도소 내 직업훈련의 범위를 넓혀주는 선순환 효과를 만들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도전과 인내, 리더십과 팀워크를 길러주는 창업교육은 최적의 재사회화 교육이 되기도 한다.
도전과 인내, 리더십과 팀워크를 길러주는 창업교육은 최적의 재사회화 교육이 되기도 한다.

국방의 의무는 신성한 것이지만, 적어도 국내 젊은이들에게 군대는 ‘멈춰버린 시간’의 이미지가 강하다. 입대에 흔히 따라 붙는 ‘재충전’이란 말 자체가 생산성의 부재를 인정하는 셈이다. 2016년부터 시작된 ‘국방 스타트업 챌린지’는 기존 군복무의 이미지를 180도 바꾸는 동시에, 우리 미래를 이끌 청춘들의 잠재력과 기업가 정신을 함양하겠다는 포부로 진행됐다. 국방부 주최, 사단법인 스파크(Spark) 주관, 육해공군‧해병대 및 KT&G가 후원하는 형태로 이뤄지는 해당 프로그램은 청년 창업을 위한 사전 교육과 실질적인 창업 아이디어의 발굴·공유 등 창의적인 체험으로 꽉 채워져 있다. 첫해 805개 팀을 시작으로 지난해 역대 최대인 940개 팀이 참가하는 등 지금까지 3666개 팀이 나서 군인정신을 기업가정신으로 승화시켰다. 올해부터 ‘찾아가는 군 창업동아리 멘토링’ 프로그램도 신설하는 등 외연을 더욱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이 프로그램의 주관사인 사단법인 스파크의 민영서 대표는 “국방 스타트업 챌린지는 결과보단 과정을 중요시하는 활동”이라고 강조한다. 출범 5년 만에 ‘링티’나 ‘스타스테크’ 같은 유망 스타트업을 배출하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란 얘기다. 민 대표는 “우리 프로그램의 목표는 군 장병들이 전역 후의 삶에 대해 스스로 진단하고 준비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라며 “창업을 위한 마인드와 기초체력을 기르는 시간을 통해 전역 이후의 삶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 믿는다”고 힘줘 말했다. 

 

지난 2019년 '국방스타트업 챌린지’ 프로그램 진행 모습(사진: 스파크)
지난 2019년 '국방스타트업 챌린지' 프로그램 진행 모습(사진: 스파크)

이 밖에도 코로나19국면에 떠밀려 위기에 봉착한 폐업자들을 대상으로 중소벤처기업부가 진행하는 ‘희망리턴패키지 사업’이나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엄마들에게 새 희망을 제공하기 위해 구글 스타트업 캠퍼스가 펼치고 있는 ‘엄마를 위한 캠퍼스’ 프로그램 역시 사그라질 뻔했던 뜻과 열정이 다시금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는 우리네 창업 생태계의 히든밸리다. ‘엄마를 위한 캠퍼스’를 통해 육아 솔루션 서비스 기업 ‘그로잉맘’을 창업한 이다랑 대표는 “지금의 사업 모델은 오랫동안 마음속에만 품고 있었던 아이디어였다”면서 “프로그램을 통해 접했던 다양한 선배 창업가들의 강의와 멘토링, 그리고 동료 창업가들의 응원이 내 꿈에 날개를 달아줬다”고 말했다.  

 

| somewhere special? something special! 
군대나 감옥마저 ‘코워킹 스페이스’ 삼아야 했던 그들의 행보는 그 자체로 특별하다. 그리고 그 특별한 상황과 경험이 오롯이 비즈니스에 녹아들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윤정현 영남대 교수가 ‘2020 수형자 창업경진대회’ 심사위원을 보며 가장 감탄했던 사업계획서가 공기정화 기술을 다루는 비즈니스 모델이었다는 점은, 교도소같이 좁은 실내 공간의 공기질 문제와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엄마가 선택한 비즈니스 모델은 아이러니하게도 육아 서비스였다.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가 일상에서 숱한 고민들을 겪지만, 그에 대한 맞춤형 솔루션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는 게 비즈니스의 시작점이었다. 이다랑 대표는 이러한 부모들의 현실과 고민을 반영해,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와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온라인으로 연결하는 플랫폼인 '그로잉맘'을 탄생시켰다. 상담사 출신인 이 대표의 전문성과 실제 아이를 키웠던 엄마로서의 진정성이 만난 결과다. 

 

그로잉맘은 육아와 관련, 고객이 가진 특성과 고민의 종류 등을 파악해 전문가에게 빠르고 정확하게 연결하는 시스템을 갖췄다.(사진: 그로잉맘)
그로잉맘은 육아와 관련, 고객이 가진 특성과 고민의 종류 등을 파악해 전문가에게 빠르고 정확하게 연결하는 시스템을 갖췄다.(사진: 그로잉맘)

‘국방 스타트업 챌린지’의 최고 아웃풋이라 일컬어지는 링거워터 ‘링티’ 역시 군대 내 경험에 빚을 지고 있다. 혹한기 야외 훈련 중 탈진한 장병들을 위해 처방용으로 가져간 링거가 자주 얼어 버리자, 담당 군의관이 손쉽게 마실 수 있는 ‘경구용 수액’을 고민하던 차에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링티의 시발점이었다. 지난해 미국‧캐나다에 상표권을 출원하고 매출 70억원을 기록하는 등 친환경 제설제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스타스테크는 겨울 군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설작업이 실마리를 제공했다. 제설제 때문에 녹슨 차량을 보고, 부식을 억제하는 성분을 활용해보자던 한 사병의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삽질’ 끝에 얻은 쾌거다. 

전문가들은 “상황과 특성을 무시한 창업교육 만능론은 경계할 필요도 있다”고 조언한다. 교도소는 사회격리 및 교정‧교화기능이 최우선이고, 국방의 의무를 허투루 여기는 군은 존재의 이유가 없다는 논리다. 육아 역시 세상 무엇보다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이다. 창업교육은 결국 씨 뿌리기다. 출소 후, 전역 후, 양육 후 메마른 땅에 대한 준비다. 이스라엘이나 핀란드 같은 나라의 젊은이들이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건 그 땅이 기름지기 때문이다. 최근 ‘청소년 비즈쿨’ 같이 고교생을 위한 창업 조기교육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소식은 그래서 더 반갑다. 

 

필자소개
최태욱

눈이 보면, 마음이 동하고, 몸이 움직이는 액션 저널리즘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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