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성 파라오 ‘메르네이트’
최초의 여성 파라오 ‘메르네이트’
2017.05.11 11:47 by 곽민수

‘이집트 최초의 여성 파라오’하면 흔히 떠오르는 인물이 신왕국 시대의 하트셉수트입니다. (실제로 저의 지난 연재 <고고학자와 함께하는 이집트 유적 기행>에서 하트셉수트를 ‘이집트 최고의 여성 파라오’라 칭하기도 했습니다) 하트셉수트가 ‘여걸’이라 불릴만한 걸출한 인물이었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녀를 ‘최초의 여성 파라오’라고 명명하는 건 사실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이집트에는 하트셉수트 이전에도 여성 파라오들이 있었습니다. 고왕국 6왕조 시대의 니토크리나, 중왕국 12왕조 시대의 소베크네페루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이들보다도 훨씬 더 앞서, 이집트 문명이 탄생한 직후인 초기왕조 시대에 이미 여성 파라오가 있었습니다. 이번 회의 주인공은 바로 그 ‘최초의 여성 파라오’ 메르네이트(Mer-Neith: 네이트 여신의 사랑을 받는 자) 입니다.

메르네이트의 존재가 고고학적으로 가장 분명하게 확인되는 장소는 아비도스(Abydos), 움 엘-카브(Umm el-Qa’ab)에 있는 ‘Y 무덤’입니다. 실제 그녀의 무덤이죠. 움 엘-카브는 1왕조 시대 파라오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일종의 왕실 공동묘지입니다. 40개가 넘는 부속 무덤과 함께 만들어진 메르네이트의 거대한 무덤은 인근에 세워진 다른 남성 파라오들의 무덤과 그 규모에 있어서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무덤 내부에서 발견된 다양한 기록물들과 석비에 쓰여진 그녀의 이름은 그 당시 왕명을 쓰는데 사용되던 세레크와 함께 쓰여지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여성 파라오에 대한 당대의 사회적 저항이 낳은 결과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훨씬 더 후대인 신왕국 시대에 작성된 여러 왕명표에서도 메르네이트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메르네이트의 무덤
움 엘-카브의 무덤 배치도. 빨간색 상자로 표시된 부분이 메르네이트의 무덤

하지만 그녀의 무덤이 보여주는 거대한 규모와 그 무덤이 남성 파라오들의 무덤과 일련의 무덤군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에 메르네이트가 ‘실질적인 파라오’로 역할을 수행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메르네이트의 아들인 파라오 덴(Den)의 무덤에서 발견된 인장에서는 그녀의 이름이 다른 1왕조 파라오들의 이름과 함께 등장하기도 합니다.

현대의 학자들은 이러한 정황들을 토대로 고왕국 5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팔레르모 비석 왕명표의 훼손된 부분에는 메르네이트의 이름이 분명히 쓰여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현대 이집트학계에서 권위 있는 개론서로 쓰이는 <The Oxford History of Ancient Egypt>의 왕명표에도 메르네이트의 이름은 포함돼 있습니다.

'The Oxford History of Ancient Egypt'의 왕명표 부분

메르네이트는 파라오 제르(Djer)의 딸이자 제르의 왕위를 계승한 제트(Djet)의 아내였습니다. 제트는 그의 아들인 덴(Den)이 성인이 되기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것이 메르네이트가 파라오직을 수행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는 아들을 위해서 어머니가 섭정을 시작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파라오직을 수행하는 경우는 이후에도 이집트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던 가장 유명한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의 경우에도 그의 아들 뻘되는(이 경우에는 하트셉수트의 남편인 투트모스 2세가 다른 왕비에게서 낳은 아들) 투트모스 3세를 대신하여 섭정을 시작했다가 직접 파라오가 되었습니다.

워낙 초기 시대의 역사이다 보니 메르네이트가 덴의 섭정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명시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씀드린 몇 가지 자료들은 메르네이트가 파라오 혹은 파라오에 준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을 강하게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또 다른 정황증거 중에 하나는 후대의 왕명표에 기록된 42년에 이르는 덴의 상대적으로 긴 재위 기간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어린 파라오의 어머니가 일시적으로 왕권에 대해서 권리를 갖게 되는 상황은 신화적으로 그 정당성이 뒷받침 됩니다. 널리 알려진 오시리스 신화 속에서 이시스 여신은 오시리스의 갑작스러운 죽음 속에서 어린 아들 호루스를 훌륭한 왕위 계승자로 키워내는데, 이와 같은 신화적 서사는 메르네이트나 하트셉수트가 보여준 역사적 사례와 구조적으로는 완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여성에게 ‘어머니의 역할’이나 ‘아내의 역할’이 강조되는 것은 여전히 성차별적인 습관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와 같은 습관 속에서도 고대 이집트에서는 여성도 경우에 따라서는 파라오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고대 이집트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남성에 비하여 특별히 낮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초기왕조시대보다는 훨씬 더 후대의 스타일이긴 하지만, 신왕국 시대에는 아내가 남편을 마치 남동생 돌보듯이 다정하게 감싸주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부부상이 자주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아멘호테프 우세르와 타네트와디 부부상. 신왕국 아멘호테프 2세 시대. 기원전 1428-1397년 경. 독일 베를린 신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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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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