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사연: 로라가 모르는 이야기
아홉 번째 사연: 로라가 모르는 이야기
2017.06.05 14:47 by 오휘명

 

SENING_BLUE

잘못 도착한 편지뭉치

(사진:Impact Photography/shutterstock.com)

#첫 번째 장

있잖아, 로라. 나는 처음부터 너를 시샘하진 않았던 것 같아. 대학교 스무 살일 때, 173센티의 큰 키에 늘씬한 몸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너와 163센티의 작은 키에 그저 그런 몸매, 서울말을 쓰는 나는 친구가 됐어. 우린 누구보다도 친했고 가끔은 일탈마저도 함께하는 사이였지. 나는 어느 날 너에게 영국에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어, 뜬금없게도 말이지.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경험을 쌓기 위해서와 같은 그럴듯한 이유를 대가면서 말이지. 그런데 넌 딱히 큰 고민도 없이 아버지께 전화를 걸더니, 이내 내게 가자고 말하더라. 나는 사실 조금 놀랐어. 물어 본 지 두어 시간 만에 답변을 줄지는 몰랐거든. 그렇게 우리는 급하게 비행기 표를 끊고, 급하게 비자를 받아서 나란히 한국을 떠났어. 대형 사고를 친 거지. 그때의 넌 만난 지 갓 반년이 지난 연인과 생이별을 하고 비행기에 올랐어. 그게 어떤 느낌이었는지 나는 사실 아직도 잘 몰라. 나는 두고 갈 사람이 없었으니까. 10시간이 지나 영국에 도착한 우리는 남쪽 바다도시에 둥지를 틀었어. 그리고 우리는 생활력을 길러야 한다는 이유로 다른 곳에서 따로 살기로 입을 모았지. 지금 생각해보면 한번쯤은 같이 살았어도 재미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우리는 매일 해변에 나가 일광욕을 했고 낮 시간엔 간단한 요깃거리를 들고 도심 한가운데 있는 공원에 갔어. 바닥에 아무것도 깔지 않은 채로 털썩 앉아 점심을 때웠어. 그리고 책으로 얼굴을 가린 뒤 햇빛 아래에서 몇십 분을 꼬박 졸며 한적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 적응을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취지에서 모든 것에 느리고 더디게 임했었던 것 같아.

 

#두 번째 장

영국생활을 시작한 지 5개월이 지났을 때쯤이었을까. 너를 시샘하는 마음이 생긴 건 이때부터였던 것 같아.

살기 위해 발악해서였을까, 너와 나의 언어능력은 입도 떼지 못했었던 처음과 달리 생각보다 꽤 늘어있었어. 하지만 순수 100%의 노력파에 재능이라곤 1%도 찾아볼 수 없는 나와는 달리, 너는 스펀지 같은 흡수력으로 상당히 빨리 영어를 익혔어. 누군가와 대화를 하게 되면(특히 말 빠른 이태리 남자) 너는 능숙하게 대화를 이어나갔지만, 난 그 옆에서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어.

너는 좋은 집에서 지냈었어. 처음 살던 집에서는 한 달 정도만 지내다 플랫으로 이사를 갔고, 거기서 세 달이 더 지난 뒤 지인의 소개로 라이언의 펜트하우스에서 홈스테이를 하게 됐지. 너는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을 했어, 이런 집에 살고 있다고. 네게 초대받아 그곳에 놀러 갔을 때, 수영장에 큰 잔디밭, 으리으리한 그 집에 들어가자마자 감탄했던 내 모습을 아직도 난 기억해. 네가 너무 부러웠어.

몇 주 뒤, 나는 네게 파리여행을 가자고 말했어. 여행을 썩 좋아하지 않았던 로라 너는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온종일 봤던 에펠탑을 왜 꼭 굳이 가서 봐야 하냐고 툴툴댔지. 사실 나 그 말을 들었을 때 기가 찼었다면 믿겠니? 끝내 너는 알겠다고 말했지만 기차표와 여행계획은 모두 내게 부탁했고, 가기 전날까지 여행준비는 하나도 하지 않았어. 네가 조금 밉긴 했지만 가야겠다는 의지로 나는 모든 걸 혼자 준비했어. 그렇게 우리는 파리에 도착했어. 따뜻한 크루아상과 커피를 마시고 마르스광장 쪽으로 걸어갔어.

너의 눈을 가리고 있다가 샤이오 궁 앞에 서서 내가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린 순간, 눈앞의 반짝이는 에펠탑을 본 너는 동공이 확장되는 동시에 환하게 웃더라. 그걸 본 나는 카메라를 꺼냈고 우린 동영상을 찍으며 렌즈에 대고 주문을 걸었어.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5년 안에 다시 오게 해달라고. 그런데 웃기게도 나, 이번 가을에 다시 파리에 가게 됐어.

솔직히 그날 그때의 네 웃음으로 너에 대한 시샘이 조금은 사라졌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때뿐이었나 봐. 영국으로 돌아와 학교에서 시험을 치른 날, 나는 낙제했고 너는 통과했어. 네게 습득력이 아주 좋다고 칭찬하신 벤 선생님은 내게는 잔잔한 미소만 보이신 뒤 강의실 문을 나가셨지. 좋은 결과를 듣고 웃으며 ‘빨리 가자!’라고 말하는 네게 나는 웃으며 대답할 수 없었어.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싶은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동시에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느낄 수 있었던 비교하는 시선은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고 너를 시샘하도록, 널 미워하게끔 했어. 그때 가장 널 시샘했던 것 같아. 네가 그냥 한국에 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시험이 끝나고 집에 걸어가며 나는 한참을 울었고, 지나가던 미국경찰처럼 덩치가 큰 영국경찰은 나를 세워 무슨 일 있냐고 물었어.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꺼이꺼이 울며,

“I just wanna go home”

이라 말했어. 다만 그 대화에서 벗어나고 싶었어. 그래도 눈치는 있었는지 그는

“Everything will be fine dear”

라며, 적적한 위로를 건네곤 나를 보내줬어. 아마도 내가 어딘가에서 어떤 사고라도 겪은 줄 알았나 봐. 그렇게 그를 지나쳐 집에 가는 길에 다시 생각했어. 너와 난 뭐가 그렇게 다른지에 대해서.

10파운드가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나는 10파운드짜리 머리핀을 샀을 사람이었고 너는 1파운드짜리 머리끈 10개를 샀을 사람이었어. 나는 술을 좋아하고 맥주라면 사족을 못 썼지만 로라 너는 맥주 반병도 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나는 아삭아삭 과즙이 넘쳐흐르는 느낌의 사과를 좋아했지만 너는 속이 팍팍한 사과를 좋아했다는 것(그래서 종종 바꿔먹기도 했었지).

우린 그렇게 다른 사람이었어. 그리고 나는 타국에 있다는 심리적 불안과 유럽인들 사이에 한국인은 우리 둘밖에 없는 상황을 빌미로 너와 나 자신을 그렇게 비교했었어. 너는 너고 나는 나였는데 말이지.

(사진:JuliusKielaitis/shutterstock.com)

#세 번째 장

영국에 도착한 지 7개월째, 나무가 붉고 노란 빛으로 물들 쯤의 어느 일요일, 우리는 여느 날처럼 교회를 갔었어. 그런데 그날은 너의 감정과 마음속에 있던 모든 게 활화산처럼 폭발했던 날이었나 봐. 넌 예배가 시작되기 전부터 화장실에 들어가 삼십 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어.

내가 기도가 끝날 쯤에 가서 문을 두드리니, 너는 온 얼굴에 눈물을 범벅한 채 문을 열어줬어. 이유인즉슨 갑작스럽게 찾아온 향수병 때문이었어. 가족에 대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넌 낯선 곳이 아닌 원래의 자리를 그리워하고 있었어. 이 일이 있기 며칠 전부터 너는 전화로 엄마가 보고 싶다, 사랑하는 그가 보고 싶다고 넋두리를 했었는데, 이성적이기만 했던 나는 위로는커녕 약해지지 말라는 소리만 해댔지.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절대 그런 식으로 말하진 않았을 거야. 그렇게 보름하고도 일주일 뒤, 너는 한국으로 돌아갔어. 그리고 나는 혼자가 됐어.

로라, 막상 네가 떠났을 땐 섭섭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네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게 떠올라 섬뜩하기도 했어. 혼자 학교를 다니며, 너도 알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 안젤리나와 꽤 친하게 지냈지만 그렇게 지내다가도 집에 돌아오는 길엔 이따금씩 네가 그리웠어. 그리고 생각했지, 무엇을 위한 시기와 시샘이었을까.

한국에 돌아간 너는 종종 내게 스카이프를 걸어 잘 지내냐는 심심한 안부와 함께 보고 싶다고 말했어. 영국에서의 네 우울한 눈빛과는 달리 네 표정은 아주 행복해 보였어.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이 그날 그 노트북 앞에 서렸던 것 같아. 그런 너와의 짧은 통화를 끝으로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서 공부를 했고, 쉬는 날엔 무조건 여행을 갔어. 어느 날은 침대 프레임에 기대 펑펑 울기도 하며 더욱 단단하고 견고해지는 시간을 보냈어. 마침내 나는 시험을 패스했어. 마음고생을 했기 때문인지 학교와 집을 걸어 다닌 덕분인지, 거울을 보니 사람이 보기 좋게 야위어 있더라. 그로부터 두 달 뒤였나, 스산한 바람과 함께 영국 전역에 비가 오던 날, 나는 바르셀로나 여행을 끝으로 한국에 돌아왔어. 만으로 계산되던 나이가 11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하는 순간 갑자기 두 살이나 많아지니 퍽 혼란스러웠어.

 

#네 번째 장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파리여행을 준비하던 그때의 너는 나를 온전히 신뢰했던 게 아닐까 생각돼. 본성은 게으르지 않았던 너는 나를 믿고 따라줬고 내 계획에, 그리고 그게 대부분이 걸어 다니는 힘든 여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불만도 내뱉지 않고 나를 따라줬던 것. 나를 온전히 믿어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해.

세월이 흘러 주름이 꽤 생겼을 즈음, 그때 나는 다시 네게 물어볼 생각이야. 또한, 지금 물어보는 거지만 두 번의 이사는 어땠니? 세 번째 집에 가서야 온전히 생활할 수 있었던 그 여렸던 마음은, 타국에서의 향수병을 비롯한 마음고생들은, 네 영국생활의 마이너스 요소가 됐던 것 같아. 넌 원칙주의자인 영국인들에게 이미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고, 그때부터 마음이 조금 떠있었던 것 같아. 이 생각을 진즉 했으면 좋았을 텐데. 네게 애증만을 느꼈던 나는, 그때는 내 자신을 살피기에도 바빴다고 핑계 아닌 핑계를 할 수밖에 없어. 투명했던 너와 내 사이에 나는 시샘이라는 보이지 않는 진흙을 섞어 놓았던 것 같아. 우리는 서로 다른 삶의 끈을 잡고 있었고 다른 길을 가던 사람이었는데, 시샘과 선입견에 사로잡혔던 스물하나 앳된 아이의 마음엔 왜 그런 마음만 가득했던 건지. 그때의 나를 용서해줬으면 해.

지금의 너는 그 당시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을 했고, 너의 고향과 가까운 대구에 내려가 영어선생님을 하고 있어. 나는 서울에 남아 평범한 회사원이 됐어. 무엇보다 매일 보던 그 시절과 다르게 된 건, 두세 계절이 바뀔 때나 우린 겨우 한 번 만나게 된다는 거야.

로라, 오늘의 너는 잘 지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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