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서 보아 아름다운 것들은 대개 멀리서 보아도 아름답다. 심지어 더 새롭기까지 하다. 가까이 있을 때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아름다움이 눈 앞에 펼쳐진다. 최치원이 달맞이고개에서 해운대 바다를 바라보았을 때의 심정이 그것이었을까. 예고한 대로 이번엔 함께 달맞이길을 걸어 보고자 한다. 이곳에서는 해운대 바다뿐만 아니라 이름 그대로 ‘달’을 맞이할 수 있다.
해운대 미포 부근과 청사포를 잇는 다리이자, 해운대해수욕장과 송정해수욕장을 이으며 와우산(臥牛山) 중턱을 넘는 고갯길. 달맞이고개는 어느덧 많은 관광객들과 부산 사람들이 사랑하는 산책 코스가 되었다. 대형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많이 들어서 이전에 비해 화려해졌지만 여전히 고즈넉한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 주변이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조용한 것만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은 기분 탓일까.
| 바다와 산이 만나는 곳
해운대 미포에서 바다 반대편으로 올라오면 달맞이길의 입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 길의 또 다른 명칭은 ‘문탠로드(Moontan Road)’. 짐작했겠지만 선탠(Suntan)에서 차용한 낭만적인 이름이다.
1983년 달맞이 동산이 조성되며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고, 1997년에는 달맞이길 중간 지점에 이름 그대로 바다와 달을 즐길 수 있는 정자인 '해월정(海月亭)'이 세워졌다. 그 주변으로 각종 카페 및 식당이 자리하기 시작하면서 번화가로 굳어졌다.
해월정을 구경할 순 없었지만, 그곳에 이르기 전에도 전망대가 있어 해운대와 광안리 바다를 한 눈에 조망하기에 충분하다. 마침 해가 뉘엿뉘엿할 때여서 노을이 지는 해운대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해는 지고, 달이 머리 위에 맑게 떠 있는 그 순간, 시간이 잠시 멈춰버린 것 같다는 착각을 했다. 그 순간을 놓칠 새라 얼른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이 사진을 찍은 방향과 반대편, 그러니까 길을 따라 주욱 올라가다 보면 산책로로 향하는 진입로가 곳곳에 있다. 산 중턱에 있음을 알려주는 이 산책로는 숲과 바다를 동시에 맛볼 수 있어 인기가 높다. 가족 단위로, 혹은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나온 인근 주민들도 많아 안전에 대한 걱정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다.
| 자연과 예술이 함께 살아숨쉬는 길
조금 더 걸으면 ‘어울마당’이 나온다. 산책로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곳은 일종의 야외무대다. 층층마다 넉넉한 공간과 푸른 풀밭이 자연스럽게 ‘피크닉’이라는 단어를 연상케 하는데, 아쉽게도 이 무대가 제대로 사용되는 것을 본 적은 별로 없다. 다만 몇 년 전 한 외국인 밴드가 이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그때 느낌은 흡사 외국에 여행 온 것만 같았다. 이곳에서 더 많은 공연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길을 조금 벗어나 주택들이 늘어서있는 윗길로 올라가면 달맞이길 속 또 하나의 명소, ‘추리문학관’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추리소설 작가로 불리는 김성종 작가가 사비를 들여 1992년 설립한 곳이다. “왜 대한민국에는 추리소설 문학관이 하나 없는가?”라는 김성종 작가의 문제의식에서 출발되었다고 한다. 개인 비용으로 설립된 곳임에도 만만치 않은 내공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입관료가 4000원이지만, 사실 음료값이다. 커피, 차 등 다양하진 않지만 정갈한 음료를 마실 수 있고, 출출한 사람들을 위한 베이커리도 준비되어 있다. 앉을 자리가 넉넉하기 때문에 카페처럼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 2층으로 올라가면 더 많은 자리가 있다. 특히나 2층에는 추리소설들이 서가에 많이 꽂혀 있어 가만히 앉아 음료와 함께 추리소설의 즐거움도 맛볼 수 있다. 3층은 강연 등 각종 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준비되어 있고, 다양한 행사들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추리문학관 홈페이지(http://www.007spyhouse.com)를 참조하자.
달맞이길에는 크고 작은 갤러리들도 많다. 치열한 일상 속에서 고갈되어버리는 예술적 감수성을 충전하기 안성맞춤. 한창 방황하던 대학 4학년 때, 필자는 이 길에 펼쳐진 갤러리들을 들락거리며 헛헛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 다시 찾은 이날,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사람은 계속 변화한다. 그 때와 지금의 나는 분명 어떤 의미로든 달라져 있다. 그러나 길은 그대로다.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길은 그대로 있다. 그리고 그 길이 지금도 우리를 기다린다.
/사진:이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