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 원단으로 감각적인 가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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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 원단으로 감각적인 가방을”
“간판 원단으로 감각적인 가방을”
2015.11.04 20:35 by 이화정

치열한 세상이다. 부대끼며 살다 보면 한 번씩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된다. ‘이게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이 물음에 응답한 사람들의 스토리다. 누군가는 창업을 했고, 어떤 이는 공방을 열었다. 무작정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고 갈 길은 멀다. 제대로 구조를 갖추지 못해 고군분투하기 일쑤다. 그래도 고무적인 건, 이들 모두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는 점이다. ‘언더 스탠드 에비뉴(Under Stand Avenue)’는 이들의 꿈을 응원하는 공간이다. 롯데면세점이 문화예술사회공헌네트워크‧성동구청과 함께 꾸려가는 사회공헌 창조공간으로, 우리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혁신기업가‧예술가‧비영리기획자 등이 함께한다. 더퍼스트는 이들의 도전이 활짝 꽃피우는 그날을 기대하며 ‘변화를 만나다’ 시리즈를 연재한다.

업사이클링 브랜드 ‘패롬’

  네모반듯한 건물 외벽에 문자들이 뒤엉킨다. 형형색색 치장과 자극적인 문구는 시민의 눈을 어지럽힌다. 도시경관의 주적으로 불리는 ‘간판(看板)’ 얘기다. 전국의 간판 수는 이미 지난 2010년 500만개를 훌쩍 뛰어 넘었다. 그중 절반 이상은 불법(옥외광고물 등 관리법 위반)이다. ‘간판 공해’라는 말이 생기는 이유다.

눈을 찌푸리게 했던 간판이 다시 태어난다. 공해를 공예로, 폐품을 명품으로 만드는 ‘업사이클링’ 브랜드 ‘패롬(Parrom)’을 통해서다. 패롬은 간판 원단을 수거한 후 디자인 요소를 가미해 가방으로 재탄생키는 브랜드다. 디자인 포인트는 눈에 띄는 색감. 사명(社名) ‘패롬’의 모티브도 화려한 색을 자랑하는 앵무새(Parrot)에서 얻었다. 한장흠 패롬 대표(30)는 “앵무새처럼 눈길 끄는 컬러와 세련된 패턴을 가진 나만의 가방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패롬’ 한장흠 대표의 모습. 한장흠 대표가 천안의 작업실에서 재봉틀기계로 가방을 제작 중인 모습.

 

간판 원단이 가진 재료로서의 가치에도 주목했다. 페롬은 도시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는 간판 원단인 ‘후렉스’, ‘타포린’ 등을 주로 사용하는데, 모두 열에 강하고, 비와 눈도 견딜 수 있는 강한 내구성을 지니고 있었다. 패롬의 탄생은 언제나 ‘특별한 것’을 찾았던 한 대표의 성향과 맞물려 있다. 그는 “학창 시절 곧잘 4차원이라 불렸다”면서 “그림 그리고 싶은 날엔 수업도 마다하고, 종일 캔버스 앞에만 앉아 있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패션디자인학과에 진학해서도 옷 보다는 가방에 꽂혔다. ‘얜 대체 뭐가 되려고 이래?’라며 혀를 끌끌 차는 부모님의 잔소리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장 미셸 바스키야’(Jean Michel Basquiat‧지하철 등의 지저분한 낙서를 예술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미국의 낙서화가) 같은 예술가로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주머니가 가벼웠던 시절, 돈 안 들이고 가방 만드는 법을 궁리하다 옥외간판 원단에 꽂혔다. 새 것이나 다름없는 간판원단과 현수막이 쓰레기로 버려졌기 때문이다. ‘이거다!’ 싶어 몽땅 긁어모았고, 뚝딱뚝딱 재단하고 봉제하자 나만의 트렌디한 가방이 만들어졌다.

“간판 원단은 계속 내부 조명을 받고 있잖아요. 열에 굉장히 강하다는 거죠. 방수도 되고요. 여러모로 괜찮은 소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번의 실험 후 본격적인 창업 준비가 시작됐다. 다행히 장사 수완은 있는 편이었다. 한 대표는 “학창 시절 졸업 시즌에는 꽃을, 2002년 월드컵 열풍에는 붉은악마 뿔을, 2009년 신종플루 사태 때는 손세정제를 팔아 용돈을 충당했다”고 말했다.

업사이클링의 명품이라는 스위스의 ‘프라이타크(Freitag)’를 벤치마킹해 사업 모델을 만들었는데, 충남남도경제진흥원에서 주관하는 ‘청년CEO 500’ 프로젝트에 선정돼 소정의 창업활동비를 지원받기도 했다. 때마침 불어 닥친 업사이클링 붐도 도움이 됐다. 한 대표는 “성공 창업의 핵심인 ‘돈’, ‘경기’, ‘운’의 삼박자가 맞아 떨어졌다”고 했다.

‘패롬’에선 쇼퍼백, 브리프케이스, 토트백, 백팩 등 여러 형태의 가방과 지갑, 액세서리 등을 만날 수 있다. 가장 인기 있는 아이템은 역시 ‘쇼퍼백’. 방수가 되는 간판 원단에 디자이너의 프린팅으로 발랄함을 강조한 제품이다. 골목골목 숨은 매력을 지닌 홍콩의 도시, 펑크한 유인원(類人猿)의 프린팅은 ‘패롬’만의 독특한 디자인이다. 버려지는 가죽을 덧댄 손잡이 역시 ‘패롬’의 디자인 포인트.

3년 전 ‘마리몬드’의 제안으로 시작된 콜라보레이션 작업은 ‘착한 패롬’의 이미지도 만들어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살아온 삶을 꽃으로 승화시킨 ‘청춘’, 어린 시절 고향의 꽈리를 세련된 색감으로 표현한 ‘꽈리’ 등은 여성 인권이라는 사회적 가치까지 담아낸 디자인이다.  

마리몬드와 콜라보레이션으로 탄생된 쇼퍼 백‘청춘’과 ‘꽈리’.

 

패롬의 제품은 현재 명동 에이랜드(a-land), 세컨드페이지(second page) 등 오프라인 매장 에서 소비자를 만나고 있다. “아직까지는 매출이 신통치 않다”는 설명. 비싸다는 인식이 가장 큰 장벽이라고 한다. 그러나 페롬은 소비자와의 소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한 대표는 “시장에서 평가받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패롬이 디자인 공모전, 업사이클링 전시회 등을 통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이어가고 있는 이유다.

언제나 특별한 것을 꿈꿨던 한장흠 대표. 페롬 역시 업사이클링을 대표하는 특별한 브랜드가 될 수 있을까? “궁극적으로는 소비자의 개성을 살리는 라이프스타일에 꼭 맞는 가방을 만들고 싶어요. 검증된 소재와 디자인, 아이디어로 품질을 높여 친환경적이면서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브랜드가 거듭나는 게 ‘패롬’의 목표입니다.”  

디자이너들의 일러스트를 프린팅 한 쇼퍼 백. 시계방향으로  ‘택시’, ‘심장’, '블루메신저(크로스백)', ‘표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