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게 웃긴 녀석
되게 웃긴 녀석
2017.01.26 16:12 by 청민

남동생 하나가 있다. 이름은 찬이. 근데 얘가 되게 웃긴 녀석이다.

찬이가 네 살 땐가. 쭈쭈바를 쭉쭉 빨면서 집에 들어왔다. 엄마는 분명히 사준 적이 없는데, 얘는 어디서 쭈쭈바를 구했는지 당당하게 물고 오는 것이 아닌가. 엄마는 찬이에게 쭈쭈바가 어디서 났는지 물었다. “찬아, 누가 사줬어? 뒷집 예슬이네 엄마가 사 줬어?” 그러자 찬이는 눈을 크게 뜨고는, 어눌한 발음으로 신나게 답했다. “엄마, 내가 아이스크림 꺼내서 친구들 다 나눠 줬어. 잘했지?” 그러고는 침을 질질 흘리며 너무나 맑게 웃는 것이 아닌가. 엄마는 얘 좀 보게, 하는 표정으로 찬이를 바라보았다.

사건은 이랬다. 엄마는 집 앞 슈퍼에 가면 우리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줬는데 그때마다 우리에게 원하는 걸 직접 꺼내도록 해주었다. 찬이는 그걸 기억했다가 동네 꼬마들을 데리고 슈퍼에 가서 손수 쭈쭈바 하나씩을 꺼내 나눠 줬던 것이다. 아이스크림 통보다도 찬이의 키가 작았으니 주인아주머니는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었고. 물론 동네 꼬마들도 찬이가 나눠 주는 아이스크림을 받아서 신나게 물고 다녔을 테고. 엄마는 당장 슈퍼로 달려가 주인아주머니에게 사과를 하고 값을 치르셨다. 그게 벌써 이십 년이 다 된 일인데, 나는 쭈쭈바를 먹을 때마다 자연스레 찬이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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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텔레토비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내가 여덟 살이고 찬이가 다섯 살 때, 우리는 텔레토비를 좋아했다. 정확히는 찬이는 보라돌이를 나는 뽀를 좋아했다. 텔레토비는 방송 끝에 보라돌이, 뚜비, 나나, 뽀 중에 한 명이 다시 나와 ‘친구들 안녕!’ 하고 인사를 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하루는 찬이와 내가 방송 끝에 누가 나올지 내기를 했다. 방송을 보는 내내 뽀가 나올 것이다, 아니다, 저번에 뽀가 나왔으니 보라돌이가 나올 거다, 하면서 어눌한 말투로 쪼잔하게 투닥거리고 있었다. 은근한 신경전이 텔레토비를 보는 내내 찌릿찌릿하게 이어졌다. 방송이 끝나기 5분 전, 우리의 신경전이 귀여웠는지 엄마도 옆에서 함께 결과를 기다렸다. 드디어 이야기가 끝나고 마지막 인사가 남았다. 누가 나올지 잔뜩 긴장해 있는 통에 티비 앞에까지 긴장감이 돌았다. 그날 인사를 하러 나온 것은, 나의 빨간 뽀였다! 뽀가 나와서 손을 흔들며 ‘친구들 안녕!’ 하는데,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내가 신나서 거실을 뛰어 다니는 동안, 찬이는 시무룩하게 입술을 삐죽 내밀고 나를 노려보았다.

얄미운 찬이를 이겼다는 생각에 나는 소리를 지르고 만세를 불렀다. 그런데 갑자기 꼬맹이 찬이가 우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너무나 서럽게. ‘허, 참. 내가 뽀 나오란다고 빌어서 뽀가 나온 것도 아니고.’ 도저히 그칠 것 같지 않은 찬이를 보다가 엄마는 방속국에 전화를 걸어 다음에는 꼭 보라돌이가 나오도록 이야기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수화기를 들어 전화를 하는 시늉을 했다. 왜 보라돌이가 마지막에 나오지 않느냐고, 다음에는 꼭 보라돌이가 나오게 해달라고. 엄마의 말을 듣고서야 찬이는 젖은 눈망울을 쓱 닦아내고 “엄마, 진짜야?” 하며 배시시 웃었다. 지켜보던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때 나는 어엿한 초등학교 1학년이었으니까, 엄마가 전화로 시늉만 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번 방영 날 보라돌이가 마지막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우리는 엄마의 전화가 진짜였다고 믿어버렸다. 텔레토비는 영국 방송인데 엄마가 한국말로 통화를 했다는 사실은 새까맣게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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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때 찬이를 잃어버린 이야기도 해볼까. 엄마와 나는 집에서 자는 찬이를 두고 나와 동네 아줌마들과 옥수수를 나눠 먹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니 고작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찬이가 휘리릭 사라져버렸다. 신발장에 걸어 놓았던 집 열쇠도 찬이와 함께 사라졌다. 여섯 살짜리 꼬맹이가 혼자 갈 데가 어디 있을까. 엄마는 찬이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놀랐고, 엄마가 놀란 만큼 나도 덜컥 겁이 났다. 찬이를 영영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신발이 짝짝이인 줄도 모르고 이리저리 찬이를 찾아 뛰어 다녔다. 전화를 받은 아빠도 당황해서 집으로 바로 달려왔다. 우리는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찬이를 찾아 헤매었다. 그러나 찬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해는 어느새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경찰서에 전화를 걸려는데, 예슬이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찬이를 데리고 있다고. 예슬이는 나의 동네 친구였다. 예슬이를 만날 때 가끔 찬이를 데리고 간 적은 있지만 어떻게 찬이가 예슬이네 있다는 걸까.

우리는 예슬이네서 여섯 살 찬이를 만날 수 있었다. 엄마는 해맑게 웃으며 매달리는 찬이를 끌어안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는 둥, 아파트 단지에 있는 엄마를 보지 못했냐는 둥’ 끊임없이 물었다. 그러자 찬이는, 잠에서 깼는데 아무도 없어서 예슬이네로 갔단다. 예슬이와 내가 친하니까 거기 가면 나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엄마한테 혼날까봐 현관문도 단디 잠그고 열쇠도 꼭 품고 왔다고 말하는 찬이는, 우리를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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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리고 눈물 많고 침 질질 흘리며 배시시 웃던 꼬맹이가 어느새 커서 군대에 갔다. 이번에 6박 7일 휴가를 나오는데 집에는 이틀만 있겠다며, 전화로 일방적인 통보를 했다. 이미 친구들과 만날 계획을 다 짜놨다나 뭐라나. 엄마보단 아빠가 은근 섭섭한 눈치다. 부모님과 밥을 먹으며 찬이 이야기를 했다. 이제 커서 가족은 찬밥이라면서 뒷담화를 하다가 자연스레 어릴 적 이야기로 이어졌다. 쭈쭈바 이야기를 할 땐 웃겨서 숨이 넘어갈 뻔 했다. “걔가 참 순했어. 그땐 진짜 놀랐는데.” 하면서. 그렇게 한바탕 웃다가 어느 순간 먹먹함이 맴돌았다. 아빠가 숟가락을 탁, 놓으며 말했다. “아, 찬이 보고 싶다.”

기억은 희한하다. 이미 다 지나가버린 일인데, 곱씹을수록 커져서 추억이란 이름으로 뒤바뀐다. 그리고 추억은 더해질수록 점점 더 진하게 기억에 남는다.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사랑이 없는 줄 알았던 곳에서도 여전히 사랑이 불고, 나에게도 불어오고 있었음을 떠올릴 수 있다. 이별 후에 마음 아픈 사람, 인생이 버겁기만 한 사람, 사랑이 어렵다고만 느낀 사람에게 한줄기 위안이 되기를.

 

이 콘텐츠는 첫눈출판사에서 출간한 책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의 내용을 재가공한 것입니다. 청민 작가와 책에 대해 더욱 궁금하신 독자분들은 첫눈출판사 브런치로 방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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