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우주”…외계와의 소통 준비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아트 인 메타버스’展 언해피서킷 작가 인터뷰
“응답하라, 우주”…외계와의 소통 준비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2022.03.15 15:34 by 최태욱

[Artist in METAVERSE]는 예술과 기술을 융합하는 아티스트를 발굴‧육성하는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스타트업 ‘아츠클라우드’ 주최의 ‘아트 인 메타버스’(5월 31일까지, 성수동 언더스탠드에비뉴)展 참여 작가를 소개하는 연재 시리즈입니다. 

“사는 동안 정신 못 차릴 정도로 푹 빠졌던 게 여럿 있었어요. 어릴 때 SF물이 그랬고, 학창시절엔 과학이 그랬죠. 미술, 음악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것들이 현재 저의 작업에 조금씩 녹아 있는 것 같아요. 한데 어우러져 ‘미지에 대한 탐구’라는 주제로 진화된 셈이죠.”

언해피서킷 작가의 예술은 일종의 탐험이다. 미지의 세계, 그중에서도 인간 이외의 지적 존재들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을 원천으로 상상하고 탐구하며 표현한다. 그의 작업은 미지의 영역을 파헤치는 ‘탐험일지’나 다름없다.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천문학, 생물학, 데이터 과학, 언어학까지 공부하는 집요함에선 다재다능했던 고고학자 ‘인디아나 존스’마저 연상될 정도다. “인간 밖의 존재를 탐구하며 오히려 인간성의 본질을 깨닫고 있다”는 그는 이제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본다. 현재 그의 호기심이 머무른 무대는 지구 밖 광활한 곳, 바로 ‘우주’다.

 

언해피서킷(사진) 작가
언해피서킷(사진) 작가

| ‘범생이’ 과학도의 일탈, 늦바람 타고 예술로…
언해피서킷 작가의 소싯적 꿈은 과학자였다. 꼬마 시절부터 접했던 SF(science fiction)물의 영향을 듬뿍 받았다. 공상과학을 다룬 것이라면 영화, 소설, 만화를 가리지 않고 흠뻑 빠져들었다. 영화 속 세계관, 소설 속 캐릭터는 어떤 상상이든 가능케 했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상력은 그의 유년시절을 보다 풍요롭게 했다. 

“태생적으로 미지의 것들에 대해 열광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아요. 영화 속에 얘깃거리가 너무 재밌어서 그 이후의 스토리를 만화로 그려보기도 했죠. 조악한 만듦새였겠지만, 당시는 나름 진지했겠죠?(웃음)”

당연히 장래희망은 과학자였다. 자연스레 이공계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대학 전공도 물리학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로봇이라도 만들 기세였던 과학 꿈나무는 돌연 방황의 시기를 마주했다. 늦은 사춘기, 학교 부적응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본질은 하나였다. 그 옛날 SF물에 열광하던 때처럼, 과학이나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해피서킷 작가는 “전공자가 된 이후 접한 과학은 너무 따분했고 그렇게 생각할수록 ‘세상엔 훨씬 더 재밌는 게 많다’는 갈증만 심해졌다”면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대로 한번 놀아보지도 못한 범생이에게 찾아든 늦바람 같은 것”이라고 회상했다. 

 

대학시절 부침을 겪는 과정에서 예술의 세계로 입문하게 된 언해피서킷 작가
대학시절 부침을 겪는 과정에서 예술의 세계로 입문하게 된 언해피서킷 작가

과학을 버린 과학도가 새로이 찾은 ‘흥밋거리’는 음악이었다. 당시 국내를 강타했던 힙합 음악은 방황하던 청년의 탈출구가 되어 주었다. “뮤지션의 길을 걷겠다”며 휴학까지 감행했을 정도의 패기였다. 하지만 그의 ‘음악’이 취미 수준을 벗어나긴 힘들었다. 마음 맞는 동료도, 마땅한 멘토도 없었기 때문이다. 

“의욕만 앞섰던 거죠. 뭔가 하긴 해야겠는데 방법을 모르니까요. 어깨 너머로 배우는 것도 한계가 있고… 방구석에 장비 사모아 놓고 ‘뚱땅뚱땅’거리는 정도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음악 한다’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죠.(웃음)”

언해피서킷 작가의 20대 초반은 말 그대로 ‘언해피(unhappy)’하게 흘러갔다. 독학으로 익히던 음악은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했고, ‘내가 지금 뭐하지…’라는 회의감만 차곡차곡 쌓여갔다. 착실했던 아들의 일탈에 부모님과의 갈등도 늘어만 갔다. 음악을 탈출구 삼았던 선택 자체가 악수였던 건 아니다. 진지한 고민이 부족했고, 제대로 이끌어주는 사람도 없다보니 ‘그저 멋져 보이는’ 쪽으로 향한 게 문제가 됐다. 짧지 않은 방황의 시기를 겪으며, 보다 진지한 예술에 대한 고민과 각오가 다져진 이유다. 

 

| 멋짐에 성숙을 담으니 진짜 ‘예술가’되더라
어설픈 이중생활은 그를 과학도도 아니고 뮤지션도 아닌 ‘주변인’으로 만들었다. 헝클어진 삶을 바로잡기 위한 필요한 것은 선택과 집중이었다. 배수의 진을 치고 도전한 첫 번째 미션은 바로 미대 입시였다. 

“혼자선 안 된다는 걸 절감했어요. 아예 제대로 배워보자 싶었죠. 일단 입시 문턱을 넘어야 하는데, 미술만큼은 나름 자신감이 있었어요. 어릴 때 만화그리기가 취미이기도 했고… 미술 학원 몇 곳을 돌아보며 상담을 하곤, 바로 입시 준비에 돌입했죠.” 

1년여에 걸친 미대 입시 준비는 생각만큼 녹록치 않았다. 적지 않은 나이 탓에 늘 불안감과 씨름했고, 신랄한 비판으로 상처를 입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언해피서킷 작가는 “소위 ‘인생의 쓴맛’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던 시간”이라고 회상했다. 

우여곡절 끝에 다다른 변곡점은 금속공예를 전공하는 미대생으로서의 삶이었다. 전공자로서 대하는 예술은 이전과 사뭇 달랐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 가’에 머물렀던 그의 심상은 내가 ‘뭘 보여주고 싶은가’로 바뀌었고, 보다 진지한 사유까지 결합되며 예술적 성숙도를 영글게 했다. 이는 음악에도 큰 영향을 줬다. 패기와 겉멋을 동력 삼았던 그의 음악은 ‘자신을 오롯이 표현하는 소리’를 찾는 과정으로 바뀌었다. 2014년 발매된 그의 데뷔 앨범 <Just Waiting for a Happy Ending>은 그런 탐구 과정이 농축된 결과물이었다. 

 

언해피서킷 작가의 오디오비주얼 퍼포먼스 ‘Music of Memories’(2017). 전자음악 장르의 첫 앨범 발매는 그와 미디어 아트 씬을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언해피서킷 작가의 오디오비주얼 퍼포먼스 [Music of Memories](2017). 전자음악 장르의 첫 앨범 발매는 그와 미디어 아트 씬을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언해피서킷 작가의 첫 앨범은 노이즈를 활용한 전자음악 장르였다. 덕분에 마주하게 된 새로운 세상이 바로 ‘미디어 아트’ 분야다. 언해피서킷 작가는 “앨범 발매 이후 국내 언더그라운드 전자음악 씬에서 3년 정도 활동했는데, 그 씬에 음악과 비주얼을 활용해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유독 많다는 걸 발견했다”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종류의 예술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금세 빠져들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미디어 아트가 표현하는 다양한 비주얼과 기상천외한 이야기는 언해피서킷 작가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SF, 과학, 미술, 음악 등의 키워드를 공유하는 만큼, 마치 고향에 온듯한 친근함마저 느껴졌다. 그런 시너지가 작업을 재촉했고, 이내 결과로 나타났다. 2017년 ‘젊은 공연예술창작자 인큐베이팅 쇼케이스’(국립아시아문화전당)를 시작으로 지난해 ‘ZER01NE 2021 Alumni’(현대자동차)까지 수많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정됐고, 17회에 이르는 개인‧단체 전시에 참여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력을 뽐냈다. 길 찾기에 서툴러 이리저리 방황했고, 의욕만 앞서 넘어지는 일도 잦았지만, 결국에는 제 갈 길을 찾은 셈이다. 언해피서킷 작가가 지금 걷고 있는 ‘미디어 아티스트’로서의 길 말이다. 

 

2019년 언해피서킷 작가가 발표한 인공지능 요리 퍼포먼스 [Learning About Humanity]
2019년 언해피서킷 작가가 발표한 인공지능 요리 퍼포먼스 [Learning About Humanity]

| 고래에서 외계인까지…“미지(未知)야, 반갑다!”
예술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복잡했지만 이후의 행보는 보다 심플하다. 작가로 나선 이후 줄곧 미지의 존재에 관심을 갖고, 그들을 탐구하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고수한다. 2019년에 발표한 두 개의 작품 <Learning About Humanity>와 <A Synthetic Song Beyond the Sea>는 언해피서킷 작가의 작품 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각각 인공지능의 세계를 탐구하고, 흰 수염고래와 소통을 시도하는 예술 퍼포먼스였다. 

“작업 초기엔 인공지능에 집중했어요. AI기술이 인간성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다가 고래의 소리랑 인간의 음악을 합성한 사운드 아트 작업을 하면서 확실히 깨닫게 됐어요. ‘아…나는 미지의 존재를 알아가는 과정에 흥미를 느끼는 구나’라는 것을요.”

 

흰 수염고래의 발성과 인간의 음악을 합성하여 만든 앰비언트 음악 [A Synthetic Song Beyond the Sea], 2019
흰 수염고래의 발성과 인간의 음악을 합성하여 만든 앰비언트 음악 [A Synthetic Song Beyond the Sea], 2019

지난 2월 21일부터 성수동 ‘언더스탠드에비뉴’에서 열리고 있는 <아트 인 메타버스> 전시에서는 최근 언해피서킷 작가가 꽂혀 있는 미지의 존재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작품 ‘은하계 반대편으로부터의 메시지’는 무려 우주와 외계인에 대한 작가의 추적과 탐구를 담고 있다. 언해피서킷 작가는 “미지를 향한 집착이 우주까지 뻗어나간 것”이라고 너스레를 부리지만, 그 속내는 꽤나 진지하고 필사적이다. ‘A Letter Across the Stars’(2019), ‘한글로 쓰인 별 사이 쪽글’(2020), ‘한글로 쓰인 인터스텔라 메시지’(2021), ‘6개의 지구 언어로 쓰인 인터스텔라 메시지’(2021) 등 최근 3년 새 발표한 작품의 주제가 모두 ‘외계인과의 소통’을 주제로 했을 만큼, 긴 호흡으로 정성을 쏟는 프로젝트다. 

언해피서킷 작가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출발해 외계인과 소통하는 일련의 언어 체계를 구상하는 방식으로 확장되고 있다”면서 “궁극적으론 소통 체계를 확립하고 이를 관객들이 예술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점까지 도달해야 하는 만큼, 하나의 거대한 과정 중에 있는 프로젝트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MSSG68861111: 은하계 반대편으로부터의 메시지, 2021
[MSSG68861111: 은하계 반대편으로부터의 메시지], 2021

이번 <아트 인 메타버스> 전시 출품작 ‘은하계 반대편으로부터의 메시지’는 지난 2021년 현대자동차 ‘ZER01NE’ 지원을 받아 만든 AR설치물을 NFT버전으로 리뉴얼한 작품이다. ‘Max/msp’라는 프로그래밍 툴을 활용해, 기존에 완성된 이미지를 비디오와 사운드가 결합된 영상물로 재탄생시켰다. 제목만 보면, 줄곧 외계인과의 소통을 도모하려던 작가의 시도가 연장된 것으로 느껴지지만, 메시지의 결은 약간 다르다. 

“처음 접하는 관객들은 ‘외계인이 보낸 메시지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제목이 그러니까요. 근데 막상 비주얼을 보면, 누가 봐도 지구이고 우리 모습이거든요. 그때 작은 반전이 일어나죠. 자신이 외계인이 되는 거예요. 은하계 너머 지구에서 보낸 메시지를 바라보는 외계인의 관점으로 바뀌는 거죠.”

 

| “외롭지만 끝까지…” 의미 있는 작업하는 창작자 되고파
언해피서킷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조금은 외로운 일”이라고 귀띔한다. 다소 특이한 주제를 다루는 만큼, 의견을 공유하고 마음을 나눌 사람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메타버스나 NFT처럼 최근 핫한 키워드들과 거리가 있는 만큼, 소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적지 않다. 작업 과정에 수반되는 공부량이 방대한 것도 고립감을 부추긴다. 지난해 ‘6개의 지구 언어로 쓰인 인터스텔라 메시지’를 준비할 때는, 인류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외계 문명에게 전달키 위해 메콩 5개 국어(버마어‧라오어‧태국어‧크메르어‧베트남어)를 따로 공부했을 정도다. 

 

[6개의 지구 언어로 쓰인 인터스텔라 메시지], 2021
[6개의 지구 언어로 쓰인 인터스텔라 메시지], 2021

하지만 특유의 호기심과 창작열은 갖은 걱정거리를 짓누를 수 있을 만큼 묵직하다. 오히려 “어릴 때 나를 사로잡았던 주제들에 점점 가까이 가고 있다”는 기대감마저 내비친다. 그런 면에서 지난해 ‘A Synthetic Song Beyond the Sea’와 ‘6개의 지구 언어로 쓰인 인터스텔라 메시지’ 같은 작품들이 각각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주현대미술관에 소장된 것은 반가운 신호다. 대중과 동떨어져 있지 않은 작품이란 걸 인정받은 셈이기 때문이다. 이번 <아트 인 메타버스> 전시를 기획‧운영하는 ‘아츠클라우드’에게 거는 기대가 남다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언해피서킷 작가는 “예술에 대해 더 성숙해지고 싶다는 생각에 작업만 열심히 했을 뿐, 아트마켓에 대한 관심은 적었다”면서 “하지만 이젠 시장과 관객이 내 작업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할 시기가 됐고, 이에 대한 조언과 배움도 많이 얻고 싶다”고 설명했다. 

작가의 예명인 ‘언해피서킷’은 사실 좋은 뜻이 아니다. 데뷔 앨범 당시 음악의 분위기가 우울하고 처량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당시 작가의 심경을 대변하는 예명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이름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성숙한 창작자로 바로 섰다’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는 언제나 창작자를 꿈꿨고, 언해피서킷이란 이름표를 달았던 그 순간, 비로소 예술을 업으로 삼는 성숙하고 진지한 창작자로 자리매김했다. 

“저는 만드는 사람이잖아요. 무엇을 빚어내든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관객들에게도 그렇게 기억되고 싶죠. ‘그가 만든 건 크든 작든, 나름대로의 의미가 분명 했어’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행복한 작가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진: 언해피서킷 작가

 

필자소개
최태욱

눈이 보면, 마음이 동하고, 몸이 움직이는 액션 저널리즘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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