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경험 그리고 기억…‘나’라는 필터 통해 예술이 됩니다.
‘아트 인 메타버스’展 안성석 작가 인터뷰
삶, 경험 그리고 기억…‘나’라는 필터 통해 예술이 됩니다.
2022.02.28 11:56 by 최태욱

[Artist in METAVERSE]는 예술과 기술을 융합하는 아티스트를 발굴‧육성하는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스타트업 ‘아츠클라우드’ 주최의 ‘아트 인 메타버스’(5월 31일까지, 성수동 언더스탠드에비뉴)展 참여 작가를 소개하는 연재 시리즈입니다. 

“2019년에 ‘젊은모색’이라는 신진작가 발굴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나중에 작가들의 조사‧발굴을 담당했던 큐레이터께서 ‘안성석이란 이름의 작가가 여러 명인 줄 알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워낙 이것저것 다 찔러보니 도저히 한 사람이라곤 생각 못했던 거죠.(웃음)”

안성석(36) 작가의 말대로다. 사진으로 출발해 회화, 설치, 영상, 게임, VR에 이르기까지 그가 통로 삼는 매체는 무궁무진하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표현의 한계를 무력화시킨다. 저돌적인 게이머의 모습과 고고한 수행자의 면모가 겹쳐 보이는 것도 안 작가 특유의 유연함 때문이다. 이토록 방대한 그의 작품 세계는 여지없이 한 지점에서 출발한다. 바로 안성석 본인이다. 자신이 살아온 세상, 자신이 겪어온 경험이나 감정,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궁금증이나 호기심 같은 것들은 오롯이 작품의 주제이자 소재가 된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멈추지 않는다. 적어도 그의 삶이 멈추지 않을 때까진 말이다.

 

안성석(사진) 작가
안성석(사진) 작가

| 호기심 많은 방랑자의 원픽…‘사진’ 
안성석 작가는 호기심이 왕성하고, 방랑벽도 꽤 있는 타입이다. 새로운 경험을 즐기고 그로부터 얻는 다양한 자극에 흥미를 느낀다. 이런 기질은 그를 사진의 세계로 인도했다. 안 작가는 “여기저기 다채로운 곳을 여행하고 싶은데 사진만큼 좋은 핑계가 없더라”며 웃어보였다. ‘염불 보단 잿밥’식으로 고른 사진 전공이지만, 생각보다 빨리 두각을 나타냈다. 동기들이 본격적으로 취업 고민을 시작했던 대학 3학년 때, 안 작가는 이미 중고트럭에 온갖 장비를 쟁여 놓고 출사 여행을 다니고 있었다. 일찌감치 사진에 ‘올인’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학생 신분으로 고가의 장비나 차량을 구입하는 건 사실 무리였죠. 촬영 한 번 다녀오면 기름 값, 톨게이트비, 필름 값 같은 것도 왕창 깨졌어요. 아르바이트 계속하고, 장학금 받는 것도 투입하고…그냥 그때 모든 걸 쏟아붓길 각오했던 것 같아요. 마치 요즘 학생들이 스펙 쌓기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처럼요.”

그의 결의는 이내 성과로 나타났다. 2009년 서울의 한 대형미술관은 아직 학부생 신분이던 그에게 데뷔의 기회를 제공했다.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모이는 공모전에 덜컥 선정이 됐던 것. 그렇게 완성된 첫 개인전 ‘역사적 현재(historic present)’는 본격적인 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개인으로 출발해 예술로 치닫는 안 작가의 작품 세계가 시작되는 상징적인 무대이기도 하다. 

“유럽 배낭여행을 하는데 뜬금없이 ‘내가 한국, 서울은 얼마나 알지?’란 의문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서울을 한 달 정도 제대로 여행했죠. 처음 보는 풍경, 처음 알게 된 정보, 낯선 경험들이 많았어요. 특히 지금 이 순간 말고, 과거에 이 땅을 밟았던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더라고요. 이에 대한 답을 구하는 작업이 바로 ‘역사적 현재’였습니다. 우리 주변 다양한 장소들의 옛날 사진을 현재의 모습과 함께 투사하는 식으로 표현했죠.”

 

안성석 작가의 ‘역사적 현재(Historic Present)’ 001, 2009
안성석 작가의 ‘역사적 현재(Historic Present)’ 001, 2009

| 비운의 사진작가, 팔 다리 묶인 대신 날개 달았다
첫 개인전은 단숨에 그를 유망 아티스트 대열로 끌어올렸다. ‘제2의 배병우 작가’로 키워주겠다며 러브콜을 보냈던 상업 갤러리가 있었을 정도. 하지만 안성석 작가는 “설렘보단 갑갑함을 느꼈다”고 했다. 안 작가는 “당시 너무 감사한 말씀들을 많이 들었지만, 어딘가에 전속되고 평생 사진만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더라”고 회상했다. 더 해보고 싶은 게, 해볼 수 있는 게 많을 거란 막연한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전혀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발생하며 안 작가의 예술 인생을 뒤흔들었다. 촬영 겸 여행 차 방문했던 모로코에서 큰 사고를 당하게 된 것. 산악자전거를 타는 여행 코스를 경험하던 중 타고 있던 자전거가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설상가상 인적 드문 오지에서 구조까지 늦어지며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쇄골분쇄골절 진단을 받았어요. 말 그대로 패닉에 빠졌죠. 내가 좋아했던 여행도 끝이고, 무거운 장비를 들어야 하는 사진도 끝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1년 넘게 멍하니만 있었어요. 몸도 마음도 너무 아프더라고요. 그야말로 절망적인 시간이었죠.”

 

불의의 낙상사고로 작가 인생의 갈림길을 마주했던 안성석 작가
불의의 낙상사고로 작가 인생의 갈림길을 마주했던 안성석 작가

1년 반 정도가 흘렀을 무렵 ‘이렇게 끝낼 순 없다’는 생각이 심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깁스를 한 채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배움’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동네 학원부터 시설의 무료강좌까지 재기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아끼지 않고 발품을 팔았다. 편집, 특수효과, 모델링, 3D, 게임엔진, 코딩 같은 것들이었다. 교육이 부족하면 나머지 공부에서 답을 구했다. 안 작가는 “책도 보고 인터넷도 찾아가며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면서 “해외 사이트를 보기 위해 영어 사전을 뒤져가며 밤을 지새운 날도 많았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고통과 싸워가며 얻어낸 교훈은 꽤나 값진 것이었다. 당시의 경험은 카메라에 의지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줬고, 협소한 표현 방식을 크게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연마했던 기술과 방식들은 현재 안 작가가 가장 애용하는 예술적 도구이자, 표현의 통로다. 

“그 사건 이후로 무엇이든 새롭게 배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대신 배운 ‘기술’에 매몰되지 않으려 애쓰죠. 사진을 하면서도 카메라라는 기계에 의존하며 혼란스러움을 느꼈던 적이 있거든요. 배울 땐 빨리 배워서 내가 의도한 표현에 최대한 적용해보고, 잊을 때도 빨리 잊어버리려고 해요. 덕분에 배움 자체가 되게 얕다는 한계가 있죠.(웃음)”

 

VR기기를 다루고 있는 안성석 작가
VR기기를 다루고 있는 안성석 작가

| 메타버스가 궁금하세요? ‘내가 사는 세계’로 초대합니다. 
부상과 재기 이후 안성석 작가는 본격적인 미디어 아티스트로 거듭났다. 앞서 “안성석이 여러 명인 줄 알았다”는 해프닝이 나오게 된 배경도 이때부터의 족적 때문이다. ‘Open Path-관할 아닌 관할’(2013), ‘회전하는 기억’(2016), ‘휴면 동굴, 지금여기’(2016), ‘따가워’(2018) 등의 개인전과 ‘건축에 반하여’(2018), ‘랑랑 완행’(2018) 등의 단체전을 통해 각양각색의 작품 세계를 지속적으로 선보여 왔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의 작품 세계는 지난달 21일부터 성수동 ‘언더스탠드에비뉴’에서 열리고 있는 <아트 인 메타버스> 전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게임인 듯 영화 아닌, 다큐 같은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새롭고 흥미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첫 번째 작품 ‘너의 선택이 그렇다면’은 레이싱 모션 시뮬레이터를 이용한 체험형 창작물이다. 게임엔진으로 만든 프로그램에 진동과 충격을 주는 시뮬레이터를 연결하여 제작한 것으로, 게임센터에서나 볼법한 레이싱 게임을 연상시킨다. 관객이 운전석에 직접 앉아 운전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체험이 개시되는 형태. 각 3분마다 작품이 리셋되며 새로운 관객들을 맞는다. 

“시작하자마자 경찰차 12대가 (운전자의) 차량으로 돌진해서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요. 관객은 도저히 그 상황을 빠져나올 수 없죠. 그때 우린 물리적인 충격과 심리적인 무기력함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경찰 같은 권력과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얼마나 쉽게 무력화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와 연관이 깊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너의 선택이 그렇다면_컴퓨터, 모션기어 시뮬레이터, 핸들휠, 3구동 페달, 스피커, TV, TV독립스탠드_2021
너의 선택이 그렇다면_컴퓨터, 모션기어 시뮬레이터, 핸들휠, 3구동 페달, 스피커, TV, TV독립스탠드_2021

‘권할만한 여행’과 ‘내가 사는 세계’ 두 작품은 작동원리가 비슷하고 맥락도 닿아있는 작업물이다. 과거 부상 회복기부터 크게 관심을 가졌던 가상의 공간을 표현, 이를 관객들에게 선보이려는 시도다. 안성석 작가는 “사고 이후 활동이 제한되면서, 물리엔진으로 게임 속의 세상을 만들고 그 속에 있는 여러 장소들에서 시간을 보내길 즐겼다”면서 “이를 여행이라고 규정하고, 우리가 아는 세상 이외의 장소를 여행해 보길 권하는 심정으로 만든 작품이 바로 ‘권할만한 여행’”이라고 덧붙였다. 

‘내가 사는 세계’ 역시 마찬가지다. 늘 개인의 경험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호기심을 예술로 구현하는 만큼, 안 작가 개인의 취향을 보다 구체적 혹은 적극적으로 반영한 장소를 제시하는 작품이다. 내레이션 형식의 안내를 추가해 관객들을 친절하게 자신의 공간으로 끌어들인다. <아트 인 메타버스>에서 안 작가가 소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열린 이야기를 품은 세계다. 작가의 의도나 메시지가 뚜렷하기 보단, 체험자의 상황과 감정에 따라 각자의 영감이나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됐다. 안 작가는 “예술은 엔터테인먼트와 달리 모두에게 동등한 가치를 전할 수 없다”면서 “어떤 특정한 상황에 놓인 관객이라면 작품 설명이나 배경지식 없이도 새로운 경험과 특별한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8건축에반하여_세마창고_기획 심소미_작품명_내가 사는 세계_3채널비디오_2018

| 30인치 세상 만끽…“다시 현장으로 뛰어 나가야죠.”
2009년 개인전을 시작으로 활짝 열린 안성석의 예술 세계는 자신과 주변의 세상을 예술로 투사하며 확장돼 왔다. 불의의 사고로 강제된 휴식기마저 보다 새롭고 다채로운 작업을 가능케 하는 동력이 됐다. 왕성한 호기심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는 그답게, 점점 더 진화하는 기술과 새롭게 등장하는 트렌드들은 행복한 고민거리다. 최근 협업을 진행한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스타트업 ‘아츠클라우드’의 활동 역시 그에겐 굉장한 흥밋거리다. 안 작가는 “전시를 넘어 아트 마켓의 주역까지 되고자 하는 아츠클라우드의 활동은 새롭고 반가운 것”이라며 “향후 어떤 노력과 결과들이 구체적으로 이어질지 기대하고 응원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아츠클라우드가 기획‧운영하는 <아트 인 메타버스>전시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안 작가는 “이번 전시는 동시대 가장 트렌디한 시도와 표현을 한 곳에 담은 희소성 높은 무대”라며 “급하게 뭘 얻어가겠다는 마음 보단, ‘가급적 오래 머물러보자’는 느긋한 마음으로 전시를 대하면 새로운 감각과 경험들을 얻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트 인 메타버스] 출품작 ‘너의 선택이 그렇다면’을 체험하고 있는 안성석 작가
[아트 인 메타버스] 출품작 ‘너의 선택이 그렇다면’을 체험하고 있는 안성석 작가

럭비공처럼 활약하는 그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일까? 돌아온 대답은 의외로 ‘회귀’였다. 올해는 그의 예술적 고향인 ‘사진’으로 돌아갈 계획이라는 것. 이는 한동안 몸담았던 가상의 세계를 벗어나 실제 세상으로 나가겠다는 포부이기도 하다. 

“사진을 찍기 위해선 어디로든 가야하잖아요. 그런데 굳이 밖에 나가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작업들을 익히고 표현하면서 작업실에 박혀 있는 시간이 너무 늘어난 것 같아요. 문득 종횡무진 현장을 누비던 그때가 그리워지더라고요. 사진의 한계를 뛰어 넘는 도구들을 애용했지만 사진이 주는 오롯한 영감도 결코 무시할 수 없죠. 올해부턴 다시 열심히 뛰어보려고요.(웃음)”

 

/사진: 안성석 작가 

 

필자소개
최태욱

눈이 보면, 마음이 동하고, 몸이 움직이는 액션 저널리즘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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