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의 계절, 표류하는 기부난민
불신의 계절, 표류하는 기부난민
2017.11.21 16:04 by 더퍼스트미디어

“뒤숭숭하죠. 무작정 의심하기도 그렇고, 가만히 있자니 찝찝하고….”

이제형(가명·43·서울 강동구)씨가 말끝을 흐린다. 이씨는 “사실 사는 게 너무 바빠서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다”고 덧붙였다.

이제형씨는 매달 일정 금액을 기부하는 정기기부자다. 10년 전 다니던 종교단체로 시작한 손길은 직장에서 자매결연을 맺은 복지기관, 지인이 알음알음 추천해준 단체 등으로 넓어졌다. 현재는 4~5곳에 모두 합쳐 10만원이 훌쩍 넘는 돈을 매달 보내고 있다. 이씨는 “통장에서 자동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누군가를 돕는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 때가 많다”며 웃었다.

자신의 선행을 상기시킨 건 오히려 불미스러운 소식들이었다. 지난 연말부터 올가을까지 불거졌던 기부 관련 사건·사고들은 이씨에게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겼다.

“사실 기부의 본질은 신뢰잖아요. ‘내 돈은 얼마 안 돼도 그런 마음들이 모이면 정말 필요한 곳에 필요한 문제를 해결해주겠지’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죠. 그런데 요즘엔 조금 달라졌어요. 의심이 안 갈 수가 없죠. 단체로부터 받는 유일한 피드백은 연말에 결산해주는 것 정도인데 이젠 그마저도 검증된 건지, 믿을만한 건지 의심하게 되더라고요.”(이제형씨)

 

| 온풍 필요한 시기에 역풍 맞다

싸늘한 계절이 돌아왔다. 이 시기에 더욱 필요해지는 게 훈훈한 기부민심. 전통적으로 연말·연시는 기부에 대한 장벽이 가장 낮은 시기로 꼽힌다. 모금단체에겐 한 해 중 가장 바쁜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올해 분위기는 자못 다르다. 지난해 연말 불거진 미르·K스포츠재단 스캔들에 이어 올해 가을 문턱에서 터진 새희망씨앗 횡령 사건과 ‘어금니아빠’ 이영학 사건 등은 기부민심을 급격히 냉각시켰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기부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은 ‘기부금’을 ‘눈먼 돈’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최근 들어 그런 편견을 더욱 굳건히 만드는 사건이 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서울 중랑구에 사는 김인규(가명·35)씨는 3년째 이어오던 정기기부에 깊은 회의감을 느낀다고 했다. 김씨는 “기부하면서 ‘내가 누군가를 돕고 있구나,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구나’라는 벅참 같은 게 있어야 하는데, 그저 언 땅에 미지근한 물을 흩뿌리는 느낌만 들었다”면서 “최근엔 지인들로부터 ‘순진하다’는 소리까지 들었다”며 끌탕했다.

이런 민심은 수치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난 7일 통계청에서 발표한 ‘2017사회조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 1년간 기부경험이 있는 사람은 26.7%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를 시작한 2011년(36.4%) 이래 가장 낮은 수치다. 더 큰 문제는 나아질 기미조차 없다는 것. 향후 기부의향을 나타낸 사람 역시 조사 이래 가장 낮은 수치(41.2%)다. 기부를 하는 사람도, 하려는 사람도 눈에 띄게 줄고 있단 얘기다.

연속되는 대형 악재는 기부민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일련의 사태로 기부단체에 대한 불신이 쌓일 대로 쌓였다”는 게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국제구호단체의 한 관계자는 “기관에 전화를 걸어와 ‘내가 직접 도울 테니 수혜자의 연락처 등 신상정보를 달라’고 요구하는 이들이 부쩍 많아졌다”면서 “설령 좋은 뜻이라고 해도, 수혜자의 신변 등에 위험한 요소가 많아 응할 수 없는 일”이라고 난색을 표했다.

 

| 후원자는 피드백을 먹고 삽니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이 물음은 ‘기부를 하는 사람이 이를 통해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저는 엠네스티에 후원하고 있어요. 이 단체가 인권이슈에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고 판단했죠. 평소 인권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모두의 인권을 지키는 일이 나의 인권을 지키는 일이라 믿죠. 단체가 변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결국 나에게도 체감되는 구호활동이라고 느낍니다.” 「이지연(가명․34)」

“굳이 후원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생활비의 고정비용을 줄이고 싶은데 후원금으로 나가는 비용은 아무리 적을지라도 지속적으로 나가거든요. 이런 부담감을 넘을 만한 이유가 내겐 없는 거죠.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사실이… 나와 내 주변과는 직접적으로 관계없는 먼 이슈인 것 같아요.”「성미림(가명․32)」

비슷한 또래의 두 여성 직장인의 답변 속에 실마리가 있다. 후원자들에겐 분명한 계기와 이유가 있다. 그게 없으면 후원은 남의 일이 된다. 기부금은 ‘눈먼 돈’이거나 ‘공돈’이 아니다. 모금단체에서 이 계기와 이유를 충족시키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하는 이유다. 이제형씨 역시 이 부분에 대한 갈증이 높았다. 이씨는 “기부금이 덩어리째 나와 있는 결산자료나 사진 몇 장으론 내 도움을 통해 정말 무언가 바뀐 것인지 알 수가 없다”면서 “충실한 내용의 피드백이 적당한 간격으로 전달된다면 내 행동이 특별한 것이라는, 내 돈이 값지게 쓰였다는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충실한 피드백은 후원자를 독려하는 가장 큰 힘이다

“이게 잘 전달이 될까 하는 자그마한 의심은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직접 가서 보니 확실히 실감이 나더라고요.”

유정용(남·56·경북 포항)씨가 몽골의 아동을 후원하기 시작한 건 지난 2011년부터였다. 당시엔 우리나라에 후원단체가 우후죽순 생겨나는 시기였고, 덩달아 기부금 횡령 등의 사건도 적잖이 발생했다. 단체 선택에 공을 들여야 했던 이유다. 지인들과 전문가들의 조언을 두루 듣고 유씨가 선택한 단체는 국제구호단체 ‘굿네이버스’였다. 유씨는 “도덕적으로 투명한 단체인지, 일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사명감이 있는지를 특히 눈여겨봤다”고 했다.

후원이 시작된 지 어언 7년. 최근 사회적 문제에 허탈해질 법도 하지만 유씨의 믿음은 오히려 굳건해졌다. 지난 8월, 자신이 후원하는 아이를 직접 만날 수 있었던 덕분이다. 단체에서 제공한 해외사업장 방문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사례 아동의 집을 방문해 아이는 물론, 부모들도 만났죠. 제가 후원을 시작할 때만 해도 여덟 살이었던 아이가 열다섯 살이 됐더라고요. 학교에서 상 받은 걸 자랑하면서 ‘고맙다, 덕분이다, 더 열심히 하겠다’라고 해줄 땐 제가 더 고마웠죠. 현지 담당자들은 그동안 내 후원금액으로 전달된 각종 복지혜택을 고스란히 정돈해 보여줬어요. 아이가 잘 크고 있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모습도 직접 보니까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싶더라고요.(웃음)”

단체의 투명성, 직원들의 사명감은 기부단체 선택의 첫 번째 덕목이다.

이재웅 굿네이버스 나눔마케팅본부 온라인팀장은 “후원자들 대부분 자신의 손길로 변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큰 계기”라며 “후원금에 대한 피드백을 전달하는 데 공을 들이면 후원자들의 만족도는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꽁꽁 얼어붙은 기부심리. 이를 녹이는 건 역시 해당 현장에서 일하는 기부단체들 스스로 신뢰를 회복하는 길뿐이다. 그 어느 때보다 사명감과 책임감이 요구되는 이유다. 이재웅 팀장은 “기부단체가 후원자들과 어려운 이웃들을 잇는 가교역할에 충실하고, 소중한 후원금에 더 큰 책임의식을 가진다면 우리나라에도 기부와 관련한 좋은 변화들이 더 많아지고, 올바른 기부문화가 정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후원자들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여러분의 작은 실천이 국내외 소외된 이웃들이 어려움을 벗어나고 꿈을 이룰 수 있는 커다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만약 기부를 생각하고 있다면, 사전에 충분히 알아볼 것을 권해요. 요즘은 온라인에도 충분한 정보가 있거든요. 정부로부터 허가받은 단체인지, 기부금 영수증이 발행되는지 체크해보는 게 첫 번째입니다.”(이재웅 팀장)

 

* 이 콘텐츠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는 국제구호개발 NGO ‘굿네이버스’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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