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1000개 만나니…미래가 엿보이더라고요.”
안준현 이랜드벤처스 VC팀장 인터뷰
“스타트업 1000개 만나니…미래가 엿보이더라고요.”
2021.08.18 08:25 by 최태욱

[대-스로운 창업생활]은 최근 대기업의 혁신 트렌드로 자리매김한 ‘오픈이노베이션’ 분야의 담당자를 직접 만나 대기업-스타트업 상생 발전의 노하우를 들어보는 릴레이 인터뷰 시리즈입니다. 

대기업이 출자한 벤처캐피탈, 이른바 ‘CVC(Corporate Venture Capital)’가 스타트업 생태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지난해 말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관련 규제가 완화된 이후 달라진 풍경이다. 이미 삼성‧현대차‧SK‧LG 등 주요 대기업이 CVC를 통해 미래를 정조준했고, 무신사나 직방 같은 스타트업까지 동참하며 마중물의 깊이를 키우고 있다. 

올해 1월 출범한 이랜드벤처스도 그 중 하나다. 기술과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외부 스타트업의 혁신을 수혈해, 패션‧유통‧F&B‧레저 등 그룹이 활약하는 분야의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계획. 지난 2018년부터 다양한 스타트업과의 협업 및 교류를 도모해온 이랜드 그룹의 오픈이노베이션 활동에 정점을 찍는 상징적인 행보다. 그런데 이러한 행보에서 빠질 수 없다고 평가받는 이름이 있다. 지난 2015년 이랜드 전략기획실 입사를 시작으로, 그룹 본사 및 계열사를 넘나들며 그룹 혁신의 첨병 역할을 수행해온 안준현 이랜드벤처스 VC팀장이 그 주인공이다. 안정적이지만 경직된 대기업과 유연하지만 불안한 스타트업의 가교 역할을 자처해 온 안 팀장의 이야기에는 ‘모두를 위한 혁신’의 실마리가 담겨있다. 

 

안준현(사진) 이랜드벤처스 팀장
안준현(사진) 이랜드벤처스 팀장

| 꿈꾸던 청년의 각성…“꿈은 꾸는 것이 아니라 빚어가는 것”

“대학 시절부터 취업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닥치고 창업’ 마인드였죠.(웃음)”

지난 2010년, 실리콘밸리에서 건너 온 ‘스타트업’이란 네 글자가 청춘들의 열정과 에너지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창업 관련 강연이나 도서가 앞 다투어 소개됐고, 이에 감응해 칼을 뽑아드는 젊은 창업자도 하나둘 등장했다. 쿠팡이나 위메프 같은 소셜커머스 기업이 발원했던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안준현 팀장도 ‘실리콘밸리 키즈’ 중 하나였다. 대학생 신분으로 호기롭게 소셜커머스 기업을 창업하며 스타트업 생태계와 첫 연을 맺었다. 

“오늘 보단 내일에 더 관심 있는 성향이었어요. 늘 새로운 것들을 탐구했고, 그게 현재의 산업을 어떻게 바꾸어줄까를 그려보며 희열을 느꼈죠.”

하지만 의욕만 앞섰던 젊은이의 패기는 금세 밑천을 드러냈다. 안 팀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 부족한 부분만 여실히 드러났다”며 “회사를 꾸려나가는 것도, 성장시키는 것도 높은 수준의 역량과 스킬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회상했다.

 

안 팀장의 대학시절 모습. 그의 호기심과 도전정신은 일찌감치 그를 스타트업씬으로 안내했다.
안 팀장의 대학시절 모습. 그의 호기심과 도전정신은 일찌감치 그를 스타트업씬으로 안내했다.

그길로 회사를 정리하고 역량강화를 위한 수순에 돌입했다. 선결과제였던 대학 졸업을 마치곤 국내 굴지 대기업의 기획팀과 글로벌 전략컨설팅펌 등 다양한 직무를 경험하며 부족한 역량을 쌓았다. 잠재적 창업가인 자신의 성장을 도모키 위한 ‘플랜B’인 셈. 창업과 경영전반의 전략과 문제해결능력을 한층 더해 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업무 경험이 쌓일수록 지식은 두터워졌지만 마음 한 편의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컨설팅 회사에선 특히 목마름이 더했다. 의뢰를 받고 제안서를 넘기면 종료되는 업무 특성상 스스로 세운 전략들이 실제 시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피드백이 안 됐던 것. 그만큼 얻을 수 있는 성취도 제한적이었다. 마음만은 창업가인 안 팀장은 늘 페이퍼 너머의 현장을 그리워했다.

그런 고민 중에 조우하게 된 기회가 바로 이랜드 그룹이었다. ‘전략기획실 공채’. 전략적인 인사이트를 맘껏 펼쳐보고, 시장의 피드백도 즉각적으로 얻을 수 있는 포지션이었다. 2014년 말 무렵. 안준현 팀장이 새로운 기회의 땅에 입성한 순간이자, 그가 품은 꿈의 궤도가 살짝 틀어지는 순간이었다. 

 

| 그룹 내 공기 바꾼, 혁신의 공기청정기
전략기획실은 해당 기업의 중장기 경영전략 뿐만 아니라 사업부의 당면 과제에 대한 솔루션을 제안하고 실행까지 책임지는 부서다. 시장과 고객을 면밀히 분석해 기업이 나아갈 방향을 정한다는 면에서 경험, 지식, 현실감각, 통찰력 등이 고루 요구된다. 통상 전략기획실을 조직의 ‘브레인’으로 여기는 이유도 그래서다. 

안준현 팀장이 초기에 맡았던 업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룹 내 계열사들의 수많은 의뢰들, 이를테면 “어떤 브랜드를 론칭해야 할까?”, “어떤 제품 라인을 강화해야 할까?”, “어떤 소비자군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 같은 미션을 받으면, 그에 맞는 팀을 꾸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식이다. 하지만 안 팀장이 제시하는 솔루션은 조금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자신의 성향에 따라 늘 새로운 방식, 새로운 기술을 덧대려 애썼고, 그럴 때마다 외부의 스타트업 생태계와 그 속에서 있는 기회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사업과 관련된 의뢰가 특히 많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세상에서 새롭다는 것들은 죄다 스타트업이 하잖아요. 자연스레 그 쪽에서 찾게 되는 거죠. 자원교류도 하고, 협업사업도 하고, 필요하면 합작벤처도 했어요. 기대 이상의 성과가 나오자 경영진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라고요.”

 

이랜드 전략기획실 시절의 안 팀장(오른쪽)
모 스타트업 대표와 업무 논의 중인 안준현 팀장(오른쪽)

조직 밖에서 더 나은 해결책을 찾고자 했던 안 팀장의 노력은 그 자체로 ‘오픈이노베이션’(기술혁신의 모든 과정에서 외부의 기술‧지식‧아이디어를 활용함으로써 효율성과 부가가치를 극대화하는 기업 혁신의 방법론) 활동이었다. 협업과 교류를 통해 스타트업의 기술과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일하는 스타일도 공유됐다. 이는 혁신의 민첩성을 키우는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안 팀장이 이랜드리테일에 있던 시절 주도했던 ‘디자이노블’과의 협업이 대표적인 예다. 

“패션 분야에선 디자이너들이 제품을 만들죠. 그런데 이 디자인 작업을 인공지능(AI)으로 대체 가능한지 보고 싶은 거예요. 그걸 전부 내부에서 하면 비용은 많이 들고 효율은 떨어질 겁니다. 그럴 때 디자이노블 같은 AI패션 컨설팅 업체와 같이 해보는 거예요. 그쪽 전문가들이 AI로 제품을 만들면 우리 회사가 받아서 실제로 판매해보는 식으로 공동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거죠.”

이 과정에서 이랜드는 AI의 생산성을 체감하며 자연스레 업무 방식의 변화가 일어난다. 파트너 스타트업인 디자이노블 역시 얻어가는 게 많다. 대기업의 유통망을 활용해 보다 객관적으로 사업성을 검증‧평가받을 수 있다. 실제로 디자이노블은 이랜드와의 협업 이후 혁신성과 사업성을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랜드리테일의 PB브랜드 레겐보겐과 디자이노블의 협업 제품(사진: 이랜드리테일)
이랜드리테일의 PB브랜드 레겐보겐과 디자이노블의 협업 제품(사진: 이랜드리테일)

눈에 보이는 성과들이 쌓이자 회사 내 공기도 차츰 바뀌어 갔다. 의심어린 눈초리와 성가신 뉘앙스를 풍기던 초반의 분위기가 점차 호기심으로, 호기심은 다시 의지로 바뀌며 하나둘 혁신 대열에 합류했다. 미래 먹거리에 관심이 높은 리더급 포지션에서는 더욱 적극적이다. “우리 사업부의 미래를 위해선 ‘이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다”거나 “어떤 스타트업을 알게 됐는데 이곳과 함께 해도 괜찮을지 확인해 달라”는 요청이 시나브로 늘고 있는 추세다. 달라진 공기는 안 팀장을 더욱 분주하게 만든다. 스타트업들과 뜻을 합치고 힘을 모으는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그 성과는 기업의 유‧무형 자산으로 쌓여간다. 

“스타트업의 방식이 ‘모두 옳다’고 보는 건 아니에요. 핵심 사업에 집중하며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생존을 담보하는 대기업의 방식도 분명 가치 있죠. 하지만 무슨 일이든 시작과 끝이 있잖아요. 계속해서 새로운 문을 열어야 하는데, 대기업의 무겁고 경직된 의사결정으론 한계가 있는 게 사실이거든요. 바로 이 부분의 실마리를 스타트업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겁니다.”

열린 혁신을 위한 노력은 이제 더 이상 안 팀장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그룹 내 오픈이노베이션을 반영한 핵심성과지표(KPI)가 생기고, 본격적인 벤처투자의 거점인 이랜드벤처스가 설립되는 등 전사적으로 혁신의 고삐를 당기고 있다. 지난달 그룹의 핵심 계열사 두 곳에서 업계 최연소 CEO를 깜짝 발탁한 것도 오늘보단 내일에 무게중심을 뒀기에 가능했던 행보다. 

 

| 한 수 접은 창업 꿈…다음 목표는 최고의 투자자
최근 안준현 팀장의 일상은 스타트업으로 시작해 스타트업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업무 시간의 절반가량을 스타트업 대표를 만나는데 할애하고, 나머지 절반은 그 스타트업을 분석하는데 쓴다. 올해 1월, 이랜드벤처스의 VC팀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생긴 변화다. 안 팀장은 “투자는 오픈이노베이션의 한 갈래이자, 오픈이노베이션을 활성화시키는 최적의 수단”이라며 그룹 내 전문 투자법인이 신설된 것을 환영했다. 설립에 맞춰 전문 투자심사역의 교육을 받고 인증까지 따낸 것도 그 나름대로의 환영 준비였던 셈이다. 

안 팀장이 주로 모니터링 하는 분야는 콘텐츠, 플랫폼, IT서비스 등이다. 모두 그룹이 보유한 계열사와 접점이 있으며 향후 미래가치가 높은 분야다. 토스뱅크, 컬쳐히어로, 올링크, 태그바이 등 유망 스타트업이 좋은 예다. 회사를 직접 일궈봤던 창업자, 사업전략을 수립했던 컨설턴트, 각종 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협업 파트너 등 다양한 경험과 전문성을 밑천으로 투자심사역 평균 수익률을 훌쩍 상회할 정도의 성과를 만들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는 발품이다. 한 해 최대 1000여개에 이르는 스타트업 대표들을 직접 만나며 그들의 미래 구상에 귀를 기울인다. 회의 테이블에선 만감이 교차한다. 벤처캐피탈 시장을 비롯해 민‧관의 지원책이 풍부해진 요즘 젊은이들이 부럽기도 하고, 며칠 밤을 새며 허덕이는 모습에선 애틋함도 느낀다. 안 팀장은 “나 때도 그랬지만, 정말 열정 없인 할 수 없는 게 바로 창업”이라며 동지애를 과시한다. 

 

전문 투자자의 길로 들어선 안준현(사진) 팀장
전문 투자자의 길로 들어선 안준현(사진) 팀장

10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그의 정체성은 Dreamer에서 Dream Maker로 바뀌었다. 비결을 묻는 질문에는 호기심과 메타인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문적인 지식과 그로 인한 통찰력은 기본. 그 기본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호기심이란 설명이다. 안 팀장은 “지속적으로 바뀌는 시장과 고객을 예측하기 위해선 끊임없는 고민과 탐구가 필요한데, 이를 가능케 하는 연결고리가 바로 호기심”이라고 했다. 변화무쌍한 스타트업씬의 특성을 감안, ‘메타인지’(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자각하고 스스로 문제점을 찾아내 해결하는 능력) 역시 중요한 자질로 꼽았다. 

첫 창업 이후의 절치부심했던 그는 이제 더 이상 ‘열정만 가득한 대학생’이 아니다. 창업가의 꿈은 완전히 접은 것일까?

“돌이켜보면 과정들은 늘 쉽지 않았어요. 창업 땐 무력감으로, 회사 내에선 야속함이나 좌절감으로 힘든 때도 있었죠. 하지만 스타트업과 함께 호흡한 덕분에 새로운 동력을 얻어가며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이젠 투자자로서 그들과 호흡해야죠. 일단은 제가 눈여겨보는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투자자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 창업 욕심이요? 글쎄요.(웃음)”

 

필자소개
최태욱

눈이 보면, 마음이 동하고, 몸이 움직이는 액션 저널리즘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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