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20만 원이 아니고 200만 원이야?”
바늘로 콕 찌르면 피보다 소금이 먼저 나올 것 같은 짠순이 엄마가 거금 200만 원을 내놨다. 그것도 여행 경비로. 배낭여행에 따라오겠다는 엄마의 결심보다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200만 원이었다. 우리 엄마로 말할 것 같으면, 보통 짠순이가 아니었다.
굳게 닫힌 엄마의 지갑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물건 하나,옷 하나 허투루 버리지 않고 리폼하던 엄마의 모습이 기억난다. 외식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짜장면, 피자, 햄버거 등 배달 음식은 엄마의 손끝에서 뚝딱 하고 만들어졌다. 하루는 시장 아주머니한테 비법을 전수 받아 집에서 호떡을 만들었는데, 발효 시간 때문에 꼬박 하루를 기다려야 했다. 호떡 반죽이 부풀어 오르길 기다리는 우리 네 식구의 모습이 얼마나 웃겼는지 아직도 호떡의 추억이 선명하다. 요즘에는 리폼이나 홈메이드가 더 정성 쏟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그저 짠순이 엄마의 흔적이다. 탕수육이나 피자는 나름 비싼 편이었으니 그렇다 치고, 호떡은 암만 생각해도 너무했다. 그거 직접 만들어먹어서 돈 얼마나 아낀다고.
그런 짠순이 엄마가 여행을 가겠다고 200만 원을 내 앞에 내려놓을 줄이야. 콧노래 부르며 혼자만의 여행을 꿈꿀 시간이 없었다. 엄마의 굳은 결심을 꺾는 일이 급선무였다. 머리를 굴려보자. 분명 엄마가 여행을 포기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엄마, 200만 원 다 쓰고 모자랄 수도 있는데 괜찮아?”
1차 공격. 짠순이 엄마의 마음을 공격하라.
“이렇게 쓰려고 그동안 악착같이 모았나 봐.”
생각보다 너무 쉽게 실패. 엄마의 결심은 단단했다.
“젊은 나도 배낭 메고 여행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데, 무리하지 마.”
2차 공격. 나이 많은 엄마의 약점인 체력을 공략하라.
“산악회 사람들이랑 매주 배낭 메고 등산하러 가잖아. 엄마가 너보다 체력 좋을 걸.”
음, 맨날 침대에서 뒹구는 나보다 체력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공격도 실패.
“나는 여행 가서 절대 한식 안 먹어. 엄마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회심의 3차 공격. 김치 없인 하루도 못 사는 신토불이 입맛을 흔들어라.
“어… 그건 좀 힘들지도 모르겠네.”
한식 금지 카드에 엄마의 결심이 살짝 흔들렸다. 일주일도 아닌 한 달이라니. 엄마 입장에선 주춤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여행이, 나의 여행이 되는 줄만 알았다. 엄마의 그 말이 있기 전까지는.
그날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거실에서 엄마와 나란히 앉아 빨래를 개고 있었는데, 몇 해 전부터 버리라고 말했던 엄마의 해진 속옷이 내 손에 걸렸다. 엄마에게 속옷을 보여주며 툴툴댔다. “아, 엄마. 이런 것 좀 버리고 속옷 하나 사라.” 조용히 빨래를 개고 있던 엄마가 딱 한마디 했다. “다 니들 키운다고 아끼며 살아서 그래. 엄마도 좋은 거 먹고 싶고, 좋은 데 가고 싶지. 왜 안 그러겠어.”
아, 이건 반칙이다. 엄마가 갑자기 효심 찌르기 역공을 할 줄이야. 내 손에 들린 엄마의 해진 속옷 위로 엄마의 지난 시절과 여행 가서 즐거워할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의 여행이, 우리의 여행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엄마, 여행을 간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어. 그래도 진짜 갈래?”
그러자 엄마는 빨래 개던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딸, 그거 알아? 엄마는 여행 간다는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빨래 개는 일이 즐거워.” 콧노래를 부르며 빨래를 개고 있는 엄마 마음에 봄이 찾아온 것 같았다.
저 짠순이가 200만 원이나 꺼냈는데 까짓 거 착한 딸 코스프레 한번 해주지 뭐. 그래, 같이 가보자. 만만치 않겠지만. 엄마야, 마음 단디 먹고 배낭 메라
이 콘텐츠는 첫눈출판사에서 출간한 책 <엄마야, 배낭 단디 메라>의 내용을 재가공한 것입니다. 키만소리 작가와 책에 대해 더욱 궁금하신 독자분들은 첫눈출판사 브런치로 방문해 주세요.
프리랜서 피처 에디터. 카카오 브런치에 '엄마야 마음 단디 먹고 배낭 메라'라는 제목으로 여행 웹툰 에세이를 연재해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