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빨리’ 사회에 느림의 미학 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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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 사회에 느림의 미학 선사하다
‘빨리빨리’ 사회에 느림의 미학 선사하다
2015.09.20 22:54 by 조철희

치열한 세상이다. 부대끼며 살다 보면 한 번씩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된다. ‘이게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이 물음에 응답한 사람들의 스토리다. 누군가는 창업을 했고, 어떤 이는 공방을 열었다. 무작정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고 갈 길은 멀다. 제대로 구조를 갖추지 못해 고군분투하기 일쑤다. 그래도 고무적인 건, 이들 모두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는 점이다. ‘언더 스탠드 에비뉴(Under Stand Avenue)’는 이들의 꿈을 응원하는 공간이다. 롯데면세점이 문화예술사회공헌네트워크‧성동구청과 함께 꾸려가는 사회공헌 창조공간으로, 우리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혁신기업가‧예술가‧비영리기획자 등이 함께한다. 더퍼스트는 이들의 도전이 활짝 꽃피우는 그날을 기대하며 ‘변화를 만나다’ 시리즈를 연재한다.

 세상을 담는 그릇 ‘공기’

 “현대사회는 너무 바빠요. 많은 걸 놓치고 살죠. 가족을 위한 한 끼 식사나 추억이 어린 물건 같은 것들 말이에요. 우리 제품이 소중한 걸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윤하나(37) ‘공기핸디크래프트(GONGGI·이하 공기)’ 대표의 말이다. 지난 3월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문을 연 공기는 볼(bowl)과 같은 식기류와 바구니, 테이블 웨어 등 리빙 소품을 판매하는 회사다. 이 회사의 물건은 모두 ‘물 건너’ 온 것. 공정무역(투명하고 공정한 방식으로 저개발국의 소규모 생산자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무역 방식) 기업을 표방하며, 인도네시아와 방글라데시에서 건너온 수공예품을 주로 취급한다. 모두 돌‧흙(세라믹)‧나무‧주트(Jute‧황마의 줄기에서 뽑아낸 섬유)와 같은 현지 재료를 활용해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제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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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퇴하는 전통공예, 어려워지는 생산자들의 삶

기업에서 홍보 일을 했던 윤 대표는 2009년 직장을 그만두고 네팔로 향했다. 한 NGO 단체의 자원봉사자로 그곳에서 1년여 간 머물렀던 것. 취미로 오랜 시간 도자기를 해왔던 그는 현지의 이국적인 수공예품에 매료됐다고 한다. 돌아와 다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동남아시아와 중남미의 저개발국가들을 여행했고, 다양한 수공예품 생산자들을 만나며 그들의 고충을 접했다. “급속도로 서구 문화가 유입되면서 현지의 고유문화는 크게 위협받고 있었어요. 점점 설자리를 잃어간다고 했죠. 전통적인 생산자들은 줄어들고, 그나마 남은 이들도 생계 문제에 맞닥뜨렸어요. 하지만 국제 NGO들의 구호활동이 그들에게까지 미치진 않았죠.”

과테말라 마야 원주민들이 천연 염색 재료를 손질하고 있는 모습. 전통을 이어가는 젊은이들이 점점 줄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윤 대표가 수공예품 공정무역 사업에 뛰어 든 이유다. 지난해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의 ‘청년등사회적기업가육성사업’ 4기에 선정되면서 본격적인 행보에 나섰고, 9개월 가량 저개발국 곳곳을 다니며 시장조사도 펼쳤다. 공기는 현재 인도네시아의 ‘미트라 발리 페어트레이드(Mitra Bali Fair Trade)’와 방글라데시의 ‘다카 핸디크래프트(Dhaka Handicrafts)’를 통해 제품을 들여온다. 이들은 세계공정무역기구(WFTO) 인증을 받은 단체로, 현지에서 소생산자 커뮤니티를 발굴하고 해외의 공정무역 소비자들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공정무역 제품, 다르게 흐르는 시간을 전해주는 매개체

윤 대표는 공정무역 제품을 구매하는 것을 ‘시간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제품을 통해 우리와는 다르게 흐르는 시간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호가니나무로 만든 그릇의 작업 모습(왼쪽)과 완성품의 모습(오른쪽). (사진: 공기 제공)

공기의 제품도 그렇다. 인도네시아의 마호가니나무로 만든 그릇이 좋은 예다. 이 그릇은 현지색이 돋보이는 패턴으로 겉면이 장식돼 있는데, 모두 코코넛 껍질 조각을 하나하나 박아 표현한 것이다. 겉을 부드럽게 마감하고 코팅해 건조하는 공정까지 합치면 그릇 하나를 만드는데 최소 일주일 이상 걸린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바구니도 마찬가지다. 열대지역에서 자라는 황마로 만드는데, 염색한 뒤 꼬아서 면사(綿絲)로 엮는 데만 꼬박 3일 이상 소요된다. 공기는 오는 10월에 새로운 제품 라인을 선보인다. 과테말라 마야 원주민들이 직접 짠 천으로 만든 생활소품이다. 다채로운 색감, 커뮤니티마다 다른 의미를 가지는 문양과 패턴이 특징이라고 한다.

과테말라 마야 원주민이 전통 방식으로 천을 짜는 모습. (사진: 공기 제공)
 협업 통해 경쟁력 키워야

커피, 의류 등 공정무역 제품이 하나, 둘 국내 시장에 진입하고 있지만 공기와 같이 생활 용품을 다루는 브랜드는 드물다. 윤하나 대표는 “직접 해보니까 왜 그런지 알 것 같다”며 어려움을 내비쳤다. 소규모로 제작되는 데다 부피와 무게가 많이 나가다 보니 물류비가 치솟았고, 운송 상의 실수도 잦았다. 소비자의 외면도 넘기 힘든 장벽이다. “일반 시장에선 게임이 안 되죠. 국내 소비자들은 대부분은 공산품이나 저렴한 수입산 제품에 익숙해져 있거든요. 제품의 가치나 의미보다는 제품 본연의 기능에 가중치를 두는 거죠.” 공기는 현지와의 적극적인 협업을 통해 국내 소비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는 제품을 선보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현지의 전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국내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잇는 형태와 색감 등을 찾아내려는 의도다. 공정이 길어지는 것도 그래서다. 제품의 샘플을 받고, 수정을 거듭하는 등의 과정을 통해 완제품이 나오기까지 통상 4~5개월이나 소요된다. 윤 대표는 “자주 소통을 시도하면서 ‘생산자들이 귀찮아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오히려 신뢰가 더 두터워지는 걸 느낀다”면서 “현지 디자이너들과 함께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방글라데시의 생산자들이 만드는 실린더 바스켓 (사진: 공기 제공)

윤 대표는 앞으로의 과제 중 하나로 “국내의 다른 공정무역 브랜드들과 협업하는 것”을 꼽았다. 다양한 카테고리의 상품을 취급하면서 몸집을 키우기 보다는 리빙‧패션‧커피 등 각 브랜드만의 전문역량을 키워 힘을 합치는 것이 상생의 길이란 것이다. “다양한 측면에서 협업을 고려하고 있어요. 현지에서 반제품을 들여오고 다른 브랜드와 결합해 콜라보레이션 제품을 내거나, 공기의 제품과 함께 패키징 상품을 출시하는 것 등이죠. 이미 유럽 같은 해외에서는 공정무역 단체들끼리 함께 제품을 만들거나 공동의 캠페인을 활발히 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공정무역 소셜벤쳐들이 등장하는 등 환경이 조성되고 있으니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기의 제품은 공기 온라인 스토어(http://www.gong-gi.com) 및 오프라인 매장과 페어트레이드 그루 온라인 스토어 및 안국점‧압구정점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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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조철희

늘 가장 첫번째(The First) 전하는 이가 된다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