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아날로그
2016.11.29 12:06 by 오휘명
(사진: AlenaG/shutter.com)

카페 ‘둘’, 여자는 익숙하다는 듯 유리문을 밀고 들어와 손가락 하나를 펼쳐 보였다. 삼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사장도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흰 머그잔에 모카 시럽을 세 펌프쯤 넣으며 카페모카를 만들기 시작했다. 뒤늦게 닫힌 유리문에선 고장 난 도어 벨이 딱딱 소리를 냈다.

조그만 2인용 테이블에 앉아있던 여자의 앞으로 따뜻한 카페모카가 놓였다. 휘핑크림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높게 올라가 있었다. 여자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가져온 찻집 주인과 눈을 마주쳤다.

“오 분 이따가요, 부탁드릴게요.”

그리곤 시선과 함께 매우 익숙한 한마디의 말을 얹었다. 여사장은 다시 알겠다는 듯 아무 말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몇 입 베어 먹어 몹시 작아진 휘핑크림이 커피 위에서 둥실둥실 떠다닐 때쯤, 바에 앉아 책장을 넘기던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에스프레소 샷이 추가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더 만들기 시작했다. 아메리카노는 카페모카보다 만드는 과정이 한결 간단했으므로, 눈 깜빡할 사이에 잔에 담길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유리문이 한 번 더 열렸다. 도어 벨 소리가 다시금 딱딱 소리를 냈다.

남자는 카페에 들어와 눈웃음으로 사장에게 인사를 건네고, 아무 말 없이 바에 놓인 아메리카노 잔을 들고 여자가 있는 2인용 테이블로 향했다.

“오늘도 기가 막히게 맞췄네, 내가 오는 시간.”

늦는 게 하루 이틀이어야지. 여자는 미소를 띠면서도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히익, 그 많던 휘핑크림을 벌써 다 먹어버렸네. 그러다 병 걸려. 우려와 농담이 섞인 말들이 조용한 찻집에서 얼마간 오갔다.

오래된 연인들의 만남이란 그랬다. 약속시간을 칼같이 지키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게 되는 것, 그래서 자신과 그 연인이 마실 차를 따로 주문할 줄 알게 되는 것, 단 것을 좋아하는 입맛과 쓴 것을 찾는 입맛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게 되는 것.

두 사람이 연인이 된 지 며칠이 지났는지 헤아려보는 것은 무의미한 일에 가까웠다. 작년 크리스마스와 재작년, 그리고 그 전 해 크리스마스의 추억들은 머릿속에서 온통 뒤죽박죽 섞여, 그저 ‘언젠가의 크리스마스’ 정도로 기억될 만큼, 추억들 사이의 경계라는 것은 모호해졌다. 두 사람 모두가 대학생일 때의 옷차림과 지금의 옷차림이 조금 많이 바뀌었다는 것 정도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사소한 다툼과 권태로움으로 떨어져 지낸 시간도 조금 있었지만, 거의 항상 여자는 거기에 있었고, 남자는 그 옆에 있었다.

새로운 대화거리가 있으면 신나서 떠들다가도, 소재가 떨어지면 떨어진 대로 조용한 시간을 보낸다, 두 사람은 카페 ‘둘’에서 시끄럽고도 조용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오늘도 쓰고 달콤한 다른 두 커피를 비운 두 사람은, 여사장에게 빈 머그잔 두 잔을 건네곤 카페를 나섰다.

“근데 오늘은 뭐하지?”

카페를 나선 남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낄낄 웃기 시작했다. 닫힌 유리문 도어 벨이 딱딱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왜 뜬금없이 웃고 그래, 기분 나쁘게?”

“아니, 대책 없이 만나서 뭘 할지 고민하곤, 결국 뻔한 걸 하러 다니는 우리가 웃겨서. 어떻게 몇 년째 변하는 게 하나도 없냐, 우리는.”

여자는 남자의 말을 듣고는, 자신도 낄낄 웃기 시작했다.

영화나 보러 가지 뭐. 여자의 제안을 들은 남자도 군말 없이 그렇게 하자고 대답했다. 그리곤 두 사람은 번화가의 반대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작은 극장에는 항상 관람객이 드물었다. 해봤자 조조 영화나 심야 영화를 즐겨보는 몇몇 나홀로족들뿐이었다.

체인형 멀티플렉스 시네마들의 여파인지, 그 영화관의 입구에는 ‘여러 이유로 조만간 폐업하게 됐다’는 공지문이 붙어있었다. 두 사람은 그 촌스러운 빨간 좌석들과 매표소 간판의 요란한 폰트, 오래된 공간의 냄새를 더는 못 느끼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말없이 같은 쓸쓸함을 느꼈다.

오래도록 가만히 있을 뿐이었는데, 어느새 아날로그가 되어버린다는 것.

풋풋한 시절에 함께 누렸던 장소와 물건들은 어느새 구시대의 촌스러운 것들 취급을 받게 됐다. 그만큼이나 둘이 함께한 것들이 많았던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폐업을 목전에 둔 영화관 같은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두 사람은 ‘아날로그적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함께 오래도록 지내다 보면, 두 사람이 누리던 것은 어느새 아날로그의 것이 됐다.

“그 목도리, 남성용인데 되게 잘 두르고 다닌다. 보이시한 매력 뭐 그런 건가요?”

남자가 몇 년째 자신의 목도리를 두르고 다니는 그녀에게 농담을 던졌다. 말은 하지 않아도, 자신들의 단골 영화관이 없어지게 된 것에 대한 씁쓸함을 그녀도 느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당신 취향이 애초에 요란한 건데요, 선생님.”

피식, 여자가 굳은 표정을 풀며 남자의 팔 언저리를 툭 때렸다.

*

영화관의 초라한 시설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초특급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두 사람은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를 영화관의 로비를 다시 한번 뒤돌아봤다.

“배고프다. 집에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자.”

이번에는 남자 쪽의 쓸쓸한 시선이 영화관의 로비에 더 오래 머물렀고, 여자는 그의 기분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애써 들뜬 목소리를 냈다. 이제 그만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둘 중 누구의 집일지라도 찬장에 있는 것들은 비슷했다. 여자 쪽이 좋아하는 짜장 라면과 남자 쪽이 좋아하는 아주 매운 라면이 반반씩 섞여 채워져 있었다. 두 사람은 오늘 아주 매운 라면을 끓여 나눠 먹었다. 여자는 몇 번이고 혀를 내밀고 물을 들이켰지만, 언젠가부터 그걸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디저트 삼아 맥주를 한 캔씩 꺼내 마셨다. 취기로 약간은 발그레해지는 볼과 기분 좋은 배부름이 함께였다. 여자가 말을 꺼냈다.

“세상은 점점 빨라지고, 이것저것 다 휙휙 사라져가는 게 참 웃기다. 그치.”

남자는 같은 생각이라는 듯 남은 맥주를 휙 들이켜고는, 빈 캔을 탁자위에 내려놨다. 텅 빈 소리가 났다.

“조금은 두려운 것 같기도 하고.”

‘언젠간 우리도 사라질까 봐 두려워.’와 같이 나약한 소리를 하기는 또 싫었기 때문에, 그녀는 대충 그런 식으로 말을 뱉곤 남자의 어깻죽지에 파고들었다. 남자는 몇 년째 안아왔던 그녀를 아주 능숙한 폼으로 감싸 안았다. 아주 짧은 키스. 오래도록 나눠 익숙해진 키스에는 여러 마디의 말보다도 강하고 농밀한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모든 게 다 사라지거나 변해버려도, 그 속에서도 우리는 함께일 거야.’

입술이 떨어지고 한 뼘쯤 벌어진 두 얼굴의 사이로, 남자는 여자의 젖살이 빠져 푹 들어간 뺨을 시선으로 채웠다. 여자는 조금 더 깊게 팬 것 같은 그의 눈 밑 주름을 헤아렸다. 그 변화를 함께 겪어왔다는 생각에, 둘은 씁쓸함과 두려움을 느끼는 동시에 어떤 뿌듯함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아날로그가 된다는 것.

동네의 구석에 위치한 극장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단골 찻집의 고장이 난 도어 벨은 언젠간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다. 요란한 패턴의 목도리에는 하루가 다르게 실밥이 늘고 있었다.

그렇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아날로그가 된다는 것.

둘은 둘이기 때문에, 오래도록 손을 잡아왔기 때문에,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었다. 무서울 건 없었다.

 길 건너 그분들의 사연  세상의 모든 존재들, 나와 나의 주변 ‘것’들이 각자 간직한 마음과 사연. 그 사연들을 손 편지처럼 꾹꾹 눌러 담아 쓴 초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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