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힘이 되어주길
책이 힘이 되어주길
2017.08.22 15:40 by 지혜

오드리 니페네거 쓰고 그린, <심야 이동도서관>

우리 동네에 작은 서점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서점의 단골손님이 되기로 결심했다. 낯선 사람 앞에서는 새침하고 얌전하기 이를 데 없는 내가 먼저 나서서 단골이 되겠다니, 아주 큰 결심이었다. 어떤 곳이든 단골에게는 특혜가 있다. 과일 가게에서 복숭아를 샀을 때 덤으로 오는 사과 몇 알처럼, 대단한 이익은 아니지만 몹시 뿌듯하고 으쓱한 기분이 드는 것. 그간 새침과 얌전을 떠느라 단골손님의 특혜는 포기하고 살았는데 동네 서점에서는 꼭 누려보고 싶었다. 목적 없이 서점을 한참 어슬렁거리며 책을 살피다가 서점 주인이나 또 다른 단골손님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지적이고 낭만적인 장면의 주인공 자리를 탐냈다.

그 날은 그런 날이었다. 서점 주인과 안부를 나누고 이제는 익숙한 서가를 느긋하게 둘러보다가 가볍게 책 한 권을 들었다. 구불구불하게 쓴 <읽는 삶 만드는 삶> 아래 ‘책은 나를, 나는 책을’이라는 부제가 궁금했다. 책에 대한 책으로, 작가가 읽었던 책과 겪었던 경험을 기억하는 이야기다. 앞에 몇 장 읽고 나서는 재미있지만 가질만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되어 두고 나왔다. 재미있으니 안 읽기는 아쉽고 서점에 갈 때마다 조금씩 나눠 읽지 뭐, 해버렸다. 그런데 책장이 넘어갈수록 자꾸만 마음이 저리다. 책은 나를 톡톡,하지 않고 툭툭, 건드린다. 날카롭거나 예민하지 않았다. 뭉툭하고 진득했다.

“주눅 든 내게 책은 유일한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는 문장 앞에서 결국 나는 이 책을 갖기로 했다. 작가의 말이지만 나의 말이기도 했으므로.

(사진: Vadim Georgiev/shutterstock.com)

열세 살,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책을 읽었던 나이. 사춘기의 사나운 감정들이 폭발하기 직전에 아이들은 아슬아슬하다. 따돌림을 당했다. 이유는 잘 모른다. 한 명이 중심이었고 반 전체 아이들이 동조했다. 매일 학교에 갔지만 할 일은 없었다. 늘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들과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들의 날 선 표정에 상처받기 싫었고 나의 기죽은 표정을 보여주기도 싫었다. 고개를 드는 순간 내 자존심이, 그래서 내가,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얼굴을 묻고 책을 읽었다. 주눅 든 내게 책은 유일한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 등 뒤로 문이 닫히고 사방은 고요하고 적막해졌다. 나와 책만 남았다. 그 안에서는 외로운 것이 당연해 외롭지 않았다.

아직도 책을 읽는 이유는 열세 살 어느 날의 마음이 여전히 내 주위를 맴맴 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외로워서, 외로운 것이 당연해 외롭지 않도록.

 

 

나와 내 책들밖에 없는 곳,

<심야 이동도서관>

 

SAMSUNG CSC

 

심야 이동도서관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연’이다. 별다른 규칙 없이 이동하는 캠핑카이기 때문이다. 우연히 만난 심야 이동도서관에 오른다면 당신은 당신이 읽었던 모든 책들을 보고 만질 수 있다. 태어나 처음 읽은 그림책부터 어제 읽은 소설까지, 서가에는 당신이 안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다. 만약 읽다가 만 책이 있다면 멈춘 페이지까지만 글이 인쇄되어 보관된다.

 

SAMSUNG CSC

 

SAMSUNG CSC

어느 새벽, 우연히 알렉산드라는 심야 이동도서관에 오르고 그곳에서 자기만의 서가를 만나게 된다. 더 오래 있고 싶지만 단호하게 거절하는 사서에게 대출까지 부탁해본다. 책이라면 어디에서든 쉽게 구할 수 있을 텐데, 그곳에서 알렉산드라가 빌려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날 이후로 알렉산드라는 심야 이동도서관을 잊지 못한다. 그곳에서 ‘독자로서의 내 초상’을 보았다고 했다. 공기가 탁한 교실에 몇 시간씩 앉아 책을 읽던 날이나 금지된 책들을 몰래 읽던 늦은 밤 같은, 책을 읽던 ‘나’와 그 ‘순간’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꽃에서 정성스레 추출한 향이 향수에 담겨 있듯이, 책장에 꽂힌 책들에는 내 삶이 스며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거기서 위안을 찾았다. “책마다 추억이 담겨 있었다. 한 권의 책은 몇 시간 혹은 며칠의 쾌락이기도 했고 언어에 몰입한 경험이었으며 단단히 고인 기억이었다.”

 

SAMSUNG CSC

 

어느새 알렉산드라는 현실의 삶보다 책들에 스며 있는 삶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자기만의 심야 이동도서관에서 자기만의 책을 읽기를 간절히 원한다. 여기까지다. 이 그림책의 결말이 좀 무서워서 나는 늘 결말은 떼어놓고 읽는다.

교실에서 혼자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던 그때,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가 있었다. 제제도 나도 불쌍해서 몰래 울었다. 많이 아꼈던 책인데, 잃어버렸다. 나만의 책장이 생겼을 때 다시 책을 구해 꽂아두었다. 꼭 있어야 하는 책이니까. 책을 보면 서럽던 열세 살이 기억나서 다시 서러운 마음이 들 법도 한데, 오히려 든든한 위로를 받는다. ‘내가 처음으로 외로웠을 때 너는 내 곁에 있었지.’ 알렉산드라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동네 서점에서 <읽는 삶 만드는 삶>의 이현주 작가를 만났다. 이 또한 단골손님이 누리는 특혜 아니겠는가.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해하셨다. 너무 떨려서 ‘책이 꼭 저 같아서 좋았어요.’만 반복했다.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는데 이 글로 대답을 대신하려고 한다. 아마 못 보시겠지만 그래도.

가지고 있던 책에 사인을 부탁드렸다. ‘책이 힘이 되어주길’ 검은색 펜으로 한 글자씩 꼭꼭 눌러쓴 문장이 남았다. 작가와 독자가 하고 싶은 말인 동시에 듣고 싶은 말이었다. “정말 사랑할 만한 인간은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 삶을 통해 끊임없이 자각하고 성찰하고 변화해서 조금씩 나아지는 인간이라는 것” “인간은 불완전한 데다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은 종이지만 조금 더 올바르려고, 조금 더 사랑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책이 그렇게 애쓰는 존재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예나 지금이나 믿는다” 집으로 돌아와 밑줄 그은 문장들을 또 읽었다.

알렉산드라에 대해 생각한다. 책은 지난 삶을 기억하기도 하지만 다가올 삶을 기약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았다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며 그래서 사랑할 만한 인간이 되고 있다고 믿는다. 어른 다 됐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사랑받고 싶어 외롭다. 책을 읽었다, 읽고 있다, 읽을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Information

<심야 이동도서관> 글·그림 : 오드리 니페네거 | 역자 : 권예리 | 출판사 : 이숲 | 발행 : 2016.08.20 | 가격 : 12,000원

 

/사진:지혜

필자소개
지혜

The First 추천 콘텐츠 더보기
  • ‘성장의 상징, 상장’…스타트업들의 도전사는 계속된다
    ‘성장의 상징, 상장’…스타트업들의 도전사는 계속된다

    자본과 인력, 인지도 부족으로 애를 먹는 스타트업에게 기업공개는 가장 확실한 대안이다. 단숨에 대규모 자본과 주목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래 파트너와 고객은 물론, 내부 이...

  • “24주 연속 1위 브랜드의 저력으로”…‘나르카’ 운영사 ‘언커먼홈’, 매쉬업벤처스 등으로부터 후속 투자 유치
    “24주 연속 1위 브랜드의 저력으로”…‘나르카’ 운영사 ‘언커먼홈’, 매쉬업벤처스 등으로부터 후속 투자 유치

    이제 헤어 케어도 브랜딩이다!

  • “최근 가장 눈에 띄는 창업팀은?”…유망 초기 스타트업 뽑는 ‘혁신의 숲 어워즈’ 막 올랐다
    “최근 가장 눈에 띄는 창업팀은?”…유망 초기 스타트업 뽑는 ‘혁신의 숲 어워즈’ 막 올랐다

    현시점에서 가장 기대되는 스타트업 30개 사는 어디일까?

  • “Only for you”…대세는 초개인화 서비스
    “Only for you”…대세는 초개인화 서비스

    초개인화의 기치를 내건 스타트업들이 존재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

  • 타 산업과 연계, 핵심 기술 접목…“관광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라”
    타 산업과 연계, 핵심 기술 접목…“관광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라”

    '관광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 틈새에 대한 혁신적인 시도 돋보였다!

  • “생산성, 효율성 쑥쑥 올리는 솔루션”…매쉬업벤처스, 스타트업 ‘마일 코퍼레이션’에 초기 투자
    “생산성, 효율성 쑥쑥 올리는 솔루션”…매쉬업벤처스, 스타트업 ‘마일 코퍼레이션’에 초기 투자

    기업의 공간, 자산 관리를 디지털 전환시킬 창업팀!

  • “당신에겐 더 큰 무대가 필요하다”…스타트업의 해외진출을 지원하는 스타트업
    “당신에겐 더 큰 무대가 필요하다”…스타트업의 해외진출을 지원하는 스타트업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는 스타트업의 등장!

  • “국내 기업의 글로벌 성장 발판 마련”…한국액셀러레이터협회, 뉴저지 진출 전략 웨비나 개최
    “국내 기업의 글로벌 성장 발판 마련”…한국액셀러레이터협회, 뉴저지 진출 전략 웨비나 개최

    국내 유망 스타트업의 미국 진출, 맞춤형으로 지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