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한다는 것은 거주한다는 것.”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이다. 건축과 공간은 그만큼이나 중요하다. ‘미술관(박물관)’은 조금더 특별하다. 미술이란 ‘공간’을 담아내는 건축이면서, 정작 건축이 사유되지 않는 ‘공간’이다. 미술관의 벽•문•창문 등이 ‘말을 걸어오는’ 즐거움을 함께 느껴보자.
파아란 하늘이 빛나던 날, ‘미술관’에서 남자친구와 헤어졌습니다. 도심에서 보기 힘든, 느린 시간을 품었던 미술관이었죠.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지만, 그때 그와 함께 관람했던 작품들 역시 ‘이별’을 주제로 했습니다.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던 커튼, 그 사이로 언뜻 비추는 햇살,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선 말 없는 연인…. ‘미술관’이란 공간은 그렇게 서글픈 추억이 됐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미술관을 찾습니다. 애인과의 이별 후 홀로 설 수 있었던 그때처럼, 무엇이 됐든 ‘끝’을 내고 나를 다시 찾고 싶을 때, 가장 먼저 미술관이 떠오릅니다. 미술관에서 찾는 것… 모습은 다르지만 뜻은 같은 두 단어, ‘끝’과 ‘시작’ 입니다.
여기저기서 새해 인사가 들리던 지난 달, 두터운 점퍼를 입고 집을 나섰습니다.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mimesis art museum, 이하 미메시스)’에 가기 위해서죠.
경기도 파주시 문발로 253. 1400평에 공간에 4개 층 규모로 지어졌으며, 다양한 전시 공간이 하나의 덩어리에 담긴 설계로 유명하다. 출판과 건축, 예술의 만남 등 다양한 전시‧교육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mimesisart.co.kr, 031-955-4100)
미메시스는 포르투갈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알바루 시자(Alvaro Siza)가 국내에서 설계한 세 곳 중 한 곳입니다.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는 안양 알바루 시자홀, 아모레퍼시픽 연구원 등을 설계하며 알려지기 시작했죠. 그의 대표작으로는 포르투 세할베스 현대 미술관, 리스본 엑스포 파빌리온과 브라질의 이베리 카르마구 미술관 등이 있습니다. 그는 1992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비롯해, 1998년 미스 반 데어 로에 유럽 현대 건축상, 2001년 울프 예술상,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황금사자상(2002, 2012년) 등 각종 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건축가로 인정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미메시스는 ‘미니멀리즘의 극치’, ‘빛과 공간의 환상적인 조화’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출판사 ‘열린책들’의 홍지웅 대표가 미술관이자 열린책들의 사무공간으로도 활용하기 위해 설립한 곳인데요. 2005년, 설계를 의뢰한 후 2009년 가림막을 걷어냈을 때 알바루 시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정말 마음에 들어… 미메시스는 내 작품 가운데 최고의 작품이야…”
미메시스의 첫인상은 ‘하늘에서 흐르는 곡선’이었습니다. 일상에서 흔히 보는 건물들은 대부분 직선으로 이어져있지요. 건물의 모서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다보면 딱딱 끊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미메시스는 춤추는 무용수의 몸짓처럼 부드러웠습니다. 누군가는 두꺼운 책을 펼쳐서 세워놓은 것 같다고 하고, 이곳을 설계한 알바루 시자는 "여인이 앉아있는 모습 같다"고 했답니다.
본격적으로 미메시스를 둘러보기에 앞서, 이 아름다운 미술관이 종이 위에 태어난 순간을 살펴볼까요. 작은 씨앗이 거대한 나무가 되듯, 우리에게 압도감을 주는 건물도 처음에는 스케치부터 시작합니다. 알바루 시자는 설계도를 그리기 전에 수십장에서 수백장에 이르는 스케치를 그린다고 합니다.
미메시스의 외관은 ‘노출 콘크리트’ 공법으로 지어졌습니다. 콘크리트의 질감을 그대로 살려내는 이 공법은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건축기법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95년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을 당시, 그가 설계한 건물들은 무너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노출 콘크리트 공법은 이제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지요. 건축의 아버지 르코르뷔지에는 콘크리트의 거친 질감을 그대로 표현했지만, 안도 다다오의 노출 콘크리트는 맨질맨질한 느낌이 들도록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송판 노출 콘크리트 공법을 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거푸집의 나뭇결이 살아있지요. 지금 천정을 올려다보세요. 송판 노출 콘크리트 공법을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노출 콘크리트 제작 방법 : 거푸집을 양쪽으로 세운 후 콘크리트를 부어넣습니다. 콘크리트가 굳으면 거푸집을 떼어냅니다. 미메시스의 경우, 곡선을 표현하기 위해 거푸집도 곡선 형태로 만들어야 했는데요. 합판 거푸집 대신 강철소재의 갱폼(gang form, 고층 건물을 지을 시 사용하는 대형 거푸집)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알바루 시자는 미메시스의 건물 외벽을 흰색 콘크리트로 마감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흰색 콘크리트는 일반 노출 콘크리트 비용의 10배나 됐기에, 흰색 스테인(염료)를 덧칠하는 것으로 변경했다고 합니다. 만약 흰색 콘크리트로 지어졌다면 어땠을까요?
자,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로비이자 전시관, 서점으로도 활용되는 공간이 나옵니다. 잘 만들어진 백자처럼 깔끔한 내부가 돋보입니다. 마치 도화지를 펼쳐놓은 느낌입니다. 미메시스의 특징 중 하나는 층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1층 로비에서 2층을 바라볼 수 있고, 3층에서 1층 로비를 내려다볼 수 있죠. 공간이 나뉘어있으면서도 하나의 공간이기도 한 셈이죠. 이것이 가능했던 건 미술관 내에 기둥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가운데 벽이 안쪽으로 휘어지면서 기둥 역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기둥이 없어도 지붕을 지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공간 뭔가 느낌이 다릅니다. 으레 있어야 할 것들. 냉난방 장치, 전기 스위치, 콘센트 등이 보이지 않는 군요. 알바루 시자가 설계한 건축물들은 모두 ‘이중벽’으로 시공되어 있다고 합니다. 벽 위에 설치물을 넣고 그 위에 벽을 하나 더 세우는 것이죠. 알바루 시자의 미니멀리즘이 극대화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위치, 콘센트 등 자주 사용하는 설치물을 벽 속으로 숨긴다면, 코드를 꽂아야 할 때 매번 콘센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알바루 시자의 설계 디자인상 눈에 띄는 곳에 설치할 수도 없고요. 자, 콘센트는 어디에 있을까요?
저를 따라 윗층으로 올라가시지요!
3층으로 올라왔습니다. 이날은 상설전시만 이뤄지고 있었지요. 왼편에 열린책들에서 발행하는 『프로이트 전집』 원화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작품 아래의 창에서 1층을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3층에선 알바루 시자 건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자연광’과의 조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빛과 공간의 예술가 ‘제임스 터렐’의 마법! 그날그날의 빛에 따라 미술관의 분위기가 바뀌는 알바루 시자 건축의 매력. 미메시스의 못다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