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무이! 지하철에 불이 나 난리라예!
-뭐하노! 빨리 나온나!
-못 나갈 것 같아예. 저 죽지 싶어예. 어무이 애들 잘 좀 키워주이소!
올해로 16주기다.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 대구 중구 남일동 중앙로역에서 지하철 화재사고가 발생했다. 1079열차에 탄 50대 남성, 뇌졸중과 우울증을 앓으며 신변을 비관하던 그는, 지하철 안에서 돌연 방화범으로 돌변했다. 휘발유가 담긴 페트병에 불을 붙인 후 바닥에 던졌다.
전동차 내부는 급속히 타들어 갔다. 유독성 가스와 검은 연기가 가득 차올랐다. 종합사령실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고, 마침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1080열차는 중앙로역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미 역 안은 검은 연기로 자욱했고, 전동차 전원이 끊어지며 1080열차의 움직임도 멈췄다.
┃지하철이 ‘지옥철’이 되는 순간
정작 불이 난 1079열차는 정차 중이어서 많은 승객이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편 선로에서 진입하고 있던 1080열차는 속수무책으로 화염에 휩싸이게 됐다.
“잠시 후 출발 예정이니 기다려 주십시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1080열차의 기관사는 위와 같이 안내방송을 했고, 사람들은 열차 안에서 그대로 멈춰 있었다. 전동차 문은 잠겨 있었다.
오후 1시 38분, 화재는 가까스로 진압됐다. 총 12량의 지하철 객차가 뼈대만 남긴 채 모두 타버렸다. 사고 현장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무려 192명이 사망했다. 대한민국 철도 역사에서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기록한 참사이자.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지하철 화재 희생자를 낳은 비극이다(첫 번째는 1995년에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벌어진 지하철 화재로 289명이 사망했다).
불이 난 지하철 안에 남겨진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잘 살아라… 그 순간 할 수 있는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던 시민들은 그렇게 목소리와 메시지만을 남기고 떠나갔다.
16년 전, 대한민국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사고 후엔 대처방법이 미흡했다는 논란까지 일었다. 1079열차 기관사는 초기 화재진압에 실패한 것을 중앙통제실에 신고하지 않은 채 대피하기 급급했고, 1080열차 기관사가 탈출 시 열차의 마스터키를 뽑는 바람에 문이 닫히고 말았다. 아무도 열 수 없는 문이었다. 열차의 내장재들이 타들어가며 인체에 유해한 유독성 가스와 매연을 내뿜었다. 인명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직접적인 이유다.
참사 다음날 정부는 대구광역시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대구시와 대구 지하철 종사자들이 사고를 축소·은폐하고 현장을 훼손한다는 질타를 받기도 했다.
┃뒤늦은 후회, 안전 대비와 기억의 공간들
사고의 충격은 많은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먼저 전동차 내장재가 불에 타지 않는 재질로 전면 교체됐다. 1호선 전동차 34개 편성 전체에 내장판, 단열재, 객실의자, 바닥판, 창틀고무, 광고틀 등의 내장재가 불연성 혹은 극난연성 재료로 바뀐 것이다. 사고가 난지 2년 후인 2005년 4월부터는 내장재가 교체된 전동차량만으로 열차가 운영되기 시작했다.
비상인터폰을 핸드마이크 타입으로 교체하고 객실 내 소화기도 추가로 배치했다. 또한 비상상황에는 자동안내방송이 송출돼 승객들이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각 역사의 승강장과 게이트에는 안전요원을 배치했다.
대구시는 2008년, 팔공산 자락에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를 조성했다.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를 계기로 조성된 공간이다. 테마파크를 짓기 전, 화재가 난 중앙로역 화재 칸을 그대로 옮겨두고 건물을 지어 올렸다.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에서는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에 대한 자료들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물론, 빌딩 완강기 체험부터 산악사고, 지진, 화재, 응급처치 등 일상 속 위기 상황의 대처법을 함양할 수 있는 각종 체험 코스도 마련돼 있다. 게다가 가상의 지하철 화재를 설정하여 지하 승강장에서 계단을 통해 지상 출구까지 탈출하는 경험도 해볼 수 있다.
대구 중앙로역에도 사고 당시의 현장을 설명하고, 피해자를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바로 2.18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기억공간이다. 지하철 개찰구 근처에 있던 혈압측정기, 공중전화기, 사물함 등은 녹아내린 그 흔적 그대로다. 잿더미로 가득한 ATM 기기는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사고 현장에서 우리를 가장 먹먹하게 하는 것은 검정색 벽을 가득 매운 삐뚤빼뚤한 손 글씨다. 희생자를 기리며 적어 내려간 ‘보고 싶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메모들은 두 번 다시 이런 일을 겪지 않겠다는 서로 간의 다짐이기도 하다.
‘서로가 사랑함으로 빛나는 것’
생명은 그런 것이다. 스스로가 아닌 타인을 지켜줘야겠다는 마음. 그것이 숭고한 생명에 대한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생명의 숭고함은 그 생명을 앗겨버린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그 생명을 지켜야 할 사람들의 몫에서 나옵니다.
생명은 스스로 지켜서 존엄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사랑함으로 빛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학 시민대표의 12주기 추도사 중에서
*본 콘텐츠는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 공식블로그에 공동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