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으로
평택으로
2017.08.22 13:10 by 김석준

해경은 지난 이십 대를 생각하면 달콤했던 것보다 씁쓸했던 기억이 먼저 떠올랐다. 상냥한 인사보다는 냉정하게 자신을 밀어내던 순간들. 그가 남들보다 조금 부정적이긴 하지만, 단순히 그의 타고난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격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가, 스스로가 만드는 것인가, 두 가지 이론 사이에서 해경은 확실히 전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는 만들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고백이라는 것을 했다.

“나, 너 좋아해.” “미안. 내가 지금 연애할 상황이 아니라서... 나중에 고백하면 모르겠는데, 지금은 정말 아닌 것 같아. 교환학생 준비도 해야 하고, 시험공부 할 것도 많은데, 연애할 때는 아닌 것 같아.”

(사진: Juri Pozzi/shutterstock.com)

해경은 그 거절 이유를 듣고 하마터면 ‘그래, 맞아 네가 요즘 좀 바쁘지’라고 말할 뻔했다. 그게 거절에 대한 포장이었다는 건 이미 캠퍼스 커플이 되어버린 그녀를 보고 알았다. 나중에 고백한 유정, 수연 역시 똑같은 이유를 말했기 때문이다. 될 게 안 된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쨌든 첫 고백을 시작으로 9년 동안 9번의 고백이 더 있었고,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친구들은 어쩌면 굉장히 대단한 녀석이라고 말을 한다. 쓰러질지언정 무릎 꿇지 않는다는 말을 남긴 박지성 정신의 후계자라며 치켜세웠다.

해경을 도와주기 위해 친한 친구 몇몇은 소개팅을 제안했다. 하지만 해경은 단 한 번의 소개팅도 하지 않았다. 그건 그의 이상한 아집 때문인데, 대부분의 남자는 처음 본 여자가 이상형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반대로 해경은 ‘처음 본 여자’에게는 아무런 끌림도 못 느끼기 때문이다. 일반 남자와 자신의 차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취향과 가치관 등 대화가 얼마나 잘 통하느냐이지 외모가 다는 아니라고. 그래도 이상형은 있을 것 아니냐며 물으면 태연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확고한 연애관처럼 그의 솔로 상태도 확고했기에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언제나 숙제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쟤는 언제 연애하고 결혼하냐”, “진정한 사랑을 해봐야 어른이 된다” 등. 걱정의 탈을 쓴 훈계는 대부분 그를 향해있었다. 스무 살, 첫 고백이 실패하고 난 뒤에는 그런 너는 사랑을 아냐며 술에 취해 쏘아붙였지만, 언젠가부터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들었다. 군대를 갔다 오고 난 뒤부터, 해경은 계속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어디로 떠나게?” “모르겠어. 서울이 아닌 곳으로.” “그럼 경기도로?” “몰라, 그냥 서울만 아니면 될 것 같다.”

해경이 떠난 곳은 놀랍게도 서울과 멀지 않은 평택이었다. 왜 평택이었냐고 물었을 때, 그곳에 군대 동기가 한 명 있어서라고 했다. 그렇게 2년 동안 평택에 살았다. 평택에 사는 동안 그는 서울에 단 한 번도 올라오지 않았다. 몇몇 친구들은 송년회와 신년회에 부르려고 했지만, 그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친구들 무리 중 해경이 걱정돼서 직접 평택에 찾아간 친구가 있었다. 그때 들은 바로는 해경이 사람과 만나는 게 지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게 내 맘처럼 되지 않는 게 당연하지만, 나를 밀어내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고 그걸 견디면서도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라고 했다. 도구로 쓰는 사람, 목적으로 소비하는 사람. 그럴 때마다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사는 게 훨씬 좋다고. 어느 곳에서 쓰이지 않고 온전히 나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2년 뒤 왜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까.

사실 그에게는 단 한 번의 연애가 있었다. 바로 평택에서의 생활 중에 있었다. 해경은 알바를 하는 시간을 빼곤 방 안에서 책만 읽었다. 그러니 사람과 얘기하는 시간은 하루 6시간, 편의점근무 시간뿐인 것이다.

(사진: Sorbis/shutterstock.com)

그 사람과도 알바를 하다가 만났다. 근무 시간이 겹쳐 하루에 1시간을 같이 카운터를 봤다. 세상과 만나는 유일한 사람인 그녀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서울의 친구들과는 달리 가만히 있는 사람이었다. 바쁘게 살지도 않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강요하지도 않았다. 해달라는 것도 없었고, 딱히 해주는 것도 없었다. 사람이나 문제를 쉽게 판단하지 않았다. 야당과 여당의 문제를 무 자르듯 말하지 않았고, 어떤 말을 해도 거부하지 않고 상대방의 이야기가 끝나면 말을 했다. 예뻤고, 착했다. 사귄 지 일주일이 지나고 사랑한다고 말했고, 3개월쯤이 지났을 때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으며, 6개월이 지나고 동거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일 년이 지날 때쯤, 그런 관계도 지겨워졌고, 해경은 그때쯤 자신이 어디쯤 있는 건지 생각했다. 피하는 것이었다. 평택은 자신을 감싸 안았지만, 결국 숨어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는 여자에게 말했다. “그만 만나자 우리, 너도 알다시피 서울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더 바빠질 것 같아.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될 것 같아.”

사실 그 말은 진짜 헤어지는 이유가 아니었다. 그런 자신이 싫어 눈물이 났다. 여자는 해경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항상 그랬듯이 그의 헤어짐에 대한 변을 듣고 난 뒤 차분히 말했다.

“사람을 밀어낼 때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어. 그래야 자기가 덜 아프거든. 사람은 원래 이기적이니까, 미안해하지 마. 나도 그랬고, 다들 그래.”

 

해당 콘텐츠는 김석준 에디터가 출간한 책 <안녕의 안녕>에서 발췌했습니다. 작가와 책에 대해 궁금하신 독자분들은 링크(예스24)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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