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지비팅길(Gibitngil)섬의 미소천사 안젤라가 한동안 수도꼭지 앞을 서성입니다. 쑥스러운 미소만 보일 뿐 먼저 다가오지 못하던 수줍음 많은 소녀지만, 이제 마음 놓고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다는 생각에 까만 눈동자가 반짝입니다. 희망브리지의 빗물식수시설은 안젤라와 아이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킬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안젤라와 친구들이 학교에 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정성스레 그렸던 희망T를 어제 기쁘게 받아들고서도 그 자리에서 입지 않아 이유가 궁금하던 차였는데, 교복 대신 입으려고 아껴두었다는 말에 뭉클합니다.
아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희망T를 입고 학교로 가고 있습니다. 희망T에 담은 마음이 아이들에게 전달되고, 조성된 기금으로 건강한 물을 마시게 됐습니다. 기적과도 같은 희망의 순환 고리가 그렇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2013년 태풍 ‘하이옌’으로 극심한 피해. 2년이 흐른 지금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 '물'
희망브리지는 지난 7월12일 부터 23일까지 필리핀 지비팅길(Gibitngil) 섬과 다쿠(Mambacayao daku)섬을 찾았습니다. 우리에게 낯선 이름의 두 섬은 지난 2013년 태풍 하이옌으로 인해 가구의 90%가 전파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다행히 현재 대부분의 가구가 복구되고 주민들의 삶도 평상시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바로 물입니다.
지비팅길섬과 다쿠섬은 자체적으로 식수와 생활용수를 조달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미 수차례 우물 개발에 실패하면서 모든 물은 인근 지역에서 구입하고 있습니다. 지비팅길섬의 경우 해상 30분 거리의 세부 섬에서, 다쿠섬은 무려 해상 2시간 거리에 위치한 반타얀 섬에서 물을 구입하고 있습니다.
구입에 들어가는 비용은 가계 생활비의 약 5분의 1을 차지하는데요. 식수가 귀한 건기에는 수입의 절반을 물을 구입하는데 지출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소규모 농업과 어업으로 살아가고 있는 두 섬 주민들의 한 달 수입은 평균 3천 페소(한화 약 7만6천원)에 불과합니다. 이 중 상당 금액이 물 구입비용으로 들어가다 보니 삶의 질은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2시간 거리로 물을 사러 사는 아이들
더 큰 문제는 이로 인한 피해를 아이들이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부모님들이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농사와 어업에 몰두하는 사이 아이들이 멀리까지 나가 물을 사옵니다. 지비팅길섬과 다쿠섬에서는 깡마른 체구의 남자 아이들이 몸의 절반 가까이 되는 물통을 어깨에 지고 오가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학업에 소홀하게 되면서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물이 귀해 오래 방치됐던 물을 마시기도 하는데, 이끼가 끼어있거나 벌레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로 인한 수인성 질병 역시 걱정거리입니다.
희망브리지는 아이들이 처한 현실적인 문제에 보다 근본적으로 접근하고 싶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닿은 곳은 물이었습니다. 물만 제대로 공급받아도 삶은 나아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땅을 파도 소금물만 나오는 작은 섬. 유일한 현실적 대안은 '빗물'
이미 지비팅길섬과 다쿠섬은 우물 개발에 여러 차례 실패했습니다. 땅을 파도 소금물만 고일뿐입니다. 유일한 현실적 대안은 빗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희망브리지는 삼성디스플레이 임직원들을 비롯해 1만 여명이 희망T캠페인에 참여해 조성된 기금으로 빗물식수시설 설치를 진행했습니다. 각 섬당 18톤 규모의 빗물식수시설이 마을 회관에 설치됐습니다.
취수부의 넓이는 가로‧세로 각 10미터로, 여름철 한 달 강우량이 평균 350~400mm인 이 지역에서는 최대 월 40톤가량의 빗물을 식수로 환원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하루 2리터의 물을 식수로 사용한다고 하면, 한 달 기준 약 670명분이나 됩니다. 지비팅길 섬과 다쿠 섬의 인구는 각각 500명과 280명 규모로, 이제 이곳 주민들의 식수 자급도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빗물을 받아 마신다고요? 걱정 마세요!
빗물은 더럽다는 편견과 달리 가장 깨끗한 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빗물을 모아 사용했습니다. 햇빛을 차단하고 필터를 통해 빗물에 쓸려온 모래, 먼지, 나뭇잎 등의 불순물을 걸러낸 후 탱크에 저장하면 손쉽게 생활용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희망브리지의 빗물식수시설 설치는 현지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빗물을 식수로 이용한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보이던 주민들이 손수 팔을 걷어붙이고, 기초공사부터 탱크 설치까지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이웃 마을 주민들까지 찾아와 설치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주민들의 열의 덕분에 빗물식수시설을 예상보다 빠른 시일 내에 설치할 수 있었습니다.
모터를 사용하지 않는 자연적인 시설이기 때문에 전력이 들지 않을 뿐 아니라, 현지 주민들이 직접 설치에 참여한 덕분에 추후 문제가 발생해도 직접 수리할 수 있게 됐습니다. 식수를 마셔본 주민들은 너무 맛있다며 엄지를 치켜듭니다.
희망T로 기적을 함께 나눠주세요
물을 얻은 주민들은 벌써부터 들떠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수도꼭지 앞에 서 몇 번이나 틀어봅니다. 설치 후 보수를 위해 시설을 찾아갔더니 이미 주민들이 철사를 이중, 삼중으로 고아 고정시켜두고 못까지 박아두었습니다.
주민들 스스로 원칙도 세웠습니다. 기존에 미네랄워터의 경우 30페소, 탭 워터(수돗물)는 20페소에 구입해왔던 주민들은 빗물식수시설로 얻은 물은 10페소에 구입하기로 했습니다. 구입비용이 절반 이상 줄어들게 됩니다. 지불한 비용은 빗물식수시설 관리에 사용될 예정입니다.
아이들의 삶도 달라질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2시간 거리까지 나가 물을 사오지 않아도 됩니다. 그 시간은 온전히 아이들의 것입니다. 건강한 물을 마시며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되겠지요.
물을 사는데 쓰였던 간접적인 노동력을 보다 생산적인 일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삶의 질이 하나씩 업그레이드 될 것이라 믿습니다. 물 하나가 가져온 변화, 희망T 하나가 가져온 기적입니다.
희망T를 입고 노를 저어 학교로 가는 아이들의 그림 같은 모습을 보면서 희망브리지는 또 다른 꿈을 꿉니다. 더 많은 지역에 빗물식수시설을 설치하려 합니다. 지금은 마을회관에 설치했지만, 학교에 시설을 설치해 아이들이 보다 편리하게 사용 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더 나아가 가정용 빗물식수시설을 통해 삶 가까이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우리의 작은 나눔은 물이 되고, 물은 아이들에게 건강한 미래가 됩니다. 희망T와 함께 기후난민 어린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선물해주세요.
* Photo by 지성진 작가, 이동환 PD (재능 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