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 멈춰!”…기억 초기화로 ‘사유의 힘’ 창조하는 예술가
‘아트 인 메타버스’展 안설하 작가 인터뷰
“판단, 멈춰!”…기억 초기화로 ‘사유의 힘’ 창조하는 예술가
2022.03.08 14:37 by 최태욱

[Artist in METAVERSE]는 예술과 기술을 융합하는 아티스트를 발굴‧육성하는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스타트업 ‘아츠클라우드’ 주최의 ‘아트 인 메타버스’(5월 31일까지, 성수동 언더스탠드에비뉴)展 참여 작가를 소개하는 연재 시리즈입니다. 

“삶은 학습의 연속이잖아요. 그만큼 머릿속에 쌓인 정보도 많죠. 그런데 학습된 의식과 인식이 과연 옳기만 할까요? 더 생각해 볼 여지나 상상할 필요가 전혀 없을까요? 저의 예술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안설하(35) 작가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사유하는 힘’으로부터 나온다고 믿는다. 그녀가 대중으로 하여금 무엇이든 새롭게 생각하고, 무한히 상상하도록 돕는 예술을 추구하는 이유다.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들여 쓰는 주제가 바로 ‘의도적인 판단정지’다. 기억의 ‘리셋’을 통해 선입견이나 편견 같은 주관적 의식들을 걷어내면, 비로소 현상을 새롭게 혹은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을 때 얻어지는 카타르시스를 위해, 안설하 작가는 오늘도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물음표를 던진다. 

 

안설하(사진) 작가
안설하(사진) 작가

| 혼잣말 하던 소녀…혼자 전시‧기획하는 아티스트로
안설하 작가의 예술가적 기질은 이미 꼬마 시절부터 도드라졌다. 또래들과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봤고, 무엇이든 공상하고 상상하기를 즐겼다. 안 작가는 “어릴 때 ‘쟤 또 혼잣말 하네’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생각들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다보니 다소 엉뚱한 아이로 비쳐졌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초등생 시절 ‘판단 정지의 순간’을 직접 경험했던 기억은 안 작가의 캐릭터를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화다. 

“혼자 이모 댁에 놀러가는 길에 잠시 멈춰 섰는데, 순간 아무런 기억도 안 나는 거예요. 여기가 어딘지, 내가 뭘 하는지, 심지어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찰나에 백지 상태가 되더라고요. 정말 혼란스러웠죠. 어쩌면 전 평생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구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웃음)”

안설하 작가가 자신이 품은 고민과 혼란을 그림으로 풀기 시작한 건 17세 무렵부터였다.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보단 단순히 생각을 시각화하고자 시작했던 취미에 가까웠다. 안 작가는 “인간의 고민을 글로 풀어내는 게 철학자라면 예술가는 그걸 그려내는 사람인 것 같다”면서 “그래서인지, 그림을 그릴 때는 뭔가 해소되는 느낌마저 들더라”고 회상했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이후, 대기업 소속의 VMD(Visual Merchandising) 디자이너로 활약했지만 그녀의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일상을 탈피하고 새로움을 갈망하는 욕구는 고스란히 그녀의 캔버스로 옮겨졌고, 작업이 쌓이면 직접 전시까지 기획하여 대중들과 교감했다. ‘안설하 개인전’(2016‧부천시청‧부천), ‘아현’(2018‧미엘‧서울), ‘자가치유’(2019‧미엘‧서울), ‘shadow, curtain’(2020‧중간지점‧서울), ‘가려진 부분은 제외하고 감상해주세요’(2021‧갤러리 아미디신촌‧서울) 등의 전시들은 모두 그런 시도의 결과다. 

“회화 전공자가 아니다보니 전시 쪽 네트워크가 전혀 없었어요. 전시회에 나가고 싶으면 직접 기획해서 가능성 있는 곳에 제안해보는 수밖에 없었죠. 덕분에 전시기획 능력도 조금은 기를 수 있었고요.”

 

2007년 당시 VMD로서의 역량이 돋보였던 무대디자인 [사랑에 관한 다섯가지 소묘]
2007년 당시 VMD로서의 역량이 돋보였던 무대디자인 [사랑에 관한 다섯가지 소묘]

산업과 예술의 경계를 오가던 안설하 작가는 2015년, 7년여에 걸친 회사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후 회화 전공으로 대학원까지 진학하면서 노선을 확정했다. 안 작가는 “작품과 전시기획을 경험하다 보니, 보다 전문적인 예술 교육에 대한 갈증이 생기더라”고 회상했다. 그 결정은 주효했다. 대학원에서 심화된 배움을 접하는 과정에서, 소녀시절 단 한 번의 경험으로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의문이 풀리게 된 것이다. 

“공부를 하면서, 현상학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이 제시한 ‘에포케(epoche)’라는 개념을 알게 됐어요. 고대 그리스어로 ‘정지, 보류’를 뜻하는 용어인데, 사물 혹은 현상에 대해 자연스럽게 떠올려지는 인식을 ‘일단 정지’시키고 순수한 체험과 의식을 획득하는 방법을 설명하죠. 기존의 모든 기억을 일부러라도 없애면,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예요. 마치 어린 시절 제가 백지가 됐던 그 순간처럼 말이죠.”

 

| 얻기 위해 ‘잊는’ 마법의 단어 ‘에포케(epoche)’
안설하 작가의 작품은 초기부터 공통된 주제와 일관된 톤 앤 매너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대상에 대해, 마치 처음 접하는 것처럼 바라보고 상상하며 이를 표현한다. 후설의 ‘판단정지’ 개념을 깨닫기 전부터 본능적으로 비슷한 맥락의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철학자의 이론을 통해 머릿속이 맑아진 이후 안 작가의 작품 세계는 보다 명징해졌고, 메시지도 뚜렷해졌다. 사람들이 대상을 자동적으로 인식하거나 인지하는 상황에 급제동을 걸어 ‘판단정지’의 상태를 만들고, 대신 자유롭고 한계 없는 상상의 길을 열어주고자 한다. 안설하 작가가 관람자로 하여금 시각의 교란을 일으킬 수 있는 회화 작업에 매진하고 있는 이유도 그래서다. 

“예를 들어 나무라고 한다면, 전 나무 속 진액, 나뭇결 같은 걸 탐구해요. 근처에 작은 돌맹이도 들춰보죠. 눈에 보이지 않는 면을 보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대상을 쪼개고 변형하면 시각의 교란이 일어나고, 이를 통해 관람자는 판단정지의 상황을 경험하게 됩니다.”

 

시각의 교란, 2022, oil on canvas, 116.8 x 91.0cm

지난 2월 21일부터 성수동 ‘언더스탠드에비뉴’에서 열리고 있는 <아트 인 메타버스> 전시에서는 안설하 작가가 제시하는 판단정지의 효과를 직접 경험해 볼 수 있다. 제목부터 ‘에포케(epoche‧판단정지)’인 해당 작품은 사물이 깨지고 변형되고 가려지는 식으로 표현되어 관객들을 의도적인 판단정지 상황으로 이끈다. 안 작가는 “의자를 똑같이 그리면, 바로 ‘의자다!’라고 떠올릴 수 있지만, 레이어들을 겹쳐놓고 형체를 변형‧왜곡시키면, 순간 ‘뭐지?’하고 반응하게 된다”면서 “바로 그 순간이 새로운 생각이 솟구치는 찰나이자, 작가의 의도가 빛을 발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작가 개인적으론 이번 작품이 새로운 도전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는 주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작업했지만, 이번 작품은 일러스트레이터와 포토샵 같은 그래픽 툴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디자이너 생활을 오래 했던 만큼 툴 자체는 익숙했지만, 이를 예술의 영역으로 가져온 것은 처음이나 마찬가지. 안 작가는 “회화만이 가질 수 있는 가치를 고민하다가 컴퓨터 툴까지 접목해본 작품”이라며 “덕분에 물과 기름, 그리고 디지털이 어우러진 신선한 작업을 경험해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에포케, 2022, graphic design, [아츠클라우드 당선작]

| 늘 색다름 선사하는 아티스트로 기억되고파
기존의 상식을 ‘리셋’시킨다는 개념은 자칫 너무 난해하고 관념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작가로서 관객과의 소통에 대한 우려는 없을까? 이에 대해 안 작가는 “답답함도 일종의 감상”이라며 우려를 일축한다. 

“예술은 결국 사람의 얘기예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욕구가 있고, 예술가의 그러한 욕구를 구현한 매개체가 바로 작품이죠. 나란 사람의 이야기와 의도가, 타인의 눈에는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든, 그저 답답함을 느끼든 결국엔 이를 통해 새로운 생각과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 의미 있겠죠. 전 그것도 온전히 하나의 감상이 된다고 보니까요.” 

 

작품을 통해 생각과 감정의 통로를 열어주려는 안설하 작가
작품을 통해 생각과 감정의 통로를 열어주려는 안설하 작가

어린 시절부터 자유로이 공상하는 습관을 통해 예술적 밑천을 차곡차곡 쌓아왔던 안설하 작가. 산업디자인 영역에서의 ‘외도’를 통해 예술적 갈증을 확인했고, 보다 심화된 배움을 통해 오랫동안 지속됐던 예술적 고민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 그녀는 자기 마음대로 보던 세계를 관객들과 함께 보고자 한다. 지난해 말 <아트 인 메타버스> 전시작 공모를 진행한 ‘아츠클라우드’와의 인연이 보다 값지게 느껴졌던 이유도 그래서다. 

점점 스마트해지는 세상, 하지만 그럴수록 생각할 필요도 함께 사라져 가는 시대에 안설하 작는 다르게 생각하고, 새롭게 상상하라고 말한다. 그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함이자, 주체성이라면서 말이다. 

“여행이 설레는 이유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때문이잖아요. 인간은 누구나 새로운 걸 원하는 무의식적인 욕구가 있죠. 특별하게 보고 다르게 해석하려는 강한 지적 욕망도 있고요. 저와 함께 잠시 판단을 정지해보지 않으실래요? 그럼 아마 무한한 상상의 세계가 새로이 펼쳐질 거예요!”

 

/사진: 안설하 작가 

 

필자소개
최태욱

눈이 보면, 마음이 동하고, 몸이 움직이는 액션 저널리즘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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