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의 사회성 ‘무럭무럭’ 키운다
HOME > > >
발달장애인의 사회성 ‘무럭무럭’ 키운다
발달장애인의 사회성 ‘무럭무럭’ 키운다
2015.09.17 21:17 by 최태욱

치열한 세상이다. 부대끼며 살다 보면 한 번씩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된다. ‘이게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이 물음에 응답한 사람들의 스토리다. 누군가는 창업을 했고, 어떤 이는 공방을 열었다. 무작정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고 갈 길은 멀다. 제대로 구조를 갖추지 못해 고군분투하기 일쑤다. 그래도 고무적인 건, 이들 모두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는 점이다. ‘언더 스탠드 에비뉴(Under Stand Avenue)’는 이들의 꿈을 응원하는 공간이다. 롯데면세점이 문화예술사회공헌네트워크‧성동구청과 함께 꾸려가는 사회공헌 창조공간으로, 우리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혁신기업가‧예술가‧비영리기획자 등이 함께한다. 더퍼스트는 이들의 도전이 활짝 꽃피우는 그날을 기대하며 ‘변화를 만나다’ 시리즈를 연재한다.

도심 속 작은 텃밭 ㈜동구밭

  “눈도 못 맞추던 친구가 안부를 묻기 시작했어요. 안 오는 사람을 찾기도 하고, 대신 밭에 물을 주기도 하죠. 혼자만의 세계에 머물던 발달장애인들이 이젠 주변을 보는 겁니다.”

노순호(26) 동구밭 대표가 말하는 지난 3년간의 성과다. 노 대표는 “토요일 아침이면 일어나자마 날씨를 확인하고 장화부터 챙기는 친구도 있다더라”면서 “작은 텃밭을 통해 만들어지는 큰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고 했다.

크기변환_2015봄_팻말만들기_성동
 

 ‘텃밭’이라 쓰고, ‘소통의 장’이라 읽는다

지난 2013년 설립된 동구밭은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우러져 도심 속 텃밭을 일구고, 이를 통해 발달장애인의 사회성을 키우는 소셜벤처다. 현재 동작‧종로‧송파‧은평‧용산‧영등포 등 서울시 12개 자치구에서 텃밭을 운영하고 있다. 설립 3년 만에 72명의 발달장애인(20세 이상)과 84명의 대학생 봉사단이 함께 하는 규모로 성장했지만, 시작은 동아리 활동에 불과했다. 창업멤버 4명은 모두 홍익대 인액터스(Enactus‧사회적 문제를 비즈니스로 해결하는 대학생 연합 동아리) 멤버였다.

“팀원들 모두 도시 농업에 대한 관심이 컸어요. 도시농업이 공동체 회복에 도움을 준다고 믿었거든요. 공동체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이 누굴까 고민하다가 ‘발달장애인’을 생각하게 됐죠.”(노순호 대표)

설립 초기에는 ‘장애인의 일자리’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발달장애인들에게 도시농업을 활용한 직업을 만들어주자는 것. 도시농업에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하고 이를 토대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서울시 강동구청의 협조로 텃밭 부지를 분양받고, 5명의 발달장애인과 직업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이 시초다.

그렇게 1년이 지날 무렵, 동구밭은 커다란 변화를 맞닥뜨렸다. “(노)순호씨는 우리 아이를 잊겠지만, 우리 아이는 순호씨를 평생 기억할거예요. 비장애인과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무언가를 함께해 본 경험이 없거든요. 우리 아이에겐 순호씨가 생애 첫 친구에요.” 텃밭활동에 참여했던 발달장애인의 어머니가 건넨 얘기. 참가자들의 만족감과 호응이 농업기술이나 직업훈련이 아닌 ‘함께하는 시간’ 덕분이란 걸 깨우친 계기다.

노 대표는 “고교를 졸업한 발달장애인 5명 중 3명이 평생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이 산다고 하더라”면서 “장애인에게 직업은 생계유지 수단이 아니라, 소통할 수 있는 창구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는 걸 깨달았다”고 회상했다. 텃밭을 활용한 사회성 교육 프로그램으로 사업 노선이 변경된 이유도 그래서다.

크기변환_2014봄_수확_강동
 

 오롯이 발달장애인 당사자에 초점 맞춘 활동 

이후 동구밭의 모든 활동은 발달장애인 당사자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노 대표는 “다문화 가정이나 시니어 관련한 이슈도 심각한 사회문제지만, 그들은 적어도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고 했다.

장애 분야로 좁혀도 상황은 비슷했다. 농아인 협회, 시·청각 장애인 협회는 있어도 발달장애인 협회는 없었다. ‘부모회’란 이름의 단체가 협회를 대체하고 있을 뿐이었다. 노 대표는 “발달장애인 정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발달장애인) 부양가정이나 관계자를 위한 것이었다”며 “오롯이 그들의 입장과 상황을 대변하고, 목소리를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현재 동구밭의 활동을 보면 그런 의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먼저 텃밭의 위치다. 발달장애인의 사회성 향상을 위해 지역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최우선으로 한다. 지하철역에서 5분 이내 거리를 고집하는 이유도 그들의 왕래 편의성을 돕기 위해서다.

응용능력이 떨어지는 특성을 고려, 텃밭활동도 최대한 단순하게 설계했다. 잎채소나 허브류 등 재배가 쉽고, 수확도 빠른 작물을 선정한 것도 그래서다. 텃밭활동에 필요한 교구나 교재도 자체개발하여 활동을 돕고 있다. 현재는 수확 가능한 크기나 심는 간격을 알기 쉽게 가늠케 해주는 도구 등이 쓰이고 있다. 지연수(21) 동구밭 부대표는 “발달장애인들의 어려움을 해결할만한 교구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지만, 비용문제 때문에 실제로 만들 수 있는 건 별로 없다”고 끌탕했다.

서울시 강동구 상일동에 위치한 '강동텃밭' 전경, 강동텃밭은 동구밭의 제 1호 텃밭이다.

12개 텃밭에는 사진·영화·음악·요리·운동 등 각각의 테마가 있는데, 이 역시 발달장애의 특성을 감안한 것이다. “발달장애인은 취미가 상당히 뚜렷하고 몰입도 역시 높아요. 하나에 꽂히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수준이죠. 이 친구들이 관심사를 찾아 연결시키면 단단한 커뮤니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노순호 대표)

각각의 테마는 다양한 활동으로 연계되기도 한다. ‘요리’를 테마로 하는 텃밭에선 수확작물들로 요리대회를 열고, 음악이 테마인 곳은 콘서트를, 사진을 테마로 한다면 사진전을 개최하는 식이다. 이밖에도 농사를 통한 사회 소통 프로그램 ‘오감놀이’, 발달장애인들이 또 다른 사회 취약계층에게 기부를 하는 체험행사 ‘소팜소굿(So Farm, So Good)’, 수확 작물을 나누는 자리인 ‘땡스기빙파티(Thanks Giving Party)’ 등 연중 다채로운 활동이 진행된다.

올해 초 용산텃밭에서 진행된 땡스기빙파티에서 노순호 대표(맨 왼쪽)가 참가자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무관심·편견 이겨내고 발달장애인의 희망 키워나갈 것

팀원 4명이 12개의 텃밭과 150여명에 이르는 발달장애인·대학생봉사자를 관리하다보니 늘 힘에 부친다. “지난 3년간, 토요일은 모두 반납했다”고 할 정도.(동구밭의 텃밭활동은 매주 토요일에 진행된다.) ‘사람과의 관계’를 핵심으로 여기기 때문에 대학생 봉사자 한 명을 뽑을 때도 팀원 모두가 달라붙어 심혈을 기울이고, 한 달에 걸쳐 필요한 교육도 마련해준다.

조금씩 늘어나는 텃밭 수와 참가자들의 감사인사에 힘을 얻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대학생들이 뭘 할 수 있겠냐’는 무시나, ‘장애인 복지에 왜 돈을 받느냐’는 편견도 이겨 내야 할 장벽이다. 현재 가장 고민하고 있는 부분은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문제. 사회적 가치 이전에 기업으로서 감내해야할 과제다.(동구밭 팀원들의 급여는 여전히 최저임금에 못 미친다고 한다.)

현재 동구밭의 수익활동은 크게 두 가지 정도. 텃밭 활동에 참여하는 발달장애인의 참가비가 가장 비중 있는 수익원이다. 참가비는 회당 1만원 정도. 발달장애인 중에서도 한 부모 가정 등 취약계층에겐 무료로 제공된다. 최종 결과물인 케일·상추·당근·바질허브 등을 활용해 제작하는 유기농 비누는 현재 음료업체 ‘머시주스(Mercy Juice·강남구 신사동)’, 온라인 편집숍 ‘29cm’ 등에서 판매되고 있다. 안윤아 동구밭 디자이너는 “재배에 참여한 장애인들이 직접 만들고, 우리가 디자인·포장·유통하는 구조인데 제작단가가 비싸다보니 판매는 저조한 편”이라고 했다.

비누를 팔아서 나오는 수익금은 모두 텃밭에 재투자된다. 동구밭의 목표는 서울시 25개 자치구에 텃밭을 하나씩 만들어, 발달장애인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정부 및 기업의 관심이다. KT송파지사가 주차장 자리를 내줘 꾸려진 ‘송파텃밭’이나, 이랜드 그룹의 후원으로 지난달 말 엔씨백화점(강서지점) 옥상에 마련된 ‘강서텃밭’이 좋은 예다.

“우리 활동이 1년을 주기로 하는데, 벌써 3년째 함께하는 친구도 많아요. 우리 프로그램이 좋은 이유도 있겠지만 사실은 딱히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지관에서 제공하거나 정부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대부분 18세면 끊기거든요. 20대 발달장애인은 소통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어요. 동구밭의 목표가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이유죠.(노순호 대표)” /사진: 동구밭 제공

필자소개
최태욱

눈이 보면, 마음이 동하고, 몸이 움직이는 액션 저널리즘을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