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를 좋아하는 건 고양이만이 아니다(上)
규제샌드박스 본격 시행, 그 후 2년
모래를 좋아하는 건 고양이만이 아니다(上)
2021.02.08 12:26 by 최태욱

김주행씨는 수 년 간의 연구 끝에 일정한 노선을 규칙적으로 오가는 자율주행 셔틀버스를 개발했다. 이제 이 차량이 실제 도로에서 안전하게 운행되는지 확인하는 절차만 남겨두고 있다. 이충전씨는 전기차의 가장 큰 애로사항인 충전 문제를 공유경제로 해결하려 한다. 사용자의 편의성에 초점을 맞춘 충전기 공유 서비스가 비즈니스의 핵심이다. 동네에서 내과를 운영하던 박원격씨는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비대면 의료 솔루션을 구축했다. 일단 동네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완성도를 높인 후 점차 농어촌·도서지역 등으로 확산시킬 포부를 다진다. 

미래를 열어갈 혁신가들의 행보로 뵈지만 실상은 모두 불법 행위다. 각각 현행법상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전기사업법>, <의료법>에 저촉된다. 혁신은 너무 빠르고 변화무쌍하지만 법은 너무 낡았고 또 느리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는 거의 모든 산업 분야가 규제로 가득하다”며 “창의적인 기업들의 다양한 꿈이 낡은 규제에 막혀 스러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2019년 1월 전격 도입된 규제샌드박스는 이런 우려에 대한 정부의 묵직한 대답이었다. 기존 규제를 면제·유예해주는 시공간. 마치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놀 수 있는 모래 놀이터(Sandbox)처럼 사업자들이 마음껏 혁신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바로 규제샌드박스다. <더퍼스트미디어>에서는 시행 2년째를 맞는 규제샌드박스의 공과(功過)를 2주간의 ‘위클리 클로즈業’을 통해 톺아본다./ 편집자 주

 

2년간의 규제샌드박스. 모래놀이터는 과연 스타트업을 춤추게 했나?
2년간의 규제샌드박스. 모래놀이터는 과연 스타트업을 춤추게 했나?

| 스타트업하기 좋은 나라 위한 ‘혁신 치외법권’

“(정부가)규제를 풀어주기 위해 열정적으로 달려든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사실 법과 규제라는 게 참 예민한 사안인데… 그만큼 많이 소통하고 깊게 고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김기동 코나투스 대표의 회상이다. 김 대표는 한국형 규제샌드박스의 첫 수혜자(ICT융합 분야)다. 이 회사의 브랜드 ‘반반택시’의 정수는 ‘동승(同乘)’. 현행법(택시운송사업의 발전에 관한 법률)상으로도, 시민 정서상으로도 규제에 가로막힐 여지가 있는 아이디어였다. 이에 김 대표는 ‘자발적 합승’이란 명분을 내세워 2019년 1월 17일 규제샌드박스를 신청했다. 동승을 제도권 안에서 풀어낸다면 승차거부나 장거리 고객 요금부담 같은 고질적인 문제를 극복하면서, 택시 기사와 고객 모두를 만족시키는 상생을 구현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모든 법과 제도에 이유가 있듯, 이를 풀어주는 것 역시 확실한 이유가 필요했다. 사업의 필요성과 활용도, 안정성과 위법성 등을 따지는데 무려 6개월이 소요됐다. 

그렇게 등장한 반반택시 서비스는 출시 1년 만에 누적 이용자 12만명, 기사회원 1만4000명을 확보하는 등 가맹택시 시장의 새 바람을 일으켰다. 규제로 인해 사장될 뻔한 아이디어가 모래사장을 통해 고객들 품에 안착한 것. 김기동 대표는 “사업할 기회와 여건이 주어졌다는 것부터가 큰 동기부여였다”면서 “실제로 규제샌드박스를 신청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사업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경험치도 다양하게 쌓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2020년 7월11일 모빌리티 분야 최초로 정보통신기술(ICT) 규제샌드박스 실증특례 사업승인을 받아 같은 해 8월 1일부터 정식 서비스를 개시한 반반택시(사진: 코나투스)
2020년 7월11일 모빌리티 분야 최초로 정보통신기술(ICT) 규제샌드박스 실증특례 사업승인을 받아 같은 해 8월 1일부터 정식 서비스를 개시한 반반택시(사진: 코나투스)

코나투스의 사례는 규제샌드박스의 가장 전형적인 성취다. 규제 지뢰밭을 두려워하던 스타트업들은 나라가 허락한 혁신의 실험장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비즈니스로 빚어낸다. ‘혁신’이 기존 규칙을 무너뜨리는 특성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규제샌드박스는 혁신이 장기인 스타트업의 동아줄이나 다름없다. 정미나 코리아스타트업포럼 정책실장은 “규제샌드박스는 스타트업들이 무언가를 도모하게끔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제도”라는 말로 제도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특히 요즘 같이 자고 나면 바뀌는 세상에선 더욱 절실하다. '법무법인 비트'에서 규제샌드박스팀 팀장을 맡고 있는 송도영 변호사는 “산업군 융합이 이뤄지며 새로운 서비스가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기존 법령으로는 이를 모두 대응하기도, 그렇다고 법을 개정하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법의 중간지대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검증하는 기회를 주자는 것이 제도의 취지”라고 설명했다. 

2019년 1월, ICT융합(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융합(산업통상자원부), 혁신금융(금융위원회), 규제자유특구(중소벤처기업부) 등 4개 분야로 시작한 규제샌드박스는 이듬해 스마트도시(국토교통부), 연구개발특구(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2개 분야를 신설하며 범위를 확대했고, 2020년 5월 대한상공회의소의 규제샌드박스 지원센터가 공식출범하는 등 민간 협업체계도 갖췄다. 

실제 사업자가 활용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각 분야별 전담 부처나 대한상공회의소를 통해 신청·접수하면 관련 규제 유무 확인을 거쳐 두 가지 갈래로 진행된다. 딱히 관련 법규가 없고 (사업) 안전성에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임시허가’, 해당 사업을 금지하는 특정 법이 있고 안전성에 대한 검증도 필요하다면 ‘실증특례’를 승인 받아 사업을 진행한다. 두 유형 모두 2년의 사업 기간에 2년 연장이 가능하다. 앞서 코나투스의 반반택시는 실증특례 승인을 받은 경우인데, 2019년 8월 1일 정식 서비스를 시작했으니 올해 8월이면 2년의 사업 기간이 종료되는 셈이다. 실증특례의 경우, 연장 기간을 포함해 총 4년이 지났을 때까지 관련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사업은 종료된다.

 

한국형 규제샌드박스 흐름도
한국형 규제샌드박스 흐름도

| 의료부터 금융까지… 기사회생한 사업 아이디어 400건 넘었다
그렇다면 정부의 규제샌드박스 제도가 실제로 스타트업의 동아줄이 되어 주었을까? 결론적으로 봤을 때 ‘성공적인 안착’이라는 평가에 무게가 쏠린다. 지난 1월 12일 열린 ‘2021 규제혁신 포럼’에서 밝힌 2년간의 성과들을 살펴보면 보다 구체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2019년 1월부터 2020년 12월까지 규제샌드박스 과제를 승인 받은 케이스는 모두 404건. 이중 82%가 실증특례(기존 법에서 금지됐으며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사업 대상) 건이며 68%가 중소기업이다. 이는 “규제로 인해 시장에 진출할 수 없었던 혁신기업에게 검증의 기회를 제공하자”는 제도의 취지에 부합하는 수치다. 승인된 사업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의료, 플랫폼, 스마트기기, 공유경제 등의 산업군이 혁신과 규제가 맞부딪친 최대 격전지로 꼽혔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승인으로 인해 파급되는 경제효과 역시 만만치 않다고 보고 있다. 막혀있던 사업들이 시장에 진출하면서 유망 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와 활발한 고용이 이어졌다는 것. 지난 2일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규제박스 2주년, 성과보고회’를 통해 밝힌 누적 투자유치 금액은 총 1조 4344억원, 고용효과는 2865명이었다. 또한 네 차례에 걸쳐 비수도권 지역에 24개 규제자유특구를 지정하면서 국가 균형발전 효과도 거둔 것으로 평가됐다. ‘규제자유특구’는 지자체가 지역기업과 연계하여 자체적‧주도적으로 규제샌드박스를 실행해 나가는 일종의 클러스터. 충북의 자율주행, 울산의 수소그린모빌리티, 전남의 에너지신사업, 경남의 무인선박, 제주의 전기차충전서비스 등 지역과 기업이 직면한 신사업 관련 덩어리 규제를 패키지로 완화해 주는 제도다. 

 

규제샌드박스, 그 2년간의 성과(2020년 1월 기준)
규제샌드박스, 그 2년간의 성과(2020년 1월 기준)

규제샌드박스가 비단 사업자에게만 오아시스가 되는 건 아니다. 시장에 활력이 돌면, 그 수혜는 단연 소비자에게 돌아간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모바일 대출 비교 플랫폼’이다. 하나의 앱을 통해 여러 금융회사의 대출 조건을 비교‧신청하는 서비스,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지만 이 역시 2019년 규제샌드박스를 통해 소비자를 만났다. 기존에는 ‘대출모집인은 1개의 금융회사와만 대출모집업무 위탁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는 금융감독원의 ‘대출모집인 모범규준’에 따라 시장에 나올 수 없는 사업이었다. 지난해 6월 임시허가를 통해 허용된 모바일 운전면허증 역시 소비자의 편의를 증대시킨 규제샌드박스 사례다. 본래의 도로교통법은 운전면허증의 크기와 소재를 명확히 규정하고 있었지만, 과기부의 ICT규제샌드박스를 통해 모바일 운전면허증으로도 운전자 자격과 개인 신분 확인이 가능해졌다. 

규제샌드박스는 분명 유의미한 성과를 만들어가고 있다. 제도를 통해 어렵사리 고객들과 만난 사업자들은 “샌드박스라는 큰 선물 덕분에 꿈에 한 발짝 다가섰다”고 입을 모은다. 샛별 같은 아이디어가 시장에서 반짝반짝 광채를 내는 순간, 사업자와 소비자, 그리고 혁신성장 기조를 가진 정부 모두 그 빛을 공유한다. 

하지만 정부가 만든 이 모래놀이터에 찬란한 빛만 내리쬐고 있는 건 아니다. 부처 및 산업 간 이해관계의 충돌, 지지부진 길어지는 승인 기간, 전문성이 결여된 사업 해석과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법 해석 등 산적한 문제도 많다. 법의 엄중함과 경직성이 스타트업의 기민함과 변화무쌍함과 만났으니 크게 무리도 아니다. 정미나 코리아스타트업포럼 정책실장은 “규제샌드박스 심의는 검증과 실증을 통해 해당 기업의 사업모델이 실제로 파급력을 만들 수 있는지 빠르게 확인하는 것이 관건인데, 현재는 거의 법 개정 수준의 강도로 심의를 하다 보니 스타트업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2년 동안 승인이 계류되고 있다는 한 스타트업의 창업자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피벗을 해도 진작 했을 것”이라는 말로 허탈함을 드러냈다. 그는 이어 “단 한 번이라도 시장에서 내 비즈니스를 테스트해보겠다는 오기로 버텨왔지만 이젠 그 마저도 한계”라며 고개를 떨궜다. 

※다음주 [클로즈業]에서는 한국형 규제샌드박스 제도가 보인 한계와 문제점, 그리고 그 모래밭에 파묻혀 좀비기업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스타트업들의 속내를 들여다봅니다.

 

필자소개
최태욱

눈이 보면, 마음이 동하고, 몸이 움직이는 액션 저널리즘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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