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의 ‘입신양명’
가을이의 ‘입신양명’
가을이의 ‘입신양명’
2015.12.08 22:02 by 최태욱

한 해 버려지는 동물 8만 마리. 이들에게 주어진 골든타임은 고작 열흘. 손 쓸 시기를 놓친 동물들은 쓸쓸히 세상과 작별한다. 버려졌다는 슬픔만 간직한 채 말이다. 유기동물의 절반가량이 겪는 운명. 반려동물 인구 1000만명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버려지고 죽어갈 운명… 여기 그 운명을 깨부순 녀석들이 있다. 유기견의 패자부활전 무대, 견공들의 가치가 높아지는 곳. ‘견고(犬高)한 세상’으로 초대한다.

“삐리리리~ 삐리리리~”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리자, 통통 뛰놀던 강아지 ‘가을이’가 멈칫한다. 예사롭지 않은 눈빛. 조신한 발걸음. 방금 전 말괄량이가 아니다. 주인 김정식(가명‧59‧청각장애4급)씨에게 살포시 다가간 가을이. 오른 앞발을 쭉 뻗어 김씨의 손등을 벅벅 긁는다.  

“이게 ‘전화 왔다’는 신호에요. 영특하죠? 부엌에서 끓는 소리가 나면 부엌을 어슬렁거리며 알려주고, 뭔가 위급하다 싶으면 짖으면서 빙빙 돌죠.”  

김씨의 칭찬이 길어진다 싶더니, 급기야 재주 시연까지 이어진다.  

“가을아, 기다려!”  

사료 한 뭉텅이를 코앞에 두고 석고상이 된 가을이.  

“얘가 이래요. 내가 기다리라고 하면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도 몇 십 분씩 꼼짝 안한다니까.”  

딸 바보, 아들 바보도 아닌 강아지 바보다.  

“내 귀가 되어 달라고 들인 녀석인데, 이젠 정말 친구 같아요. 청력은 갈수록 나빠지고, 정년퇴직까지 하니 너무 적적했거든요. 우울증을 앓기도 했죠. 하지만 이젠 가을이 덕분에 웃을 일이 마르지 않아요.”  

가을이가 김씨 품에 쪼르르 안긴다. 마치 자기 칭찬인 줄 안다는 듯이. 청각장애인도우미견 가을이의 임무는 오늘도 ‘이상무’다.  

청각장애인 도우미견 ‘가을이’

장애인 보조견 법적 권리를 표시한 문구.

거리에 버려진 가을이(당시 1세 추정‧암컷‧믹스견)가 발견된 건 지난 2013년 봄. 서울시 중랑구의 어느 골목이었다. 등과 배가 붙을 만큼 삐쩍 마른 몸매. 당장 잘못돼도 이상하지 않은 몰골이었다. 간신히 구조됐지만 동물보호센터 역시 막막하긴 마찬가지. 유기견 둘 중 하나는 안락사를 면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무렵, 가을이에게 구원의 손길이 등장했다. 당시 막 설립된 ‘경기도 도우미견나눔센터’(이하 나눔센터)였다.  

“전국 26곳의 유기동물 보호소를 돌며 안락사 직전의 유기견들을 데려와요. 자질을 보고 고르죠. 건강 상태가 양호한 3살 미만의 강아지여야 하고,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친화력이 강해야 합니다. 물거나 짖지 않아야 하죠.”  

여운창 나눔센터 총괄팀장의 설명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눔센터는 단순한 구제의 손길이 아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유기견을 도우미견으로 훈련시키는 특수부대다.

2013년 구조 당시 가을이의 모습

제 한 몸조차 가누기 힘들었던 유기견이 사람을 돕는다?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합격률은 3% 미만이다.  

“센터에 입소하면, 약 2주간 입원을 해요. 예방‧백신 접종, 치료, 중성화수술에 미용까지 시키죠. 이후 사육동으로 옮겨져 기본훈련(배변‧복종)을 받죠. 이 과정이 3개월 정도 걸립니다. 여기서 두각을 드러내면 도우미견으로서 훈련받게 되요. 도우미견 전문훈련을 시키는 데는 2년 가까이 소요됩니다.”(여운창 팀장)  

기본훈련에서 자질을 인정받은 가을이는 곧바로 엘리트 코스로 넘어갔다. 장애인 도우미견은 동물매개치료견, 지체장애인보조견, 청각장애인보조견 등으로 나뉘는데, 가을이는 청각 쪽이었다. 가을이를 직접 지도한 송민수 훈련사는 “청각장애보조견 같은 경우엔 소리에 대한 반응이 남달라야 하는데, 가을이는 청각이 유독 예민했다”고 회상했다.  

환골탈태를 위한 1년 반의 노력, 가을이는 올해 5월 보건복지부가 정식으로 인증한 청각장애인도우미견이 됐다. 3%의 기적을 뚫은 것. 센터입장에서도 경사다. 지금까지 센터에서 분양한 반려견은 200여 마리. 그중 정식으로 장애인도우미견 인증을 받은 건 지난 3월에 분양된 동물매개치료견 ‘호야’가 유일했다. 그만큼 쉽지 않은 도전. 도우미견 2호, 청각장애 분야에선 첫 스타트를 끊은 가을이의 쾌거가 더 값진 이유다.  


가을이 훈련 동영상 (출처: 경기도 도우미견나눔센터)

 어릴 적부터 병치레가 잦았다는 김정식씨. 그 여파는 귀에 나타났다. 중학교 때부터 청력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오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 장애 판정까지 받았다. 작다 싶은 소리는 대부분 안 들리고, 들린다 해도 정확한 분별이 어려운 수준.  

“‘아’가 ‘오’로 들리는 식이에요. 뇌에서 잘못 인식해서 그런 거래요.”  

김씨가 나눔센터를 접한 건 지난 5월, 서울올림픽공원에서 열린 ‘동물보호문화축제’를 통해서였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딸내미 손에 이끌려 갔었어요. 아빠 외롭다고, 반려견 한 마리 키워보라고요.”

김씨는 당시 행사 현장에 홍보부스를 차린 나눔센터를 접하고, 장애인 도우미견 분양 정보를 듣게 됐다. 그리곤 며칠 후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센터를 찾았다.  

“훈련을 마친 청각장애인도우미견이 있다는데 궁금하더라고요. 직접 보고 싶었죠.”  

가을이와의 첫 만남. 사실 첫 인상은 별로였다고 한다.  

“보통 강아지 하면 작고 앙증맞은 애들을 떠올리잖아요. 근데 가을인 퉁퉁하니, 귀여운 맛이 없더라고요. 믹스견(잡종)이란 것도 걸렸고요.”  

낯선 기자를 보고 경계하는 가을이

 그런데 이상했다. 돌아온 날부터 계속 눈에 밟히더란다.  

“버려진 개였다는 사실 때문일지도 몰라요. 예전에 집에서 강아지를 길렀었는데 직장생활이 너무 바빠 신경을 제대로 못 써줬죠. 결국 어머니가 계신 시골집으로 보내버렸고요. 그때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단 죄책감이 가을이를 다시 보고 싶게 만들더라고요.”  

이후 김씨는 나눔센터를 제 집처럼 드나들며 가을이와 정을 쌓았다. 그리고 올해 8월, 가을이를 가족으로 맞았다.
김씨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강조했다. 첫 손에 꼽는 기쁨은 안 들리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것.  

“잘 모르는 사람은 ‘보청기 끼면 되지 않냐’고 해요. 그런데 사실 보청기가 굉장히 괴롭거든요. 모든 소음이 내 귀에서 커진다고 생각해보세요. 미칠 지경이죠. 이젠 가을이 덕분에 집에선 마음 놓고 빼놔요. 몸도 마음도 훨씬 편해졌습니다.”  

손을 긁으며 소리를 전하는 가을이

가을이를 새 가족으로 맞은 지 이제 4개월, 김씨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예전엔 외출조차 꺼렸는데, 이젠 가을이 덕분에 하루 두 시간씩 산책도 해요. 은근히 대화도 잘 통해요. 보세요. 제가 말하면 가만히 들어준다니까요.”  

이제 김씨에게 가을이는 도우미 이상의 존재다. 적적함을 달래주는 친구이자 생활을 리드미컬하게 바꿔주는 활력소 역할을 톡톡히 한다.  

“불과 몇 개월 전인데… 얘 없었을 땐 어떻게 살았을까 싶어요. 가을이 기운을 받아 최근에는 요리 자격증 공부도 하며 제2의 인생을 꿈꾸고 있죠. 가을이가 제게 선물한 건 청각이 아니라 새로운 삶입니다.”  

늠름하고 의젓한 자태를 뽐내는 가을이

가을이는 정식씨의 가족이자 친구다.

/사진: 이지응 작가

 다음 이야기 견공들 ‘고향 앞으로!’ 경기도 도우미견나눔센터 홈커밍데이 현장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필자소개
최태욱

눈이 보면, 마음이 동하고, 몸이 움직이는 액션 저널리즘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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