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업무 문화차이, 직접 경험해보니…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업무 문화차이, 직접 경험해보니…
2021.08.24 18:00 by 최태욱

“그냥 제 오지랖이 넓었던 것으로 마무리되더라고요. 아쉬운 걸 넘어 뭔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어요.”

제조분야 대기업에서 근무하던 김지윤(가명)씨는 해외 유명 박람회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박람회 부스에 진열된 자사 제품이 수준 낮은 가품이었던 것. 김 씨는 “우리 브랜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만큼 민감하고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곧장 사내 이슈화하려 했지만, 놀랍게도 문제제기조차 쉽지 않았다. 해당 국가의 법인, 본사 홍보부서, 디자인 부서, 외주 광고기획사 등이 문어발식으로 엮여 있었기 때문. 이해관계자들이 눈치만 보는 사이 사안은 흐지부지됐다. “어디와는 좋은 관계가 유지되어야 하고, 누군가의 커리어에 흠집도 나면 안 되고… 크게 문제 삼지 말아야 할 이유가 굉장히 많았는데 모두 특정 조직을 위한 것 일뿐 ‘회사’를 위한 이유는 없었다”는 김 씨의 말에는 대기업 업무방식의 한계와 혁신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가 고스란히 숨어있다. 김지윤 씨가 현재 대기업이 아닌,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스타트업이 일하는 방식을 배우자!” 최근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오픈이노베이션을 논할 때 등장하는 단골 명제다. 스타트업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급변하는 시대의 물살에 올라탈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다른 걸까? 김지윤 씨처럼 대기업과 스타트업을 모두 경험한 사람들은 그 차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스타트업 열풍이 대기업의 업무 풍속도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스타트업 열풍이 대기업의 업무 풍속도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 일주일 vs. 하루… 속도의 차이가 혁신을 만든다 
대기업 출신의 김지윤 씨가 스타트업을 창업하며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은 바로 속도다. 군더더기 없이 민첩한 업무 방식 도입에 사활을 걸었고, 나름 성공적이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이는 대기업의 기준이었을 뿐이다. 유명 스타트업 출신의 직원들이 합류했는데, 그들 입에서 나온 첫 건의사항은 바로 “의사결정이 조금 느린 것 같다”는 말이었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속도 차이를 확연히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대기업 전략부서에서 일하다 스타트업 씬으로 넘어온 박민성(가명)씨는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각 조직의 업무와 이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복잡해요. 전담 조직의 의사결정 프로세스뿐만 아니라, 타부서의 C레벨(부문별 책임자)까지 보고가 들어가야 하죠. 이런 보고는 모두 문서화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해와 설득을 위한 문서작업이 필요하고, 보고를 위한 스케줄링도 다 따로따로 해야 하죠. 경험상 2주 이상 소요되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C레벨과 바로 소통이 가능한 스타트업에선 이틀이면 가능하죠.”

순탄하게 흘러가도 4~5배의 속도 차이가 나는데, 그 과정에 여러 복병도 숨어있다. 대기업 광고부서에서 근무하다 창업한 심인우(가명)씨는 “의사결정을 위한 수많은 단계에 각각 정치적 문제나 예산의 문제, (책임자) 취향의 문제까지 다양한 걸림돌이 있었다”면서 “심지어 평소 관계가 좋지 않거나, 경쟁하는 부서의 업무를 제쳐두는 식의 비상식적인 상황도 경험했다”고 덧붙였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존재 가치와 방향성을 생각하면, 두 조직의 속도 차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느리다는 것과 꼼꼼하다는 것, 빠르다는 것과 성급하다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하지만 이 ‘느림’이 안정성을 담보하는 데 기여하는 ‘정효과’보다 의욕과 추진력을 낮추는 데 기여하는 ‘부효과’가 크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여러 대기업에서 활약한 경험을 밑천으로 스타트업 필드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상재(가명)씨는 “대기업 업무 프로세스는 결국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길들여진 구성원들 역시 철저히 그 속도에 맞춰가며 자신에게 올 리스크를 줄이려 한다”고 지적했다. 그 속도에 순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 씨는 “가끔 대기업 내 TF 등 임시조직이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 때 (타 부서에서)부담스러워하거나 귀찮아하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도 느린 속도에 적응해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험자들이 말하는 대기업-스타트업 업무의 가장 큰 차이는 ‘속도’다
경험자들이 말하는 대기업-스타트업 업무의 가장 큰 차이는 ‘속도’다

| 지금 당신은 사랑하고 있습니까?
업무에 가속페달을 밟으려면 몇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한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야 하고, 실패를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미쳐야 한다’는 것 역시 그렇다. 반대로 업무가 차일피일 미뤄지게 되면 일에 대한 열정은 점점 희석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로부터 동기부여와 업무 추진력의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김지윤 씨는 “실무자 입장에서 신속한 업무추진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매우 서둘러서 업무를 진행했는데, 윗선에서 이유 없이 의사결정이 늘어지는 바람에 김이 새고 맥이 빠졌던 경우가 꽤 있다”고 했다. 이런 일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이 업무가 우리 회사에게 정말 필요한 일인가?’, ‘나만 이렇게 서두른다고 되는 게 아닌가?’는 부정적 인식이 생기고, 최악의 경우 ‘나 하나쯤 태업을 해도 괜찮은 것인가’하는 무기력증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박민성 씨 역시 “대기업 조직의 빡빡한 보고체계와 R&R 간의 이해관계를 한두 번 경험하게 되면, 새롭거나 전향적인 태도로 업무를 대하는 것을 꺼리게 되고 점점 수동‧방어적으로 변해간다”면서 “개인적으로도 이미 높은 시장점유율을 가진 브랜드에서 그 점유율을 유지하는 전략에만 집중했었는데, 이는 결코 피가 끓는 성격의 일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리액션’에만 힘을 쏟다보면 자연스레 ‘액션’은 약해진다. 심인우 씨는 “큰 조직에 있다 보니 어느새 정해진 업무만 반복하는 느낌이 들고, 자연스레 업무에 대한 열정이나 즐거움도 조금씩 사그라졌다”고 토로했다. 결국 자신의 일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는가에 대한 담론으로 확장된다. 대기업의 특성상 스타트업처럼 ‘오너십’을 갖고 일하는 것은 무리지만,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애정 유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사의 경쟁사 제품을 애용하는 자사 임직원들에게 굳이 이를 자제하는 문화까지 만드는 대기업과 우리 것이 세상 최고라는 ‘근자감’을 피로회복제 삼는 스타트업의 차이는 고스란히 업무 추진력으로 나타난다. 스타트업이 시장과 고객의 변화를 예민하게 캐치하고 이에 민감하게 대응할 수 있는 이유는 시장과 고객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제품(및 서비스)를 사용하는 시장과 고객을 사랑해서다. 

 

야근과 밤샘으로 대표되는 스타트업의 열정과 추진력은 자사 제품 및 서비스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나온다
야근과 밤샘으로 대표되는 스타트업의 열정과 추진력은 자사 제품 및 서비스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나온다

| 안전성‧사업성‧지속가능성…스타트업도 숙제는 많다. 
유경험자들을 통해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업무 차이를 논했지만, 이는 오롯이 ‘혁신’이라는 관점에만 초점을 맞췄을 때 얘기다. 세상이 워낙 급변하는 시기라 혁신이 부각되고 있지만, 대기업의 보수성과 안전성 역시 결코 저평가할 수 없는 비즈니스의 가치다. 박민성 씨는 “정반대의 속성일 뿐, 우열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면서 “대기업들 사이에서 스타트업 열풍이 불고 있지만, 이를 통해 더 오래 살아남을 이들이 대기업이란 건 우리 모두가 안다”고 했다. 

스타트업이 좋아 대기업을 떠난 이들도 혁신으로만 치닫는 스타트업의 ‘직진성’을 경계하는 한편, 대기업을 닮아가야 할 것들도 많다고 입을 모았다. 이상재 씨는 “최근 이커머스 스타트업들이 적자 상황에서도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쓰는데, 사업지속성을 생각하는 대기업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면서 “이젠 스타트업들도 확장성 못지않게 사업성을 생각해야할 시점”이라고 했다. 김지윤 씨는 “스타트업의 가장 큰 애로사항이 ‘규제’이니 만큼, 이에 대해 보다 전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 씨는 이어 “내‧외부의 법무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초기부터 규제에 대해 신중하고 밀도 있는 접근을 해나는 대기업의 일처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대기업과 스타트업 간 뚜렷한 차이가 존재하는 만큼, 자신이 어느 조직 성향에 맞는지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상재 씨는 “해결사 스타일은 스타트업, 안전 제일주의는 대기업에 적합한 인재상인데, 만약 그 반대쪽에 몸을 담게 된다면, 아마도 생지옥이 따로 없을 것이다”라며 웃어보였다.  

 

필자소개
최태욱

눈이 보면, 마음이 동하고, 몸이 움직이는 액션 저널리즘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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