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불친절한 날에는
세상이 불친절한 날에는
2017.07.07 17:07 by 지혜

윌리엄 스타이그 쓰고 그린, <용감한 아이린>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겪을 때마다 새삼스럽다. 세상은 퉁명스럽고 무뚝뚝하다. 참 불친절하다. 이것도 꾸준하면 적응이라도 쉽겠는데 간혹 내 편을 들며 다정하게 굴 때도 있어 안심하다가 뒤통수를 맞는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늘 변덕을 부리니, 세상 산 지 삼십 년이 훌쩍 넘었어도 여전히 어렵다.

초록이가 열이 높다고 어린이집 선생님이 전화를 하셨다. 목이 부으면 열이 나는 아이라서 바로 이비인후과로 데려갔다. 진료를 받다가 터진 울음이, 진료가 끝나고 처방전을 받고 계산을 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내내 그치지 않는다. 나의 인내심은 바닥이 나버렸고 그만 좀 하라고 혼을 냈다. 우는 소리가 더 커진다. 모르는 척 냉정하게 굴었다. 엄마, 엄마 하며 우는 소리가 좀 잦아들기에 곁눈질로 초록이를 보는데, 이상하다. 제대로 서 있지를 못한다. 급하게 이름을 부르며 안아 올렸다. 아이의 두 손과 두 다리가 뒤틀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럴 때 보호자는 침착해야 한다는데 침착하지 못했다. 다급하게 아이 이름을 불러대며 다시 병원으로 올라갔다. 얼른 옆 건물에 소아과로 가보라고 한다. 그만 울라고 혼을 내던 그 순간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17kg 아이를 부둥켜안고 뛰다시피 계단을 오르고 내리니 팔과 다리가 후들거렸다. 소아과에 가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때까지도 아이의 손발은 뒤틀려 있었다. 설명을 다 들은 간호사의 대답은, “앞에 대기 환자 두 명이 있으니까 좀 기다리셔야 돼요” “죄송하지만 좀 빨리 봐주시면 안 될까요” 했더니 “기다리세요” 한다.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지금 바로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택시가 잡히지 않아서 콜택시를 불렀다. 마음이 급했다. 콜택시를 기다리는 중에 다른 택시가 내 앞에 섰다. 바로 타버렸다. 다만 몇 분이라도 병원에 빨리 가고 싶었다. 콜택시 기사님의 전화를 받았다. “죄송해요 제가 다른 택시를 탔어요” 저쪽에서 짧은 한숨 소리가 들린다. 대답도 없이 신경질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사진:Melpomene/shutterstock.com)

병원에 도착했다. 고열로 축 늘어진 아이는 내 품에 안겨 있었다. 남은 한 손으로 아까 받았던 의뢰서를 내밀었다. 접수처에 직원은 힐끗, “의뢰서 접수는 오른쪽으로 쭉 가시다가 왼편에서 하세요” 나는 좀 지쳐있었다. “여기서 그냥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의뢰서 접수 안 하실 거에요? 안 하실 거면 여기서 해드리고요” 아무 말 없이 그 직원과 헤어졌다. 오른쪽으로 쭉 가서 왼편에 있는 곳에 갔더니 “열이 나서 경기한 거 아닌가? 그럼 응급실로 가셔야 돼요. 응급실 앞에 접수처 따로 있어요” “응급실 어디에 있어요?” “병원 입구로 나가서 오른쪽이요”

응급실에 들어갔다. 이제 치료를 받을 테니 다 괜찮다, 안심이 되면서 힘이 빠졌다. 옷을 갈아입히고 기다리라고 했다. 입원복은 싫다며 더 우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20여 분을 기다렸다. 드디어 의사가 왔다. “소아 신경과를 보셔야 될 것 같은데 지금 교수님이 출장 중이세요. 다른 병원 응급실로 가세요” 당황스러웠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나요?” “글쎄요, 전화해서 물어보세요”

다시 입원복을 벗기고 입고 왔던 옷을 입혔다. “엄마, 왜 우리 나가래?” 기운 없이 안기는 아이 목소리에 이를 악물었는데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디로 데려가야 하나 막막했다. 아무데나 서서 다른 병원 응급실 전화번호를 검색했다.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는 등에 업었다. 헝클어진 머리가 자꾸 눈을 가렸다.

“어차피 지금 오셔도 자리 없어요.”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들 쌀쌀맞다. 이쯤 되니 집에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 몸이 아닌 아이의 몸이라 그만 둘 수도 없다. 목덜미에 닿은 아이의 이마가 너무 뜨거웠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다른 병원 응급실과 연결이 되었고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집에서 30분이면 닿는 곳인데 오늘은 왜 이렇게 멀고 험한지. 열이 높은데 많이 울어서 일시적으로 과호흡이 온 것이니 괜찮다고, 열 내리는지 잘 체크하라는 가벼운 당부를 들었다. 다행이다.

어린이집 선생님께 3시에 전화를 받았는데 초록이는 7시가 다 되어 겨우 해열제를 먹었다. 집에 가는 길, 어느새 밤이 내린다. “어쩜 다들 이럴 수 있어” 소리 높여서 나를 스친 사람들을 원망했지만 알고 있다.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저마다의 이유로 제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그냥 그런 날이 있다. 예상치 못한 소나기를 만나 온몸이 젖어버리듯, 아무런 준비 없이 퉁명스럽고 무뚝뚝한 세상으로 나가버린 날.

 

 

지친 하루를 위로하는 결말,

<용감한 아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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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몸만큼 커다란 상자를 들고 눈보라에 맞선다. 나무들도 못 견딜 정도로 바람이 대단한 것 같은데 힘주어 굳게 다문 입술을 보니 끝까지 가려나 보다. 비장함마저 감돈다. 용감한 아이린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아이린은 아픈 엄마를 대신해서, 엄마가 만든 드레스를 오늘 밤이 되기 전에 공작 부인에게 갖다 주기로 한다. 추위와 눈과 바람이 끊임없이 괴롭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내 공작 부인의 집에 도착해 무사히 드레스를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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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이야기에 비해 책이 꽤 두껍다.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 힘겹게 한발씩 앞으로 나아가는 아이린의 여정을 아주 자세히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은 소중한 옷 상자를 덮쳐 드레스를 저 멀리 날려 버린다. 눈은 아이린의 발목을 낚아챈다. 추위는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이죽거린다. 아이린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겪었던 ‘그런 날’을 떠올리게 된다. 유난히 불친절한 세상 속에서 혼자 걸어야 했던 날. 어쩌면 작가도 그런 날을 보내고 돌아와 이 그림들을 그렸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늘 즐겁고 쉬울 수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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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공작 부인의 집에 도착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 펼쳐진다. 바람에 날아가 버렸던 드레스가 나무에 걸려있다. 마치 아이린을 위한 선물처럼. 드레스를 되찾고 문을 두드린다. 마침내 문이 열리면, 누구라도 와, 하고 작은 감탄을 터트리게 될 것이다. 이 그림책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면이다. 아이린을 반기는 사람들의 미소 때문이다. 이렇게 나타난 아이린의 존재를 기꺼이 기뻐하고 고마워하는 얼굴들. 고된 하루를 보내고 온 나도 아이린이 되어 위로를 받는다.

혼자서 눈을 헤치고 산을 넘어온 용감한 아이린, 이제 그 앞에는 따뜻한 저녁과 근사한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행복한 밤이 남았다.

포기하지 않고 용감하게 위기를 넘긴 주인공에게는 크든 작든 행운과 행복이 따른다. 사실 진부한 결말이다. 하지만 진부함은 반복에서 오는 것이고 반복은 진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닐까. 가치 있기 때문에 되돌아오는 것.

불친절한 세상에 지친 하루는, 진부한 결말이 필요하다.

아픈 아이를 안고 눈을 헤치고 산을 넘었다. 힘든 하루였다. 뭐, 잠깐 울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 용감한 엄마였다. 집에 무사히 돌아왔으니 되었다. 이제 내 앞에는 행복한 밤이 남았다. 고기를 굽고 맥주를 마신다. 마주 앉은 남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험담을 들려주듯 얘기한다. 따뜻한 물에 오래오래 샤워를 하고 아이를 꼭 껴안고 잠든다. 동그란 얼굴이 꼭 복숭아같이 예쁘다, 예쁘다 하면서.

  Information

 <용감한 아이린> 글·그림: 윌리엄 스타이그 | 역자: 김서정 | 출판사: 웅진닷컴 | 발행: 2000.12.28 | 가격: 7,500원

 

 /사진: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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