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그리워질 때면 춘천(春川)으로 향한다. 유안진 시인의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처럼 겨울도 봄인 척, 춘천은 그런 곳이다. 그리고 에티오피아 커피 향에 이끌려 춘천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을 찾는다. 우리나라에 원두커피를 처음 선보인 곳, ‘이디오피아벳’(강원 춘천시 이디오피아길 7)이다. 1968년 하일레 슬리세 에티오피아 황제가 이곳에 와서 이름이 지어졌고, 그렇게 우리나라에 에티오피아 커피가 처음 들어오게 되었다. 도대체 어떤 연유였을까. 건너편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기념관을 천천히 둘러보며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커피의 나라에서 용기 있는 나라로
아프리카 북동부에 위치한 에티오피아. 처음 커피를 발견한 나라다. 식사 마지막에 커피 세레모니를 하는 나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식사 후, 말린 커피를 돌 같은 도구로 갈아 끓인다. 설탕을 듬뿍 넣은 커피를 정성스레 마신다. 그리고 집집마다 커피나무를 서너 그루씩 키우는 나라다. 커피에 깊은 애정이 있는, 커피가 일상 자체인 곳이다.
그리고 이 나라는, 한국전쟁의 참전국이기도 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을 감행했다.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UN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에게 ‘침략을 중지하고 38도선 이북으로 물러날 것’을 촉구했지만 침략은 계속되었다. 이에 유엔 회원국은 대한민국 원조를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하기에 이른다. 미국, 영국, 캐나다, 터키, 호주, 콜롬비아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 그리고 그중 낯설고 먼 나라도 하나 끼어 있었다. 바로 에티오피아다.
에티오피아는 1950년 8월 황실근위대로 대대를 편성해 곧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다음해 4월까지 한국 지형과 유사한 지역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고, 1951년 4월 13일 출국한다. 황제로부터 ‘상대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거나 궤멸시키는 대대’라는 뜻의 ‘각뉴대대’라는 부대명을 부여받고 에티오피아를 떠난다.
그렇게 21일의 기나긴 항해 끝에, 1951년 5월 6일 부산항에 도착한다.
1953년 3월 1일 철군할 때까지 에티오피아는 군인 6037명을 파병했다. 화천과 철원, 양구, 가평 등 총 253회 전투에 참가했으며 전사 121명, 전상 536명이란 기록이 남아있다. 포로가 된 군인은 한 명도 없었다. 단 한 명도 항복하지 않았단 얘기다. 특히 춘천 근교에서 크게 활약했는데, 춘천시는 에티오피아군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기념탑을 세우고, 기념관을 지었다. 춘천 시민의 정성이 모아져 만들어진 공간이다.
┃저들 품에 자유를 안겨 주리라
하일레 슬리세 에티오피아 황제는 파병 군인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너희들의 죽음의 대가로 저들 손에 자유라는 것을 꼭 안겨 주리라! 우리 민족이 과거에 이탈리아인들에게 무엇을 당해왔는지 말하지 않아도 그 고통은 뼛속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에티오피아는 1935년 이탈리아에게 침공을 당했는데, 당시 국제연맹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실패로 끝난 쓰라린 역사를 갖고 있다. 그 사건으로 희생당한 사람이 27만 명이나 됐다. 이후 1944년 영국-에티오피아 협정으로 해방되었다.
이때의 기억이 ‘침략군에게 부당하게 공격을 당한 나라는 반드시 도와줘야 한다’는 다짐을 새겼으리라. 세계평화를 유지해야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으리라. 비록 아프리카 변방의 가난한 나라였지만,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나라도 아니었지만, 이 나라의 원수가 한국으로의 파병을 전격적으로 결정한 이유다. 전쟁이 끝난 1953년엔 경기도 동두천에 고아원을 세워 한국인 고아를 보살피기도 했다. 휴전 후에도 유엔국제아동긴급기금, 교회세계봉사단 등을 통해 전후복구를 도왔다.
┃참전 용사를 춘천에 기리다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기념관으로 들어서는 길. 입구에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에게 보내는 메모들이 가득하다. 한글 반, 영어 반. 에티오피아인들이 볼 수 있도록 영어로 쓰는 사람들도 많단다. 빼곡한 글자 사이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를 향한 감사함이 깊이 느껴진다.
1층 참전기념 전시실에 들어서면 전사자 명단도 볼 수 있다. 읽기 어려운 이름이지만 한 분 한 분 그 의미를 새긴다. 이 낯설고 먼 나라까지 와서 목숨을 걸고 전쟁에 뛰어든 사람들. 영원한 안식을 비는 춘천시민의 글도 보인다.
소총, 병역수첩, 훈장, 식기 등 한국전쟁 당시 물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제법 깨끗하고 상태가 좋은 물품들을 보니 한국전쟁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제법 가까웠던 비극의 역사였음이 다시금 느껴진다.
2층으로 올라가면 에티오피아에 대해 간략하게 알 수 있는 전시실이 있다. 에티오피아는 커피를 처음 발견한 곳으로, 연간 26만 톤 이상의 커피를 생산하고 있단다. 이 기념관의 후원회는 에티오피아 커피를 수입해 판매한 비용으로 기념관을 운영하고 있다.
기념관 내 자판기에서 에티오피아산 원두로 만든 커피를 뽑아 마실 수 있다. 일반 자판기보단 가격이 다소 비싸지만 후원금으로 사용된다고 하니, 잠깐 의자에 앉아 커피와 함께 여유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
기념관 건너편, 공지천 끝자락에는 높이 16미터에 이르는 기념탑이 솟아 있다. 1968년 하일레 슬라세 황제의 방한에 맞춰 완공된 것이다. 에티오피아를 상징하는 사자상도 탑 위에 만들어져 있다.
저 멀리에 있는 누군가의 아픔을 공감할 줄 아는 민족. 아시아 끝 조그마한 나라까지 목숨을 걸고 왔던 에티오피아 군인들. 그들을 향한 감사함과 존경심은 기념관 후원회가 잇고 있다. 후원회는 참전 군인들의 장례비를 지원하고, 후손들의 한국 방문을 도와준다. 넉넉하지 못한 에티오피아에 필요한 시설을 세워주기도 한다. 고마움을 잊지 않는 것, 결국 남은 우리의 몫이다.
*본 콘텐츠는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 공식블로그에 공동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