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불러 주자 꽃이 되었다’
HOME > > >
‘이름을 불러 주자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불러 주자 꽃이 되었다’
2015.10.06 11:02 by 조철희

치열한 세상이다. 부대끼며 살다 보면 한 번씩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된다. ‘이게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이 물음에 응답한 사람들의 스토리다. 누군가는 창업을 했고, 어떤 이는 공방을 열었다. 무작정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고 갈 길은 멀다. 제대로 구조를 갖추지 못해 고군분투하기 일쑤다. 그래도 고무적인 건, 이들 모두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는 점이다. ‘언더 스탠드 에비뉴(Under Stand Avenue)’는 이들의 꿈을 응원하는 공간이다. 롯데면세점이 문화예술사회공헌네트워크‧성동구청과 함께 꾸려가는 사회공헌 창조공간으로, 우리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혁신기업가‧예술가‧비영리기획자 등이 함께한다. 더퍼스트는 이들의 도전이 활짝 꽃피우는 그날을 기대하며 ‘변화를 만나다’ 시리즈를 연재한다.

마리몬드, 위안부 할머니들의 존귀함을 꽃피우다

 세상엔 많은 꽃들이 있다. 모양․이름도 제각각이고 꽃말도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아이리스는 ‘기쁜 소식’, 튤립은 ‘사랑의 고백’, 라벤더는 ‘침묵’을 표현한다. 꽃의 아름다움과 함께 그 꽃이 지닌 의미 또한 사람들이 꽃을 즐기고 사랑하는 요소다.

“마리몬드(Marymond)라는 가상의 꽃을 만든 거예요. 그 안에는 ‘존귀함의 회복’이라는 의미를 담았죠.” 윤홍조(30) 마리몬드 대표의 말이다. 마리몬드는 꽃을 소재로 다양한 디자인 상품과 콘텐츠를 제작하는 소셜벤처. 올해 초엔 인기연예인이 사용하는 휴대전화 케이스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회사의 가장 큰 특징은 제품이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이 심리 치료과정에서 그린 꽃을 모티브로 제작된다는 것. “마리몬드의 제품엔 위안부 할머니들의 ‘정신’이 고스란히 배어있다”고 말하는 이유다.


윤홍조 마리몬드 대표의 영상 인터뷰

“‘나눔의집’이라는 곳에 갔던 적이 있어요. 역사관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모의 위안소가 설치돼 있는데 그곳 분위기가 너무 침울했죠. 모두 우리 할머니 연배셨는데… 마음이 너무 불편하더라고요.”

윤 대표는 대학 재학시절인 2010년, 처음 위안부 할머니들과 인연을 맺었던 때를 또렷이 기억한다.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나눔의집은 생존 위안부 할머니를 후원하는 시설. 그가 국제 비영리 학생단체인 ‘인액터스코리아’에서 활동했던 때 맡았던 프로젝트가 나눔의집의 수익구조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프로젝트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윤 대표는 “파트너에 대한 공부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프로젝트 파트너가 대구에 위치한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으로 바뀌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 단체의 브랜드인 ‘희움’을 수익사업으로 정착시키고자 서브 브랜드인 ‘희움 더 클래식’을 만들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압화(壓花․꽃을 눌러 만드는 방식) 작품을 넣어 스카프‧넥타이‧손수건 등의 제품을 출시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랭했다.

위의 故 심달연 할머니의 압화 작품을 모티브로 마리몬드가 제작한 패턴. (사진: 마리몬드 제공)

윤 대표는 “섬유는 제품을 만드는데 상당히 제약이 많은 소재인데, 별 고민 없이 섬유 제품을 선택했던 게 실수였다”고 했다. 그는 이어 “만드는 입장에서도 ‘이게 팔릴 까’ 고민했을 정도로 만족스럽지 못했던 게 사실”이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연이은 실패가 헛된 것은 아니었다. 이 경험이 지금의 마리몬드를 있게 한 자산이 됐던 것. 바로 ‘패턴의 발견’이었다. 이후 윤 대표는 제품이 아닌 패턴에 집중했다. 지금까지의 작업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을 엮어 ‘패턴집’을 발행했는데, 이를 통해 패턴의 모티브를 제공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피해자가 아닌 예술가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했다. 사업화 가능성을 인정받아 창업 지원사업인 ‘H-온드림 오디션’(2013)에 선정돼 재정지원도 받게 됐다.  

윤홍조 마리몬드 대표

패턴 디자인이라는 콘텐츠와 든든한 재정지원이 더해지자 사업도 모양새를 갖춰 나갔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존엄성 회복’이라는 미션을 향한 고민도 한층 깊어졌다. 지난 2014년에 탄생한 ‘마리몬드’가 그 결실이다. 마리몬드(Marymond)는 나비를 뜻하는 라틴어인 ‘마리포사(Mariposa)’와 ‘꽃 피는 아몬드나무’의 ‘아몬드(Almond)’를 합친 말. 고흐의 그림으로 유명한 ‘꽃 피는 아몬드나무’는 새 생명과 부활, 회복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2014년 윤 대표와 두 명의 디자이너로 시작한 마리몬드는 지금은 직원이 20여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 제품은 스마트폰 케이스 30종을 비롯해, 의류‧가방‧문구류 등 총 150여종에 이른다. 텀블러를 만드는 사회적기업 ‘브링유어컵’, 가죽브랜드 ‘이서’ 등 다른 브랜드와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제품 라인도 더욱 풍성해졌다.

올 여름 마리몬드가 새로 출시한 메리골드 라인. 제품 속 패턴은 현재 인권운동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길원옥 할머니와 메리골드 꽃의 이미지를 결합해 탄생했다. (사진: 마리몬드 제공)

모든 제품에 프린트된 꽃 패턴은 마리몬드의 상징과도 같다. 패턴 디자인은 위안부 할머니의 압화작품이나 그들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다. 지난 여름 선보인 ‘메리골드’라인은 후자에 해당한다. 증언집이나 백서 등에 담긴 길원옥 할머니의 이야기와 메리골드 꽃의 이미지가 결합돼 탄생했다.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가치를 대중들이 가장 좋아하는 형태로 바꿔 담아내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연민의 대상이 아닌 존경의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윤 대표는 마리몬드를 지하철역에 광고를 걸어주는 ‘아이돌 가수의 팬클럽’에 비유했다. 직원들은 매주 수요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시위’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다. 제품 수익금 일부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등 관련 시민단체에 전달한다. 올 8월까지 누적 기부금은 1억3000만원이 넘는다.

마리몬드는 2014년 F/W시즌 맨투맨 티셔츠 제품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판매했고, 순수익금 전체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와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에 전달했다. 사진은 지난 1월 수요시위에서 마리몬드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활·복지 기금으로 써달라며 수익금의 50%를 정대협에 기부하는 모습. (사진: 마리몬드 제공)

윤홍조 대표는 마리몬드가 위안부 할머니들에겐 존귀함의 회복을, 일반 대중들에겐 힐링을 선사하는 브랜드로 기억되길 바란다.

“현대 여성들이 많이 지쳐 있잖아요. 예쁜 제품, 그리고 제품 곳곳에 새겨진 의미 있는 글귀를 보면서 휴식과 회복을 경험하지 않을까요? 최종 목적은 파리나 런던의 핫플레이스에도 매장을 내는 겁니다. 그때는 명품 브랜드가 초기창업자의 사진을 매장에 걸어두는 것처럼 할머니들의 사진을 걸어둘 겁니다.”

필자소개
조철희

늘 가장 첫번째(The First) 전하는 이가 된다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