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先行) 않는 게 선행(善行)
선행(先行) 않는 게 선행(善行)
2016.02.18 16:50 by 시골교사

원피스 싫어하는 꼬마 아가씨, 청바지 단벌신사 대학교수님. 겉치레 없는 문화가 만들어진 비결은?

"아니 도대체 왜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거죠!"

큰 아이의 유치원 보모인 크리스티안(Christian)에게 물었다. 그녀는 당황했다. 마치 그런 얼토당토한 질문은 처음 받아봤다는 것처럼. 그리곤 심호흡을 한 후 내게 말했다.

“프라우 권(Frau Kwon)! 학교에 들어가서 해야 할 공부를 왜 유치원에서 합니까. 그래선 절대 안 됩니다. 학습은 학교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먼저 공부하면, 아는 것만큼 학교수업에 대한 흥미가 떨어져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없게 됩니다.”

맞다. 그녀의 말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맞다. 하지만…

학교 가서 해야 할 공부를 왜 유치원이나 집에서 합니까?(사진:Soloviova Liudmyla/shutterstock.com)

 

| 독일 유치원엔 학습이 없다

독일 아이들의 취학 적령기는 당해 7월 1일을 기준으로 만 5세이다. 큰 아이는 11월생이라 욕심을 부리지 않고 1년 늦춰 보냈다. 사실 거기엔 엄마‧아빠의 학업을 위한 경제적‧시간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유치원은 하루 종일 아이를 봐주는데다, 식사비 2만원 외엔 비용이 전혀 들지 않지만, 초등학교 돌봄 교실은 하루 4시간(정오부터 오후 4시까지)에 매달 7만원을 내야 한다. 이 액수는 소득수준과 상관없는 고정액이어서 아이 둘을 보내야 하는 우리 부부에겐 또 다른 부담이었다.

시간상의 문제도 있었다. 아이 둘이 같은 곳에 있으면 수업 끝나고 후다닥 가서 한꺼번에 찾으면 그만인데, 아이들이 흩어져 있으면 그만큼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 나와야 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큰아이가 작은 아이와 함께 유치원에 1년 더 머물러 주길 내심 바랐던 것이다.

그런 큰아이가 유치원 졸업반이 되었을 무렵, 유치원에서 예년과 다른 색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초등학교 입학 준비반’이 개설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겐 놀랄 일도 아니다. 진학이나 입학 준비를 따로 하는 건 우리나라에선 흔한 풍경이니. 하지만 독일 유치원은 달랐다. 선행학습은커녕 ‘학습’ 자체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모국어인 독일어의 알파벳조차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에서 초등학교 준비반이 개설된다고 하니, 사뭇 기대도 되고 호기심도 생겼다. ‘이제야 독일도 정신을 차리는 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 최소한 알파벳은 줄줄 읊어야 학교에 가지.(사진:Ollyy/shutterstock.com)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학부모들에게 나눠진 안내문에는 내가 기대했던 독일어, 영어 등의 학습내용이 전혀 없었다. 대신 오리고 붙이고 만드는 창작활동, 자연학습, 안전교육, 그리고 소방서‧동물원‧박물관 등 견학 중심의 체험학습이 주였다.

사실 독일을 겪으면서, 유치원에서 많은 걸 가르쳐 주리라는 바람과 욕심은 애진작에 눈치껏 버렸다. 큰아이 3년, 작은 아이 5년간의 유치원 생활 중에 지적인 학습과 관련된 내용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입학을 코앞에 둔 아이를 생각했을 땐,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바람이 하나 있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최소한 알파벳이라도 가르쳐 주겠지!’ 하는 것이었다. 이러다가 큰아이는 알파벳 하나 모르고 학교에 들어갈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참에, 유치원 보모에게 마치 대역죄인 마냥 질타를 들은 거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선 이렇게 되묻고 있었다. ‘유치원에서 안하면, 집에서라도 하겠지. 독일 엄마들이라고 뭐 크게 다르겠어?'  딸아이와 친한 독일 엄마에게 이 부분에 대해 물어 보았다.

“유치원에선 알파벳을 가르쳐 줄 마음이 없어 보여요. 그럼 부모들이 집에서 가르쳐 학교에 보내나요?”

그 때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학교에 가면 알아서 다 해줍니다.”

그녀는 아이들 학습에 대해 조급해하지 않았고, 학교에 대한 믿음도 확고했다.

어찌 보면 조기교육의 바람이 유치원은 물론이고 부모들 사이에서조차 불지 않는 건 너무 다행인 일이다. 내 코가 석자여서 아이들 선행학습에 마음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경쟁사회에서 조기교육에 관심 없는 세상이 있다니! 나는 끊임없이 믿어지지 않았고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선보다 앞에서 시작하면 더 빨리, 더 멀리 갈 수도 있지 않을까?(사진:Sergey Novikov/shutterstock.com)

 

| 교육에 조바심을 내지 않는 부모들

이렇게 법과 제도를 잘 따르는 민족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겠냐고? 아니다. 제도에 순응하는 게 아니라 교육에 대한 바른 철학이 보편화 되었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교육방침의 단순한 논리 중 하나. ‘선행학습은 아이를 망칩니다. 선행학습은 학생들을 학교생활의 부적응자로 만듭니다.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학교 교육은 무너집니다’라는 구호를 철저하게 믿고 따르는 분위기와 국민성, 이것이 바로 건강한 교육풍토를 만들고 있었다.

자식교육에 관심 없는 부모가 어디 있고, 내 자식 잘되길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마는 독일 부모들은 좀 다른 것 같다.

독일 부모들에게 자녀는 절대적이면서 동시에 상대적인 존재이다. 절대적이라는 말은 그들의 인격, 개성과 타고난 재능을 그대로 존중해 준다는 말이다. 자녀를 다른 아이들의 비교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거다. 상대적이라는 말은 내 아이는 다른 아이와는 다른 개성, 재능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부모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기에 그들은 자녀들을 조기에 경쟁에 내몰지도 않거니와 아이의 결과를 놓고 조바심을 내면서 서로를 힘들게 하지도 않는다.

 

시골교사_2_이모저모

독일교육 이모저모

조바심 없는 교육의 힘, 배움이 즐거워요!

독일 유치원 보모들은 참 고마운 존재입니다. 내가 못하는 몫을 인내심을 갖고 대신 해주죠. 아이들 교육에 관해서라면, 무한신뢰가 가능했던 게 그들입니다. 그래서 유치원 보모의 말대로 아이에게 알파벳조차 가르치지 않고 학교에 보냈죠. 마음도 편했습니다. 주변에 조기교육에 대한 열풍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아이가 입학하고 1년 동안, 독일어 시간에 배운 거라고는 알파벳 아(A)에서 제트(Z)까지가 전부였습니다. 처음에는 알파벳을 인쇄체, 필기체로 몇 개월간 쓰기만 하다가, 시간이 좀 지나니까 각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단어, 예를 들어 아(A)하면 애플(Apple,사과), 베(B)하면 비르네(Birne,배) 등을 배워 나갔죠. 1년간 옆에서 지켜보는 나로서는 ‘참 징하게 진도가 안 나간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1학년을 마쳐갈 즈음에 아이가 천천히 문장을 읽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책을 줄줄줄 읽어 내려갔습니다. 까막눈이던 우리 아이에게 책을 읽게 해준 학교와 선생님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유치원 보모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고요.

이런 느린 교육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만약 유치원 보모 말을 무시하고, 아이가 책을 읽을 정도로 공부시켜 학교에 보냈다면 아이의 첫 해, 1년이 어땠을까? 아이가 생애 처음으로 내딛은 배움의 현장에 잘 적응했을까? 배우는 것이 즐겁고 흥미롭게 느껴졌을까? 그리고 이렇게 내가 학교와 교사에 대한 감사와 신뢰감이 생겼을까?

이게 바로 순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순리를 따르는 것이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닐까요?

(학교에서) 배우고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사진:Andresr/shutterstock.com)

 

다음이야기학교, 학생, 교사는 물론, 할아버지‧할머니까지 하나 되는 축제. 독일 초등학교 입학식 현장 엿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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