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은 탄복을 부르고
반복은 탄복을 부르고
2017.02.17 15:37 by 시골교사

긴 대학과정에서 가장 공포스럽던 과목이 있다면 바로 ‘거시경제(Macroeconomics)’였다. 나는 이 과목을 무려 세 번 만에 통과했다. 만약 그 마지막 기회를 잡지 못했다면 학업을 아예 접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내용은 쉽고 이해도 가는데, 시험통과는 왜 이리 어려운지!

방향은 알겠는데…(사진:M-SUR/shutterstock.com)

 

| ‘마의 마크로(Makro)’, 거시경제

거시경제 시험은 50점짜리 주관식 문제 1개에, 5~10점을 주는 주관식 문제 서너 개, 그리고 OX문제(20문항 각 1점)로 구성돼있다. 역시 50점짜리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 질문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착각하면 50점이 그냥 날아가고, 합격은 물거품이 된다.

그렇다고 다른 문제들이 만만한 것도 아니다. 문장은 왜 이리 꼬아져 있는지… 채점 방식 또한 독특하고 살벌하다. OX문제를 틀리면 무조건 1점씩 감점. 섣불리 찍어 답을 했다가는 남는 점수가 없게 된다. 예를 들어 1점짜리 10문제 중 다섯 개가 맞고 다섯 개가 틀리면 빵점이 된다. 대학과정 모든 과목의 OX문제가 이런 방식으로 채점되기 때문에, 확실한 답이 아니면, 찍지 않고 넘어가는 게 상책이다.

거시경제의 무서움은 낙제율을 통해 잘 드러난다. 다른 과목의 낙제율이 40~50%에 달한다면 이 시험은 거의 60%에 이른다. 때문에 어떤 유학생도 이 시험을 한 번에 통과하는 경우가 드물다. 이 과목을 마의 거시경제라 부르는 이유다.

(사진:Palto/shutterstock.com)

나는 이 시험에서 두 번의 기회를 놓쳤다. 그러다보니 마지막 주어진 기회 앞에 심적인 부담이 상당히 컸다. 더구나 거시경제를 뺀 나머지 11과목을 모두 통과한 상태. 떨어지기엔 너무 억울했다.

사실 이런 상황은 처음부터 시험전략을 잘못 짠 내게 있었다. 무슨 자신감인지 대학과정 2학기 째에 겁도 없이 이 시험에 응시하여 보란 듯이 떨어졌다. 1년 만에 치른 두 번째 시험은 1점 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방학 때 주어진 세 번째 기회가 전부. 이 시험마저 떨어지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내게 필요한 학위를 위해선 다른 도시로 옮기는 방법뿐인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배수의 진’을 쳐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겨울 방학기간 내내 마음의 부담과 복잡한 심정을 안고 지냈다. 떨어질 걸 생각하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그런 불안을 달래는 길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 결과 마지막 3차 시험에서 2점(B플러스)으로 합격했다. 이 점수가 우스워 보이겠지만 독일 학생들에게서도 거의 나오지 않는 점수였다. 비법은 하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몇 번씩 떨어지며 반복에 반복을 거듭했다는 것. 이렇게 습득한 지식은 향후 관련된 과목을 공부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진:Constantin Stanciu/shutterstock.com)

 

|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라고?

현직 교사로서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할 경우가 많지만, 사실 ‘반복학습’만한 게 없긴 하다. 유학 생활 온 몸으로 터득한 진리랄까… 처음 독일학교에 편입하는 과정부터 그랬다.

독일 유학생의 편입 시험과 규정은 학교마다, 그리고 학교 안에서도 과마다 다르다. 우리 학교처럼 편입시험이 따로 없는 경우도, 학사자격만 있으면 편입시험을 치르고 바로 대학원으로 들어가는 대학도 있다. 우리 과의 경우, 같은 계열의 학사학위를 가진 유학생은 4학기 편입이 가능하다. 4학기 편입이라는 말은 대학과정의 필수과목 13개 중 8개 과목에 대해 시험면제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왔거나, 나처럼 전공과목을 바꾼 경우는 학점인정을 전혀 받지 못한다. 결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단 얘기다.

처음에 나는 이런 편·입학 규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수학기간을 줄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과사무실에 대학 때 배운 경제학 관련 7개 과목에 대해 학점인정(시험면제) 신청을 했다.

(사진:faithie/shutterstock.com)

얼마 후 편입신청에 대한 결과가 통보되었다. 거기에는 단 한 과목, ‘경제학 개론’만 인정해 주겠다고 적혀있었다.

'아니, 내가 대학에서 들은 풍월과 받은 점수가 얼마인데… 게다가 학교에서 가르친 경력이 있는데 이 정도 밖에 인정을 안 해줘?'

기분상한 건 둘째 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수학기간을 단축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 교수님의 충고

유학기간은 현실적인 문제와 결부된다. 기간 단축에 사활을 걸어야 했던 이유다. 결국 담당교수님을 직접 만나기로 마음먹고, 교수실 문을 두드렸다. 그 자리에서 대학 때 나름 잘나가던 성적표를 들이밀었다. 여기에 교사경력 10년 6개월, 그것도 고등학교에서 경제과목을 가르친 사실을 운운하며 경제학 7과목에 대한 시험면제를 요구했다.

나름 먹힐만한 카드라고 생각했지만, 담당교수의 원칙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과가 다르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대학졸업 후의 공백 기간이 너무 길다는 점을 또 하나의 이유로 들었다. 이미 배운 내용이라고 해도 독일어로 개념을 다시 익히는 것이 나중의 학업진행을 위해 낫다는 말로 오히려 나를 설득했다.

그런 교수의 말이 그 자리에서 내 귀에 제대로 들릴 리가 없었다. 이 사회는 왜 이리 융통성이 없는지 오히려 답답하기만 했다. 하지만 교수와 학교의 이런 입장을 받아들이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결국 나는 경제학부 1학년생이 되어 검은 머리가 다 새어지도록 이를 악물고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 때는 그것이 얼마나 억울하던지… 하지만 교수의 원칙, 그에 따른 충고는 결국 옳았다. 학년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기초부터 차근차근 반복해 쌓아올린 학업능력은 내게 크나큰 도움이 되었으니 말이다.

 

d_500

독일인의 자아비판

개인적으로 어디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시간 있다고 친구들 만나 수다 떠는 일도 거의 없죠. 원래도 그랬는데, 결혼하고부턴 이런 성향이 더욱 굳어지고 강해졌어요. 혹시 짬이 나도 웬만하면 집과 가족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냥 집에서 푹 쉬는 것이 낫다’는 주의죠. 

독일에 와서도 그런 성향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턴가 근력이 심하게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 운동 생각을 하게 됐지요. 이것저것 재보다가 찾은 게 독일에서 유명한 축구고, 덕분에 지금은 열혈 축구팬이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매년 유럽축구 시즌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릴 정도죠. 

(사진:Beto Chagas/shutterstock.com)

독일 축구경기를 보면, 독일인들이 참 무섭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독일 프로축구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면 이긴 팀은 물론이고, 진 팀조차도 어떤 이유로 경기를 졌는지 스스로 분석하고 자아비판을 해야 합니다. 팀의 주장과 감독은 팬과 시청자들 앞에서 스스로 진 경기를 인정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죠. 경기에서 진 것도 속상할 텐데 말이죠.

 그런 자아비판과 책임의식은 축구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이뤄집니다.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모여 사회를 건강하게 발전시키는 게 아닐까요?


The First 추천 콘텐츠 더보기
  • ‘성장의 상징, 상장’…스타트업들의 도전사는 계속된다
    ‘성장의 상징, 상장’…스타트업들의 도전사는 계속된다

    자본과 인력, 인지도 부족으로 애를 먹는 스타트업에게 기업공개는 가장 확실한 대안이다. 단숨에 대규모 자본과 주목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래 파트너와 고객은 물론, 내부 이...

  • “24주 연속 1위 브랜드의 저력으로”…‘나르카’ 운영사 ‘언커먼홈’, 매쉬업벤처스 등으로부터 후속 투자 유치
    “24주 연속 1위 브랜드의 저력으로”…‘나르카’ 운영사 ‘언커먼홈’, 매쉬업벤처스 등으로부터 후속 투자 유치

    이제 헤어 케어도 브랜딩이다!

  • “최근 가장 눈에 띄는 창업팀은?”…유망 초기 스타트업 뽑는 ‘혁신의 숲 어워즈’ 막 올랐다
    “최근 가장 눈에 띄는 창업팀은?”…유망 초기 스타트업 뽑는 ‘혁신의 숲 어워즈’ 막 올랐다

    현시점에서 가장 기대되는 스타트업 30개 사는 어디일까?

  • “Only for you”…대세는 초개인화 서비스
    “Only for you”…대세는 초개인화 서비스

    초개인화의 기치를 내건 스타트업들이 존재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

  • 타 산업과 연계, 핵심 기술 접목…“관광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라”
    타 산업과 연계, 핵심 기술 접목…“관광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라”

    '관광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 틈새에 대한 혁신적인 시도 돋보였다!

  • “생산성, 효율성 쑥쑥 올리는 솔루션”…매쉬업벤처스, 스타트업 ‘마일 코퍼레이션’에 초기 투자
    “생산성, 효율성 쑥쑥 올리는 솔루션”…매쉬업벤처스, 스타트업 ‘마일 코퍼레이션’에 초기 투자

    기업의 공간, 자산 관리를 디지털 전환시킬 창업팀!

  • “당신에겐 더 큰 무대가 필요하다”…스타트업의 해외진출을 지원하는 스타트업
    “당신에겐 더 큰 무대가 필요하다”…스타트업의 해외진출을 지원하는 스타트업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는 스타트업의 등장!

  • “국내 기업의 글로벌 성장 발판 마련”…한국액셀러레이터협회, 뉴저지 진출 전략 웨비나 개최
    “국내 기업의 글로벌 성장 발판 마련”…한국액셀러레이터협회, 뉴저지 진출 전략 웨비나 개최

    국내 유망 스타트업의 미국 진출, 맞춤형으로 지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