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문구’에 선동된 사람들
‘붉은 문구’에 선동된 사람들
‘붉은 문구’에 선동된 사람들
2016.06.03 15:59 by 제인린(Jane lin)

‘항상 내려다보는 사람들’

중국에서 유학했던 지인은 중국인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동네 상점 주인부터, 하숙집 아주머니까지…
외국인 유학생으로서 숱하게 느꼈던 하대(下待)는
결국 반중(反中) 정서로까지 번졌다고 했죠.
무엇이 그들을 그리도 뻣뻣하게 만들었을까요.

(사진:Steven Blandin/shutterst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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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 도심 곳곳에 설치된 보훈 문구들이다.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게재돼 있는데, 보수 공사에는 눈을 감기 일쑤인 지역 정부가 유독 해당 플랜 카드 보수만큼은 재빠르게 해오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56개 민족이 혼재돼 살아가는 베이징에서 외국인의 비율이 이토록 높다는 점은 사실 필자가 이 지역을 베이징에서의 첫 거주지로 선정한 이유이기도 했죠. 더 많은 외국인들과 마주하며 다양한 문화를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국어와 중국 문화에 서툴렀던 당시에는 필자와 같은 처지의 외국인들이 많이 머무는 곳이라면 유독 짙은 듯 보여지는 중국 현지 문화가 조금이나마 옅어지지 않았을까하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사 온 지 불과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 깨닫게 됐죠.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고 해서 중국적인 색채가 옅어지지 않는 곳이 바로 이곳, 베이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실제로 필자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건물마다 걸려 있는 플랜 카드를 통해 ‘중국이 부강해야 가정이 온전하다’는 의미를 담은 보훈 문구들을 수 십여 개씩 마주하게 됩니다.

거리 곳곳에 펄럭이는 붉은 천에 각인된 이 같은 보훈 문구들에는 ‘중국의 역사와 문화가 가정의 평화를 만든다’는 내용의 그림과 글이 오가는 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곤 하는데, 한 블록 거리를 이동할 때 마주하는 해당 문구는 적개는 십 여개에서 많게는 수 십여개에 달할 정도로 많고, 또 다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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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있어야 비로소 가정이 있다’는 보훈 문구. 과연 그럴까? 평화로운 국가를 유지하게 하는 힘은 온전한 가정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의문을 가지게 했던 문구들.

거리뿐만 아니라, 은행이나 학교 등 공공기관과 가족 단위로 자주 찾는 대형 마트와 유명 여행지에서도 해당 보훈 문구는 눈에 띄기 쉬운 장소마다 붙어 있습니다.

마치 오성홍기를 연상케하는 붉은 천위에 강한 필체로 새겨진 ‘중화문명 제일주의’ 문구에 필자를 포함한 외국인들은 노출돼 있는 것이지요. 물론 자국민들의 경우에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해당 문구를 매일 마주하고 살았으니, 그 빈도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하루에도 수 차례 접하게 되는 유명 국영 언론에서는 시진핑 주석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루도 빠짐없이 헤드라인 기사로 다루고, 시 주석이 강조한 '두 개의 100년(중국 공산당 성립 100년이 되는 2021년을 계기로 샤오캉<小康> 사회를 건설, 부강한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를 실현하겠다는 목표)'과 '중국의 꿈(中國夢)' 등에 대한 관련 '썰(說)'을 풀어나가곤 합니다.

그리고 해당 언론들은 또 다른 지면을 할애해, ‘중국 해방군 의료진,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 퇴치 성공적 활동’, ‘2016년 재산 리포트, 중국 중산층 전 세계 38% 차지’, ‘100만 달러 이상 보유 중국인, 130만 명 돌파’ 등 중국과 중국인들의 활약상을 담은 기사를 방출해오고 있습니다. 앞서 거론한 기사들은 모두 지난 1월 14일 조간신문 하루 동안에 실린 내용이라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지경의 분량이죠.

이와 함께 중국에서는 매년 9월 3일을 교사절로 제정해 교사들의 노고를 치하해오고 있는데, 지난해 시 주석이 베이징사범대학을 방문해 가장 강조한 의식 역시 '중화민족'이었습니다.

당시 시 주석은 “교사는 중화민족의 드림팀이며, ‘중국몽’을 설계하는 설계사”라고 치하한 뒤, 중국 전통 문학 및 모국어인 중국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당시 그는 교과서 내의 고문 시가를 삭제하지 말 것과 이를 통해 중국 전통 고전 문학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이 '중화민족'의 우수성을 지켜나가야 하는 책임자라는 사실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방송인 장위안을 통해 비롯된 중국인들의 자국문화에 대해 가지는 강한 자긍심의 근원은 사실상 그의 개인적인 주장이라기 보다는 중국 정부의 계획적이고 계산적인 보훈 노력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는 사례들입니다.

중국 정부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된 ‘중국 제일주의’(사진:Zerbor/shutterstock.com)

또 다른 예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난 1807년 기독교 선교사로 파견 온 로버트 모리슨(马礼逊, Robert Morrison)은 광저우(广州)로 이동해 변발에 중국 전통 옷을 입고 생활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후 그는 1815년 ‘화영자전(华英字典)’이라는 중국 최초의 중영사전을 편찬했습니다.

그리고 200년이 지난 2014년, 푸단 대학(复旦大学) 루구순(陆谷孙) 교수팀은 ‘중화한영대사전(中华汉英大词典)’을 재출간하기에 이릅니다. 200여 년 전 처음 출간됐던 ‘화영사전’은 외국인의 시각에서 중국어를 영어로 번역한 사전으로 용(龙)을 ‘dragon’으로, 만두(饺子)를 ‘dumpling’으로, 군만두는 ‘fired dumpling’으로 번역한 바 있습니다. 지극히 서양인의 시각으로 번역됐던 것이지요.

지난 2014년 푸단 대학(复旦大学) 루구순(陆谷孙) 교수와 그의 제자들이 출간한 '중화한영대사전(中华汉英大词典)' 소식을 담은 베이징 지역언론지 ‘신경보(新京報)’ 보도 자료. 출처/ 신경보(新京報)

하지만, 최근 재출간된 중화한영대사전에서는 용을 ‘long’, 만두를 ‘jiaozi’로 군만두를 ‘guotie’ 등으로 변경, 출간 했습니다. ‘long’, ‘jiaozi’, ‘guotie’는 각각 용과 만두, 군만두를 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한 것이죠. 이 같은 번역 의도에 대해 사전 출간 직후 유력 언론에서는 ‘중국어와 영어 뜻, 발음까지 모두 중국어의 기원으로 번역한 중국인들의 자주 의식이 강하게 드러난 사건’이라 치하하며 보도를 이어간 바 있습니다.

이 같은 상황을 떠올리며, 필자의 시선을 강하게 이끌었던 붉은 천에 각인된 보훈 문구들이 중국인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을 생각해 봅니다.

또, 이즈음 되니 TV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중화민족으로의 자부심을 감추지 못하고 표출하는 청년 장위안의 모습은 그의 개인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단, 오랜 세월 중국 정부의 각고의 노력을 통해 체화된 것이 아닐까 하는 강한 확신이 생깁니다.

/사진: 제인 린(Jane lin)

중국에 대한 101가지 오해 언론에 의해 비춰지는 중국은 여전히 낡고, 누추하며, 일면 더럽다. 하지만 낡고 더러운 이면에 존재하고 있는 중국은 그 역사만큼 깊고, 땅 덩어리만큼 넓으며, 사람 수 만큼 다양하다. 꿈을 찾아 베이징의 정착한 전직 기자가 전하는 3년여의 기록을 통해, 진짜 중국을 조명해본다.

필자소개
제인린(Jane lin)

여의도에서의 정치부 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무작정 중국행. 새삶을 시작한지 무려 5년 째다. 지금은 중국의 모 대학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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