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풍겨오는 유혹스런 구수한 향의 진원지는 온통 빨간 간판과 빨간 등으로 장식된 한 가게였다. 면관(面馆)이다. 면을 파는 음식점이라는 뜻이다. 어느덧 시각이 10시가 훌쩍 넘었건만 아직까지 문을 닫지 않은 가게라니. 중국에서는 대단히 흔치 않은 경우다. 일행은 자석을 발견한 철가루처럼 이끌리듯 면관으로 발을 들였다.
따스하고 구수한 국물의 향기는 압록강의 차가운 바람을 쐰 일행의 몸과 마음을 일순간 녹아내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저녁을 먹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들의 입엔 다시금 시장기가 돈다. 아까 전 류경식당에서 느낀 정신적 허기가 물리적 허기로 이어진 탓일지도.
십 수 가지가 넘는 다양한 면요리들을 팔고 있다. 무엇이 재료이고 어떻게 만드는지를 대강 확인한 후 사진을 통해 맛을 가늠해본 일행은 인원수대로 5그릇의 면을 주문했다. 중국에서 가장 높은 보편성을 자랑하는 우육면을 ‘빨간’ 버전과 ‘하얀’ 버전으로 하나씩, 그리고 진한 닭고기 육수로 만든 면과 간장 소스의 볶음면, 마지막으로 탄탄면 스타일이지만 국물이 없는 땅콩 볶음면을 선택했다.
“아니, 이게 여기에 있었다니!”
자연스레 다음 수순대로 술을 주문하려는 그 순간, 일행은 뜻하지 않은 행운을 얻었다. 류경식당에서도 없던 평양소주와 평양주가 떡하니 냉장고에 대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쾌재를 부른 일행은 이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압록강을 가운데 두고 저 너머 북한 신의주 땅을 바라보며 평양의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 5명의 마음을 흔든다.
주원료가 ‘강냉이’라 적혀있는 도수 30도의 평양소주는 툭 치고 들어오는 첫맛이 인상적이다. 남쪽의 나이 지긋하신 이들이 주로 즐기는 25도의 진로와 일견 흡사하지만 알코올의 향이 조금 더 강하다. ‘흰쌀’과 강냉이로 만들었다는 평양주는 25도의 소주로, 보다 더 맑은 느낌이 강하다. 양쪽 모두 매력적이지만 일행은 아무래도 상징성 측면에서 경쟁력이 있는 평양소주에 손길이 더 간다.
5가지 면은 제각기 훌륭함이 있었지만 경윤과 동욱은 빨간 고추기름이 둥둥 뜬 우육면에, 지혜와 창희는 땅콩 볶음면에 애착을 보였다. 상근은 숫제 젓가락은 내려놓은 채 평양소주만 탐닉한다.
“아, 정말 좋다. 이 좋은 술을...”
한잔 들이켜고 곧바로 면에 손길이 가는 일행들과 달리 그는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만 내뱉는다. 훌륭한 맛에 대해서 한번,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면 쉽사리 맛보기 어려울 것이란 생각에서 한번. 어쩌면 단동에서의 모든 추억이 그러할 터다. 감탄과 탄식이 혼재한.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소주를 몇 병 비워낸 일행은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곳에 오면 꼭 하기로 했던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서. 북쪽의 대동강 맥주와 남쪽의 한라산 소주를 섞는 이른바 ‘통일주’ 혹은 ‘통일소맥’이 그것이었다. 사실 한국에서도 시도해본 바 있지만 이들은 압록강이 바라보이는 곳에서의 특별함을 기대했다. 일행은 대동강 맥주와 길거리 꼬치들을 한아름 사들고 숙소로 향했다.
경윤이 여행용 가방을 눕혀 술상을 만들자 지혜가 안주를 펼쳐놓는다. 상근은 의자를 옮겨와 카메라를 설치하고, 동욱은 한국에서 공수해온 한라산 소주를 꺼낸다. 모든 준비가 완료됐다.
거국적인 통일소맥의 제조는 자칭 타칭 ‘소맥리에’로 불리는 창희가 맡았다. 맑고 투명한 한라산 소주가 먼저 입장하고, 진득한 색감의 대동강 맥주가 뒤따라 들어와 혁명적인 거품을 만들어낸다. 매번 보던 소맥의 모습이지만 느낌은 완연히 달랐다. 시각적 느낌은 같았으나 이 공간적 특별함은 다른 모든 감각을 바꿔놓는다. 여느 때 술자리 같으면 각자의 지적임을 주체하지 못해 서로 떠들어대기 바빴을 이들이지만, 이 분위기를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음미하려는 욕망으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
지혜의 말이 침묵을 깬다. 돌이켜보면 그랬다. 어쩌면 평생 가볼 이유도 기회도, 아니 들어볼 일도 없을 중국 변방의 소도시까지 이들은 왜 찾아갔을까. 여기에 취향은 어느 정도 같았지만 모두들 각자 뚜렷한 캐릭터를 지닌, 자존감과 자기애가 강한 이들이었다. 아주 대단히 지적인 것도 아니며 함부로 지적이려 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서로 비슷한 온도의 생각을 갖고 살아왔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하는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이들을 느슨하게나마 엮는 끈이다. 그리고 이날 야심한 술자리는 이를 다시금 확인하는 기회가 됐다.
모든 것이 생경했던 첫날이 마무리되고,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늦게까지 폭음을 한 탓에 다들 아침이 무겁다.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에 물을 부어 뱃속으로 밀어 넣었지만 숙취와의 전투는 정전협정을 앞둔 한국전쟁에서의 고지전 만큼이나 쉽지 않다.
“아, 죽겠네. 커피나 한잔 하러들 가자. 카페인이 들어가면 조금 낫겠지.”
경윤이 다분히 인문학스러운 해장 방법을 제시한다. 나머지 4명의 얼굴에서는 긍정의 빛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다들 따라 나서기로 했다.
중국은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추출해 내린 커피를 접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도시에나 가야 대형 커피전문점을 만날 수 있고, 단동은 중국에서 매우 작은 축에 드는 동네였기에 일행은 숙취를 안고 커피를 찾아나서야 했다.
압록강변을 따라 한참을 걸었을까. 일행은 늘어선 2층 건물 중 한 곳에 ‘커피’라 적힌 간판을 발견했다. ‘SPR COFFEE’라는 뜻 모를 이름의 커피숍은 일행에게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단동 거리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던 서양인들은 모두 여기에 모여 있었다.
심지어 2층으로 올라가니 압록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말 그대로 ‘리버뷰’가 펼쳐졌다. 이런 무미건조한 나라에서 이 같은 낭만 넘치는 테라스라니. 너무나 의외의 공간을 발견한 일행은 시원한 커피를 들이키며 조금이나마 힘을 내 본다.
심기일전과 함께 둘째 날 일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려는 그 순간, 어디선가 미묘한 시선이 느껴진다. 테라스 구석진 쪽 테이블에 앉아있던 낯선 남자 4명이 일행을 흘깃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옷깃에는 한반도 북쪽의 국기가 그려진 배지가 달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