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함이 제철인 계절
솔직함이 제철인 계절
2016.12.20 17:36 by 오휘명
(사진: HelloRF Zcool/shutter.com)

2016년 8월 27일

 어제까지만 해도 찌는 듯한, 그리고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여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가을의 느낌이 스며있는 바람을 느꼈다, 해가 지고 난 후 아주 잠깐 느낀 거였지만.

 계절의 것들을 느낄 때, 그러니까 이런 가을의 온도가 스민 바람을 느낀다거나, 겨울의 냄새를 맡는 일, 잠자던 카디건에서 봄의 촉감을 느낄 때면 나는 내가 남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새삼스럽게 인정하게 된다. 보통 사춘기가 채 가시지 않았을 열여덟 살 남자아이가 이렇게 일기를 쓰는 것도 참 흔치 않은 경우라고 생각한다.

 학교에 다니지 않았던 한 달쯤의 기간, 종종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점심밥을 먹기 전의 나른하고 조용한 시간, 물 한 잔과 좋아하는 소설책들을 읽을 때면 뜬금없이 어떤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계절의 것들을 느낄 줄 아는 아이.

 5월의 작문 수업 때였다. 작문 과목은 다른 반과 반반씩 섞여 수업을 듣는, 이른바 ‘이동수업’ 과목이었다.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물들 중 우수한 것을 뽑아 읽어주시곤 했었고, 그때의 작문 소재는 ‘여름’이었다. 선생님은 많은 글 중 그 아이, ‘3반 그 아이’의 글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하셨다.

“풀벌레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것 같은 날, 그것들에 귀를 기울였듯 창밖으로 고개를 쭉 내밀어 코를 킁킁거리면 맡아져 오는 초여름의 기척……”

 어떤 구절이 나의 귀에 들어와 울렸을 때, 나는 온 세상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나만 계절의 것들을 느낄 수 있는 거라 생각했었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니. 나는 민망함과(나만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속내를 다 들켜버린 것만 같은 쑥스러움이 동시에 몰려와,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 그 글을 쓴 그 아이와 눈을 마주친 것 같았다.

붉은 얼굴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어쩌면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2016년 11월 5일

 토요일, 수학여행에 다녀온 뒤에 홀로 앉아있는 나의 방 안은 유독 더 적막하다. 끽해야 3일을 다녀왔을 뿐인데, 꽤 오랫동안 그래왔던 듯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귀에 익은 것이다.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는 지금이 이상하리만치 낯설게 느껴진다. 그와 더불어 겨울 역시 부쩍 다가온 것 같아, 나는 온몸으로 쓸쓸함과 초라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여행 이튿날 밤에는 각 학급별로 준비한 장기자랑을 선보이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엉겁결에 무대에 올라야만 했다. 물론, 춤에는 소질이 없는 편이었기에 혼자 화려하게 춤을 추는 역할은 아니었지만, 수백 명 앞에서 원치 않았던 춤을 추는 일은 여간 수치스러운 게 아니었다. 유행 가요의 강한 드럼 전주가 터져 나오고, 나는 아득하도록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무대 위에 올라갔다. 표정은 더더욱 굳어져, 무대 아래의 몇몇 아이들은 나의 표정을 보고 웃는 것만 같았다. 창피했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그 아이와 눈을 마주친 것이다. 빠른 박자의 음악과 춤동작과는 별개로 느리게 맞춰진 나와 그 아이의 눈. 그 아이는 무대를 보며 웃고 있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무대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닌 표정이었다. 그저 ‘아, 저 사람들이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구나.’ 정도의 표정인 것 같았다. 나는 그 순간 나의 존재가 그 아이에게만큼은 세상 무엇보다도 하찮게 여겨지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슬픈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나의 표정을 눈치라도 챈 듯 이내 미안한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물론 나의 착각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 주말이 지나면 또다시 어떤 박자와 표정으로 그 아이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지만, 문제는 내게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여 놓고 나니 이제는 그 아이의 앞에서 정상적인 표정을 지을 자신이 없다.

참 웃기다, 꼭 짝사랑을 하는 사람 같이 말하고 있잖아.

2016년 12월 16일

 참 번거롭게 됐다. 하루의 반절 이상을 보내는 곳이 바로 학교이고, 그런 만큼 나는 학교에서 마음 편하게 다니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교실을 나설 때마다 거울을 보고, 몸에서 땀 냄새는 나지 않는지, 양말에 구멍이 뚫리지는 않았는지를 점검하게 된 것이다, 그토록 편한 생활을 지향하던 내가. 특히 그 아이가 있는 3반 앞을 지나갈 때면 더 신경을 쓰게 됐다.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청소를 마칠 때쯤, 그러니까 노을이 불타오를 듯 빨갛게 질 때쯤이면 학교에선 왠지 모르게 노릇노릇한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꼭 그 빨간 노을빛이 교내의 공기를 데우거나 불태우기라도 하는 듯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이 떠나간 학교에서, 담당한 주번 업무를 마치고 느긋하게 교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그 시간대 특유의 불그스름한 분위기를 느끼며 복도를 걷고 있었고, 그 아이가 없을 것을 알면서도 3반의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그렇지만 이게 웬걸. 그 아이가 있는 게 아닌가.

 왠지 모를 반가움을 느끼려는 것도 잠깐, 나는 그 아이와 함께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곤 급히 복도의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글쎄,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몸을 숨겼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고.

 제법 낯이 익은 선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은 깔끔한 외모며, 운동신경, 성적, 무엇 하나 아쉬운 점이 없는 선배로 우리 학년에서도 유명했기 때문에. 고3 선배들의 대학 입시 결과들은 속속들이 발표되고 있었고, 지나가는 소식으로는 그 선배도 서울권의 유명한 대학교에 합격했다는 것을 들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 선배가 왜 그 아이와 함께였는지가 자꾸만 궁금해지는 것이다. 사람이 없는 교실에서 두 사람은 어떤 말을 나눴으며, 어떤 표정을 주고받고, 어떤 온도의 숨결을 뱉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걸까. 나는 망상을 거듭할수록 참을 수가 없어져, 조금 전에는 화장실로 달려가 저녁밥을 다 게워 내버렸다.

나는 아직 터무니없이 어리고, 못된 상상만 할 줄 아는 나쁜 소년인 것이다.

일기를 쓰는 것조차 괴롭다. 오늘은 일찍 자러 가야겠다.

2016년 12월 22일

 여름방학 기간이 엊그제 같은데, 내일이면 또다시 겨울방학의 시작이란다. 나는 수백 명의 학생들 속에서 없는 사람인 듯, 그러니까 일련번호 20129쯤, 2학년 1반의 29번 학생쯤으로 겨울을 보내고 있다. 그 누구에게도 특별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어제와 오늘은 부쩍 그 아이와 눈을 자주 마주쳤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아이는 줄곧 3반 앞의 복도에 서서 두리번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내가 도움될 만한 게 있을까 고민도 해봤지만, 나는 이럴 땐 유난히도 더 무능해서 쓸모가 없는 것 같았다. 애초에 가깝지도 않은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걸 만큼 넉살이 좋은 사람도 아니었고.

 그렇지만 나는 동시에 참 답답한 타입의 사람이라서, 이렇게 마음에 뭔가 턱턱 걸리는 것을 느낄 때면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는 아무 일도 제대로 못 하는 것이다. ‘그럼 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스스로에게 물었다. 물론 답은 돌아오지 않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성탄절을 기념하는 음악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붕어빵과 군밤의 것이 섞인 완연한 겨울의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 대형 서점과 문구점은 ‘바로 지금이 돈을 벌 때다’라고 생각하는 듯 점포의 바깥으로 여러 엽서들을 진열해둔 것이 보였다. 온통 붉은색 초록색의 성탄절 엽서들이었다.

 그리고 자기 전 일기를 쓰고 있는 지금, 그 엽서들 중에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던 한 장이 일기장의 옆에 놓여있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잘 보내라는 엽서 한 장쯤은 괜찮지 않아?’라는 생각에서 홀리듯 산 것 같았다.

눈동자는 쉴 틈 없이 흔들리고, 엽서 위에 한 마디 적어야 하는 손가락은 벌써부터 떨리고 있다.

글쎄, 모르겠다. 어떤 말을 적어야 할지. 어떻게 하면 조금이나마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솔직해져야 할지. 사실은 여름 무렵부 터 ‘계절의 것들’을 함께 느끼고 싶었다고 말해야 할지. 눈앞에는 성탄절 엽서가 놓여있고 어찌 됐건 이것은 내가 사 온 것이다. 이것을 받을 사람도 정해져 있다.

내일은 반드시 오겠지만, 오늘 밤은 몹시 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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