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가 전하는 메시지,‘성폭력, 더 이상 나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연극 가 전하는 메시지,‘성폭력, 더 이상 나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연극 가 전하는 메시지,‘성폭력, 더 이상 나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2015.10.01 10:56 by 이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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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미모가 재화야. 알아? 나 같은 여자가 가지지 못하는 재화. 그래서 당신을 뽑은 거야. 토익 점수? 저기 김과장이 더 잘해. 외국인 바이어에게 당신을 보내겠어, 김과장을 보내겠어? (중략) 그럼 뭘 시키겠어? 접대. 그래. 당신 그래서 뽑은 거야. 세상이 어쩔 수 없더라고. 늙고 기 쎈 대표보다 어린 여직원을 원해.”

경희는 출근하자마자 회사 대표에게 심한 말을 듣게 됩니다. 전날 있었던 접대 자리에서 자신의 허벅지를 쓰다듬던 바이어의 손을 뿌리쳤기 때문이죠. 경희는 마음을 추스를 겨를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얼굴과 몸매를 두고 수군거리는 남자 직원들의 대화를 듣고는 또 한 번 상처를 받습니다.
 
‘신기하다. 참.

직접 때리고 더듬고 한 것도 아닌데.

이런 것도 참 아프고 언짢고… 하는구나.’ 

그 순간 ‘윤희도… 그랬겠지?’라는 경희의 나지막한 독백이 이어집니다. 윤희는 경희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였는데요... 

| 극단 여행자의 배우들이 대본 리딩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어른이 되어 있을 너에게>가 꼬집는 성폭력 인식의 현주소 

지난 9월 1일, 서울시 성동구에 위치한 그랜드마고 ‘봄’홀에서 연극 <어른이 되어 있을 너에게>(양정웅 연출, 김세한 극작)의 리딩 쇼케이스가 열렸습니다. 다소 무거운 소재인 성폭력을 담고 있는 이 연극은 여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문화예술사회공헌네트워크(ARCON, 이하 아르콘)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지원을 받아 제작하는 창작 연극입니다. 리딩 쇼케이스는 완성된 대본 초고를 관계자들에게 공개하고, 더욱 의미 있는 작품이 될 수 있도록 의견을 나누고자 마련됐습니다. 자문위원 및 성폭력문제 상담가‧활동가 등 관련 분야 전문가와 아르콘,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관계자들이 참석했습니다. 

극 중 경희는 업무상 나간 술자리에서 성추행을 당하지만, 회사 대표는 성추행을 범한 남성을 불쾌하게 했다는 이유로 오히려 경희를 나무랍니다. 회사 남자 직원들은 경희의 얼굴과 몸매를 두고 성적인 농담을 일삼기도 했는데요. 이를 듣고만 경희는 더욱 상처를 입게 됩니다. 한편, 경희는 우연히 학창시절 친구인 윤희의 수첩을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이들의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전학생 윤희는 성폭행 피해자였는데요. 이를 알게 된 친구들이 윤희를 자신들과 다른 사람인양 취급하자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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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도입부는 우리 사회 속에서 어쩌면 흔히 일어나고 있을지 모르는 성폭력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업무상 용인되는 일’로, 그저 ‘농담’으로 치부될 때가 적지 않죠.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성폭력 범죄 발생 수는 2만9517건으로 나타났습니다. 2010년 2만375건에 비해 45% 늘었고, 최근 4년간 지속적인 증가세입니다. 이는 성폭력에 대해 관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너희들 지금 눈빛이 어떤 줄 알아? 나 원숭이가 된 기분이야. 철장 안에 든 원숭이.” 

극 중 윤희의 대사는 성폭력을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규정짓는 이분법적 인식을 꼬집습니다. 친구들이 “네 잘못은 아니잖아”, “당당하게 일어서자, 우리가 도울게!”와 같은 말로 진심어린 위로와 공감, 지지를 표해주었다면 윤희의 상황은 많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경희도 당시 윤희에게 손을 내밀지는 못했는데요. 사회인이 돼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비로소 그때의 윤희의 상처를 이해하게 됩니다. 박은주 아르콘 예술나눔본부장은 이 연극이 성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 나가길 기대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연극을 통해 성폭력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피해자가 내 주변이나 이웃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인식으로 발전하길 기대합니다. 나아가 폭력 피해 여성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고, 여성폭력 피해자가 건강하고 안전하게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데 일조하는 콘텐츠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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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피해자’라는 낙인, 고정관념 

“남성으로서 여성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가장 어려웠죠. 사실 이게 세 번째 대본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대본에서는 아무래도 남성의 시선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너무 천편일률적인 인식이 문제였던 거죠. 극을 쓰면서 그런 부분을 떨쳐내는 과정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어른이 되어 있을 너에게>를 쓴 김세한(27) 작가의 말입니다. 그는 <백돌비가>로 2013년 벽산희곡상을 수상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번 작품은 무엇보다도 사전조사가 중요했는데요. 지난해 11월부터 관련 자료를 모으고 성폭력 피해자들을 직접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김 작가는 가장 인상에 남았던 것으로 준비과정에서 접했던 성폭력 피해자들의 수기를 꼽았습니다.  

| <어른이 되어 있을 너에게>를 극작한 김세한 작가

‘내가 당한 일을 다룬 기사들이 누가 더 충격적이고 끔찍한지, 선정적인지 경쟁이라도 하듯 써내는 게 불편하다. ‘저런 일 당하면 살기 힘들겠다’, ‘정신이 이상해지겠다’ 생각하는 사회의 편견도 기분이 나쁘다.’ 

<꽃을 던지고 싶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등의 수기집에 나타난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위와 같이 극 중 피해자인 윤희의 독백으로 등장합니다. 피해 여성의 상처를 생생히 전달하고, 관객들이 평소 가늠해보지 못했던 피해자의 입장에 서보게끔 하는 장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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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여의 대본 리딩이 끝난 후에는, 참석한 자문위원 및 성폭력문제 활동가들의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습니다. 긍정적인 피드백과 함께, <어른이 되어 있을 너에게>를 더욱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 조언도 더해졌지요. 송다영 인천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성폭력 피해여성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고정관념”이라며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도 웃어요. 연애도 하고, 즐거운 일들도 많아요. 하지만 피해자가 그저 약자이길 바라는 현실에 부딪히면서 좌절하죠. 그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해요. 동정이 아닌 공감으로요. 이 부분이 연극에 잘 드러난 것 같아 좋았어요. 극 중에는 주인공이 직장에서 겪는 성폭력 상황도 묘사됐는데요. 아직도 많은 직장이 여성들에게 직원으로서의 역할과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모두 요구해요. 직원으로서 할 일을 한 건데, 상대가 여성으로 대하면서 성폭력이 발생하는 거죠. 극 중 직장에서의 상황 묘사에 이런 부분이 더욱 잘 반영된다면 좋겠어요.” 

원성원 교육연극연구소 프락시스 대표는 “연극에 우리의 삶이 녹아들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의 말과 생각이 대본에 더욱 담긴다면, 보는 이들도 이 연극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원성원 교육연극연구소 프락시스 대표(왼쪽에서 두 번째)가 대본 리딩이 끝난 후 의견을 전하는 모습
극 중 ‘윤희’처럼…
성폭력 피해 여성이 당당히 웃을 수 있도록

극 후반부에, 사회인이 된 경희와 윤희가 성폭력 피해여성 신고센터에서 재회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근무하던 윤희는 밝은 모습으로 경희를 맞았는데요. 윤희는 피해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이 겪은 일이 점점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고, 자신도 ‘웃어도 되는 사람’임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냥 조그만 경험이야. 남들 다 겪는 경험. 누구는 문틈에 발등이 찍힌 적이 있고, 누구는 조개를 잘못 먹어 탈이 나 다시는 조개를 못 먹게 되고, 누구는 성폭행을 당하고. 그냥 그런 인생의 경험. 그냥 조금 쓴 경험을 한 이웃일 뿐이야.” 

연극 <어른이 되어있을 너에게>는 연극은 극단 여행자와의 협업으로 제작하고 있는데요. 오는 10월 경 첫 공연을 시작으로, 내년부터 수도권에 소재한 학교나 기업, 기관 등 공연 신청을 하는 곳 등을 순회하며 연극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내후년에는 전국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공연을 확대 진행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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