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들야들한 잡채는 외딴 슬픔을 부르고...
야들야들한 잡채는 외딴 슬픔을 부르고...
야들야들한 잡채는 외딴 슬픔을 부르고...
2016.03.07 20:39 by 송나현

동화 ‘시골 쥐, 도시 쥐’ 속에 나왔던 지하실. 그곳에 한 가득 쌓인 음식은 봉인됐던 나의 ‘식탐’을 깨웠다. 이후 대하소설 ‘토지’를 보고선 콩나물 국밥을 사먹었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곤 마들렌을 처음 접했다. 쿡·먹방 시대를 맞아 음식과 문학의 이유 있는 만남을 주선해본다.

 

눈물 없이 (맛)볼 수 없는 수프... 관능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를 통해 만나본다.

우리네 잔치상에 빠지지 않는 음식. 바로 잡채다. 개인적으론 잡채를 얼마나 맛있게 하느냐에 따라 그 집 음식솜씨가 결정된다고 믿는다.(비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밖에서 먹는 잡채도 맛있지만 우리집표 잡채는 더 특별하다. 집밥 따라오는 음식 없고, 엄마의 손맛보다 좋은 양념 없다지만, 우리집 잡채는 정말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녀석이다. 다른 집과의 차이점이라면 카레가루가 들어가는 정도? 

상상해보라. 그 쫄깃쫄깃하고 탱탱한 당면이 카레가루까지 머금었단 사실을... 포텐을 폭발시키며 최고의 생기를 내뿜는 순간이다. 노오란 당면과 빨간 파프리카, 초록색 시금치가 보여주는 색의 조화도 기가 막히다.

갓 볶아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잡채는 너무 부담스럽다. 뭐든지 중용의 미덕이 필요한 법. 한 김 식힌 뒤에 하얀 접시에 올라오는 잡채는 눈만으로도 식욕을 부른다. 그러나, 잡채가 입에 머무는 시간은 너무나 짧다. 모든 면류의 음식이 마찬가지이지만 참기름의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당면은 기름칠이 되어있어, 몇 번 씹고 나면 이미 쓱 사라져버리기 일쑤다. 아쉽다며 배가 부른 데도 '한 젓가락 더, 한 젓가락 더' 하다보면 여지없이 과식이다. 

 

잡채엔 처음부터 당면이 들어갔을까?

잡채는 잔치음식으로 흔히 만들며, 주재료가 따로 없이 그때그때 많이 쓰인 재료를 따서 이름을 붙인다. 보통 '잡채'란 이름이 잡다한 재료를 채 썰어서 넣어 그렇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원래는 여러 가지 야채만으로 만들어 '잡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최초의 잡채는 조선시대에 이충이라는 사람이 왕에게 드린 선물이었다. 여러 가지 야채를 볶아서 무친 그 맛이 너무 좋아, 호조판서에까지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잡채의 메인이라 할 수 있는 당면. 쫄깃쫄깃한 당면은 원래 잡채의 재료가 아니었던 거다.

당면(唐麪)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 유래되었다. 우리나라에는 19세기 말 중국에서 이주해온 중국인들과 함께 들어왔다. 일제 강점기 때 인기 있던 당면은, 1920년대 황해도에 최초의 당면공장 ‘관흥공장’이 생기며 대중화 되었다.

그 후 당면을 잡채에 이용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왕들이 지금의 잡채를 보면 기겁할지도 모른다. 말랑말랑한 당면이 들어간 그 맛은 그 때와 확연이 다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쫄깃쫄깃한 당면의 맛에 반해서 잡채를 먹는 것 아닐까?

잡채를 볼 때마다 슬픈 이유

우리에게 잡채는 이제 흔하디 흔한 음식이다. 없으면 허전하지만, 있어도 다른 음식에 가려지기 쉬운 음식. 예식장 뷔페에서 나오는 잡채는 다른 음식들에 밀려 무시되기 일쑤다. 하지만 신경숙의 ‘외딴방’에 잡채가 나오는 장면을 보고나면 잡채가 이렇게 서글픈 단어였나 싶다. 말로 내뱉는 잡채와 활자로 쓰인 잡채가 주는 느낌이 매우 달라진다.

(중략)

외사촌은 시장통 안의 길다란 의자에 책가방을 내려놓고 떡라면과 잡채를 시킨다. 잡채 값은 떡라면의 배다. 나는 외사촌의 옆구리를 찌른다.

“잡채는 왜 시켜, 비싼데?”

외사촌은 괜찮다고 한다. 접시를 하나 더 달라고 해서 잡채를 반으로 나눈 다음 외사촌과 나는 따뜻한 떡라면 국물과 함께 잡채를 호록호록 먹는다.

삼월 밤바람에 땡땡하게 얼었던 외사촌의 뺨이 보드라워지며 발그레해진다...

극 중 주인공이 거스름돈을 잘못 거슬러준 시장바닥 할머니 덕분에 잡채로 호사를 누리는 장면. 잡채가 남아서 버리는 이 시대에 살고 있어 그런지 더 구슬프게 느껴진다. 사실 이 책은 제목부터 무척이나 서글프다. '외딴방'이라니...

집이 아닌 방은 개인을 위한 공간이지만 외딴이라는 단어가 방을 수식하니 고독을 저절로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깊은 고독을 품고 살아간다. 

먼저 주인공과 같이 공단일을 하며 야학에 다니는 외사촌. 그녀는 전태일로 대표되는 공순이 인생을 버티지 못해 공단일과 야학을 그만두고 전화교환원을 준비한다.

그녀의 얇은 종아리는 공단 일로 퉁퉁 부었었다, 자기도 힘든 그 생활을 보내며 사촌동생에게 잡채를 사주고, 장갑을 사주고, 작가의 꿈을 응원한다. 큰 오빠에게 전화교환원 준비하는 걸 들켜 혼날 때, '공단일이 너무 싫어' 라고 대답하던 그녀. 오빠가 동사무소의 잡일거리를 주며 야학을 계속 다니라고 할때 빚나던 그녀의 얼굴이 그려진다.

큰 오빠는 또 어떤가. 이십대 초반의 그는 ‘외딴방’ 안에서 어린 여동생 둘과 남동생 한 명을 데리고 산다. 공무원 시험을 치고 나서 낮에는 동사무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을 다니는 큰 오빠. 자기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여동생과 사촌동생을 고깃집에 데려가 양념갈비를 양껏 먹는 동생들을 바라 보기만 한다. 빵을 고르는 동생들을 보며 "속이 좋지 않다"고 말하고,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큰 오빠.

큰 오빠가 눈이 크고 얼굴이 햐얗고 키가 작은 여자과 결혼할 때 난 책 위에 눈물을 떨어뜨렸다.

법대를 다니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작은오빠. 그는 학생운동을 시작하고 큰 오빠와 시시사건 부딪치지만 잡혀가 맞고 들어온 날에도, 그 작은 방에 자기가 먼저 들어가지 않는다. 여동생들이 옷 갈아입을 때 불편할 것을 배려해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거다. 맞고 들어오는 그에게는 멍이 사라지는 날이 없었고, 항상 창경궁에서 쪽잠을 자느라 몸이 성한 날이 없었다.

매일 같이 시위를 하러 나가 다쳐 들어오는 남동생을 향한 분노를 참지 못해 폭력을 휘두르던 큰 오빠의 울부짖음은 책을 보지 않아도 생생히 기억난다.

(중략)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되냐?” 참고 참았던 큰오빠의 울분이 터진다.

어디 그만 그렇게 산 것이던가.

희재언니. 그녀야 말로 고독의 상징이고 외딴방을 자기의 분신으로 삼은 사람이다. 주인공과 외사촌이 외딴방을 떠나고 싶어 갈증에 젖어 있을 때, 그녀는 외딴방을 자기의 인생으로 삼았고, 결국 그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지금, 우리 현실에 외딴방은 어디에 있는가

제목부터 슬픈 책이지만, 이 책이 주인공들의 슬픔, 회한, 절망으로만 가득 차 있지는 않다. 주인공은 이 외딴방에서 외로움을 알아 가면서도 가족끼리 끈끈한 정을 깨닫고, 소중한 사람에서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법을 배우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필사하라고 말해주는 선생님을 만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 책을 꺼내들기만 하면 슬플까.

내가 직접적으론 겪지 못하는 현대의 빈곤에 대한 미안함일까.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똑같은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학비를 벌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고, 몸만 겨우 뉘일수 있는 고시원에서 잠을 청하는 청춘들. 몇 번의 시도에도 합격되지 않는 유리문을 바라보며 자신의 탄생을 외면하는 그런 젊음들.

이 세태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그래, 적어도 우리는 잡채는 마음껏 먹을 수 있잖아?’ 라며 회피하라는 것이 아닌, 자신이 눈 감고 외면하던 진실을 파헤치고, 지금도 외딴방에서 자신만의 쇠스랑을 끌고 다니는 이들에게 위로를 건내주라는 그런 뜻에서 말이다. 

잡채처럼 없으면 없는 대로 살지만, 한 번 눈길이 가면 멈출 수 없고, 앉은 자리에서 끝장을 보는 이 책. 다 읽고 나면 자책과 포만감으로 가득 찬 마음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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